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인간 생활의 연대성 (창세기18:22-33)

새벽지기1 2017. 3. 29. 07:38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창1 十八·二十二)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은 만민의 아버지 시요, 사해는 다 동포이며 형제입니다. 어찌 형제간에 궤휼(詭譎)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전 인류와 우리에게 주시는 성경의 교훈이올시다.
창세기를 읽으면 거기에 세계의 첫째 살인자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쳐서 죽인 그 후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나타나셔서 물으시기를『네 동생이 어디에 있느냐?』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때에 가인이 대답하는 말이『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마 그 뜻은 내 형제가 어떻든지 자기에게 상관이 없다고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가인처럼 생각하는 가인의 후손이 동서양을 통해서 옛날도 있었고 오늘날도 많이 있습니다.
동양의 사상가 가운데도 제자백가 중에 하나인 양자 같은 사람은 극단의 개인주의 이기주의 철학을 그르쳤습니다.
서양에도 철학자 니이체 같은 사람은 양자철학에 못 지 아니하는 극단의 개인주의 상을 강조해서 인간 생활의 사회성을 전혀 무시하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마는 우리가 이렇게 인간 생활의 사회성을 사상적으로 부인한다고 해서 우리 인간의 서로 엉키어 있고 연결되어 있는 생활의 연대성의 사실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연대성이라고 하는 말은 서로 연(聯)한 것같이 우리 사람의 생활은 각각 나뉘어 있지 않고 다 서로 서로 연결되어 헤어질래 야 헤어질 수 없는 연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로서 혼자 살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자연히 사회를 이루어 살게 되어 있는 까닭에 사회의 한 분자가 되었고 사회의 한 분자가 된 다음에는 그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실에 대하여 공동적인 책임을 자연히 지게 됩니다.
만일 어떠한 사람이 서양의 이야기책에 있는 대로 로빈슨 쿠르소처럼 절해고도에서 일생을 혼자 살다가 죽는다고 하면 그것은 별 문제입니다.
우리 동양에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대로 중국의 배이숙제 같이 수양산에서 나물만 먹으면서 살다가 죽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별 문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없고 사회에 섞이어서 사회의 한 분자로 산다고 할 것이면 원래 인간 생활이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까닭에 우리가 그 연대성을 부인할래 야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날과 같이 과학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통신망 교통망이 극히 발달된 이러한 세계에는 이 인간 생활의 연대성이란 일 국부에만 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단계가 있는 것입니다.
가장 비근한 예를 들면 一월 十三일 저녁 방산 시장에서 일어난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다. 신문지상을 본대로 말하면 어떤 노인이 술이 과하게 취해서 촛불을 켜 놓고 자다가 부주의한 탓으로 그만 촛불에서 불이 났다고 합니다. 가련하게도 나이 많은 노인은 그 불에 타죽고 말았으니 그 얼마나 비참한 죽음입니까. 그러나 그 비참(悲慘)은 그 노인 한 분에게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노인 한 분의 실수로 말미암아 시장 안에 있던 물건과 건물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노인과 아무 상관없는 二백 세대 이상이 그 화재로 말미암아 많은 손해를 보고 한지에 나와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간 생활이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뗄래 야 뗄 수 없습니다.
저 태신호(太信號)사건을 보십시오. 신문지상에 보도된 대로 갑자기 三등 객실에서 불이 났다고 합니다. 그 배에는 六五명의 三등 선객이 있었다고 합니다. 불이 일어나게 되므로 선장은 명령해서 하나밖에 없는 三등실 문을 밀폐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그의 생각에는 그렇게 해서 다른 객실이 연소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그렇게 한 것으로 압니다. 하여간 그 때에 그의 머리가 잠시 잘못 돌아감으로써 六十五명의 선객이 질식해서 세상을 떠났다 합니다. 한 사람의 과오가, 한 사람의 일시적 잘못 판단이 그 배를 타고 사랑하는 고향이 사랑하는 양친을 뵈려고 가던 사람, 친척집게 가던 사람, 장사하려고 집을 떠난 六十五명의 생명이 일순간에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인간 생활이란 이렇게 연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다 한 배에 타고 항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배 가운데에 어떤 사람이 그릇된 행동을 함으로써 잘못 파괴된다면 그 배에 탔던 선객 전원에게 그 영향이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인간 생활의 연대성을 생각할 때 내 생활을 얼마나 조심하여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게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상생활에도 관계되는 까닭입니다. 병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어떤 전염병으로 앓게 되면 나 혼자만 앓게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좋지 못한 병이면 내 가족에게 미치고 우리 이웃에게 마지막에는 온 동네에 전염될 우려가 있는 것입니다.
세계 제一차 대전 후에 소위 서반아(西班牙)감기라고 하는 것이 어떤 한 사람에 의해서 감염 유행되었는데 이상히도 이 독 감기가 온 세상에 다 펴져 우리 한국에까지 와서 그 때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에 학교가 휴강하고 공장이 폐업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독감으로 죽은 사람이 제一차 대전 때 죽은 사람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인간 생활이란 이렇게 연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악도 역시 연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서 화재의 이야기를 했지만 약 二十년 전 바로 음력 새말 때, 신의주 채소거리에서 큰 불이 일어나서 八十여 세대가 전소를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화재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때 신문 보도대로 지금까지 기억되는 대로는 어떤 가난한 부부가 촌에서 신의주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 가난한 부부는 이사 와서 그저 안 먹고 안 입고 아끼고 어떻든지 힘을 다해서 부지런히 사업하고 아침 일찍이 일어나 노력하기를 五, 六년 동안 하니까 그 때 돈으로 여러 만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 자연히 이상한 마음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전에 없던 유혹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옷도 깨끗이 입을 마음이 생기고 집도 좀 크게 짓고 살게 되고 부인은 값비싼 치마 저고리와 화장품을 사 들이게 되었고 남편은 전에 가지 않았던 술집을 점점 드나들게 되고 마지막에는 어떤 첩까지 얻게 되었다 합니다. 그러고는 그 다음에는 저녁마다 남자는 항상 자기 집에 있지 아니하고 더욱이 음력 명절 때인지라 자기 집에 오지 않았습니다.
촌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도회지에 들어와서 같이 입지 않고 먹지 않고 노력을 해서 돈을 좀 벌게 되니까 남자는 그 돈을 가지고 그러한 재미만 보게 되니 그 여자의 마음이야 어떠했겠습니까? 그 날 저녁에 신문지상에 보도된 대로 보면 부인이 밤새도록 이제나 들어올까 조금 있다 들어올까 고대하여 한시가 되어도 두 시가 되어도 들어오지 않으므로『옜다 돈이 있기에 그런 방탕한 일을 하지 돈이 없으면 그런 짓을 하겠는가 이 집을 불사르고 나도 불에 타 죽겠다』이렇게 결심하고 그만 집에 불을 질렸다고 합니다.
그 결과는 그 집만 탄 것이 아닙니다. 그 집과 아무 상관없는 八十여 세대가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보게요, 남자의 허랑 방탕한 죄와 음란한 죄가 여자의 질투와 분노의 죄로 변했습니다. 이것을 소위 에너지 변화라고도 합니다.
그 질투의 불이 실지 화재로 변했습니다. 그 실지 화재는 八十여 세대의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까지 못살게 하였습니다. 이것을 죄의 연대성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법에 의하여 군경에게 잡히게 되고 재판소에 가서 二년 혹은 三년의 형을 받고 그 징역을 마치면 책임을 다한 줄로 생각들 합니다. 그러나 이 죄 짓는 사람도 한 사회에 속한 까닭에 경찰서원이 많이 있어야 하고 판사, 검사도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재판소와 경찰서, 형무소도 크게 지어야 합니다. 이 경찰서 비용, 재판소 비용, 형무소 비용을 누가 내는지 아십니까?
죄를 안 지은 양민들이 땀을 흘려 모은 돈으로 세금을 내어 이것을 유지합니다. 이 사람들이 죄지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가정에 미치는 영향, 자기 동네에 미치는 영향,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 이런 모든 영향을 생각하면 사람이 죄 지음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이 망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아무 상관없는 사회전체 조금 더 나아가서 민족 전체가 죄 값을 내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라고 하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이 인간 생활의 연대성을 생각할 때 한 가지 감사한 것은 이런 죄악의 연대성이 있으니 만큼 선도 연대성이 있는 것입니다. 덕행도 역시 연대성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창세기 十八장을 읽었지만 거기에 아브라함이 자기 조카 롯을 생각하면서 간절히 소돔과 고모라성을 아껴 주시기를 기도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는 말이 하나님 만일 소돔 고모라 성에 의인 五十명이 있다고 하면 그 의인 五十명을 멸해서야 되겠습니까? 이 사람들을 구하여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렇다면 만일 그 성에 五十명이 있다고 할 것이면 그 의인 五十명을 위해서 내가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의인 五十명을 위해서 온 지경을 용서하시겠다고 말씀하시었습니다. 그러나 가련한 것은 의인 五十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점점 내려 가다가 마지막에 아브라함은 의인 十명을 위해서 소돔과 고모라를 용서하여 주실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의인 十명 마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하고 말았습니다.
만일 그 성에 의인 열 명이 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성도 아꼈을 줄 압니다.
인류 역사를 통해서 사실 악한 성이 많았지만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아껴 주시는 것은 그 가운데 그래도 의인이 다소 있는 까닭에 선의 연대성이 있는 까닭에, 죄 짓는 사람도 아낌을 받는 줄 압니다.
열와기 하 十三장을 볼 것이면 유명한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가 마지막에 병들어서 죽게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의 왕 요하스가 엘리사의 병석 머리맡에 찾아와서 꿇어앉아『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당신은 이스라엘의 병거(兵車)와 병마로소이다』이렇게 부르짖으며 통곡했습니다.
여러분 이 엘리사가 외적이 침노하여 들어올 때 말 타고 싸운 일이 없습니다. 물론 병거 타고 싸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이 이스라엘 선지자로 말미암아, 그의 덕행, 그의 감화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나라는 그이가 사는 도안 외적이 감히 침노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만큼 선한 사람, 의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十九세기 유럽 역사를 볼 때에 덴마크 나라와 같은 적은 나라는 매우 간단하고 황폐한 나라이지만 그룬드비 목사 같은 한 사람이 먼저 일어나서 복음을 전하여 농촌 개방 운동을 하며 복음녹민학교를 설치하여 그 한 사람의 공헌으로 이렇게 덴마크 나라를 구원하고 오늘까지도 모범 농업국가로서 세계에 자랑하는 나라로 만들었는가를 생각하여 볼 것이면 한 사람의 공헌이 얼마나 크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새삼스럽게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선도 역시 연대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해 볼 때에 몇 가지 깨달아야 할 바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 인간 생활은 연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악도 연대성을 가진 것이요 선도 연대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의 인간 생활은 언제든지 선한 씨를 뿌리지 아니하면 악한 씨를 뿌리게 된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여야 합니다.
지난가을에 제가 호남선을 타고 목포를 갈 때에 논산 근방을 지나려니까 아주 기분이 상쾌한 것은 그 근방 도로변에 그 때 한창인 코스모스를 많이 심어 놓았습니다. 아주 길게 뻗어 있는 코스모스를 볼 때 너무 기뻐서 옆에 같이 가던 일행에게『우리 한국 전 국토에 이렇게 꽃을 심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인생 길을 걸어 갈 때에 두 가지 씨를 뿌릴 수 있는 줄 압니다. 하나는 꽃같이 아름다운 선한 꽃씨를 뿌려서 내가 지나간 자리에 선한 아름다운 꽃을 피게 할 수도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엉겅퀴와 가시와 같은 씨를 뿌려서 내가 지나간 자리를 험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걸어오는 길이 과연 꽃씨를 뿌렸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길이 나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환경과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사회가 여러분의 국가가 좀더 아름다워지고 좀더 깨끗하여졌습니까? 혹은 그와 반대로 좀 더 더러워졌습니까? 반성하여야 할 줄 압니다.
둘째는 우리가 말하는 환난상구(患難相救)의 적극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줄 압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것은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는 것이 결국은 나를 도와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이웃에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많은 동안 나 혼자 아무리 부하다고 하지만 바로 살 수는 없는 줄 압니다. 반드시 공산당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반성하여야 될 줄 압니다.
여기 성루 거리에 깡통을 들고 다니는 아이들을 우리가 불쌍해서만 그 아이들을 고아원에 들여다 바로 길으려 함이 아닙니다. 나를 위하여 부득불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 아이들을 그냥 내버려두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이제 十년이 못되어 장성할 터인데 우리가 불쌍해서만 도와주면 절도나 강도밖에 될 수 없습니다. 마지막에는 공산당밖에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암만 집을 잘 지었다 하더라도 밤에 뚫고 들어가서 여러분의 딸 손자들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이와 같이 환난 당한 자들을 서로 도와주는 것은 동정뿐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나의 책임인 것입니다. 이웃으로서의 나의 책임인 것입니다.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나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왜? 인간생활은 서로 연대성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복음을 전하는 최종의 적극적 이유도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내 이웃 중에 하나님도 모르고 두려워하지 않는 죄인이 있다고 할 것이면 그 사람이 자기 죄로 말미암아 이 다음에 지옥에 갈 것은 그 사람의 책임이지만 적어도 이 세상에서 그 사람 때문에 큰 앙화(殃禍)를 결국은 나와 우리 자손들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 이웃에 이미 죄인 하나가 있다는 것은 이미 내 이웃에 호열자 환자 하나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호열자 환자를 그냥 두면 점점 퍼져서 내 가족까지 호열자로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인 한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구원해서 새 사람을 만드는 것은 결국 나와 내 자손을 위해서 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지 이 인간 생활의 연대성을 기억해서 사회심, 다시 말하면 공덕심, 공익 심을 배양하도록 하여야 됩니다. 사회가 문명할수록 공덕심이 일반적으로 높습니다. 미개한 사회에 갈수록 이 공덕심이 적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가 부산에 피난 갔었을 때 일입니다. 비가 오기만 하면 부산에 있는 어느 길이나 다 대단히 질어서 다니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따금 시청에서 자갈을 가져다가 펴곤 하는데 한결 다니기라 편하였습니다. 그러나 몇 주일이 못 가서 가보면 그 자갈들이 어디로 가는지 다 없어집니다. 여러분 어디로 아는지 아십니까? 대문간을 열어 보면 다 압니다. 저 안 뜰로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공익 심 이 부족합니다. 공익 심 이 없습니다.
작년 봄에 예배당 대문밖에 꽃이 없어 민망하여 꽃을 좀 심자고 하기에 꽃을 사다 심었습니다. 그런데 몇 주일이 못되어서 하나도 없이 다 없어졌습니다. 아마 저 안뜰에 심었을 것입니다.
사회를 위한 것은 결국 나를 위하는 것이요, 민족과 국가를 위하는 것은 결국 나를 위하는 것인데 이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너무나 많습니다.
전에 우리 옛말에 이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노인이 그 때 엽전이 있을 때인데 엽전에 구멍이 있으므로 잘못하면 부러지기 쉬운 것이므로 그만 만지다가 부러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땔 수밖에 없어서 땜하는 사람 더러 때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땜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좀 비용이 들것인데요 이 전만 주 십 시요』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노인은 가만히 생각하다가『그래도 때 주시오』하고 말하면서 엽전 한푼을 엽전 두 푼 주고 때 가지고 집에 왔습니다.
그러니까 아들과 딸들이 그 말을 듣고『아버지 그 무슨 일을 그렇게 했습니까? 한 푼 아끼려고 두 푼을 주다니 요』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아버지 되는 노인이 하는 말이『얘들아 그런 것이 아니다. 부러진 이 엽전을 그냥 내버려두면 한 푼은 아주 없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이것을 두 푼 주고라도 때면 비록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 있을 지라도 우리 나라야 그냥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간단한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배울 진리가 많은 줄 압니다. 즉 우리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가진 것을 기억해서 적은 것만 보지 말고 앞에만 보지 말고 큰 민족 전체 국가 전체를 보고 올바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나와 내 자손을 위해서 올바른 길을 택하였습니까? 여러분의 지나온 길을 확실히 꽃씨가 심어져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이 자리에 있다고 할 것이면 바로 이 은혜 받는 이 시간에 반성하여야 될 줄 압니다.
여러분 나만 위하지 말고 좀더 큰 민족 국가 전체를 위할 것이고 내 교회만 보지 말고 한국의 온 교회 전체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사회의 공덕심 공익 심을 어떻게 하여서 든 지 배양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관청에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 회사에 책임지고 있는 사람, 학교에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 이러한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사회의 공복(公僕)입니다. 공통한 종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신명기 三十장 十九절 말씀을 읽고 그만 두렵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내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여러분 생명과 사망 어느 길을 택하렵니까? 내 민족과 나라를 위해 사망을 택하겠습니까? 내 자손의 축복을 위해 생명을 택하세요. 그리고 우리가 지나간 자리가 아름다운 꽃을 피게 하도록 결심하여 인간 생활의 연대성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一九五六년 一월 二十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