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값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눅19:8-9)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에 여리고 성을 지나가시다가 길에서 특별히 두 가지 일 행하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눈먼 소경 바디메오가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다가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간절히 청해서 그 병을 고쳐 눈이 보게 된 일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여리고의 세리 장으로 있는 삭개오의 이야기입니다. 삭개오는 여기 기록한 대로 세리장이요 부자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세리가 일반 국민에게 천대를 받던 것은 로마인 아래에서 관리가 되어 유대인의 돈을 착취하여 외국 정권에 바치는 까닭에 그 때에 세리의 직분을 맡은 사람은 일반적으로 민족적으로 볼 때 반역자로 인정받고 또 종교적으로 볼 때에도 배교자(背敎者)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흔히 세리와 죄인이라고 신약에 나타나는데 세리는 거의 창녀와 같은 천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또 이 사람은 세리 가운데도 세리 장이요 부자라고 하니까, 그런 자리에서 돈을 모은 만큼 그 가운데 불의 한 재물이 많을 것은 누구나 다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책을 보니까 그 때에 여리고에서 제일 큰 도적놈은 세리(稅吏)장 삭개오 일 것이라고 기록한 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은 삭개오라고 했는데 그 뜻은 깨끗하다고 하는 뜻과 새롭다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이름은 좋습니다. 아마 스탈린도 이름은 요셉이란 이름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나신다는 소문을 듣고 이 삭개오가 예수를 꼭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 첫째 이유는 호기심이었을 것입니다. 유명한 갈릴리의 선지자가 지나가는데 많은 사람이 따라간다고 하는 그런 소문을 듣고 그 어떤 사람인가 하고 호기심 가운데 보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된 일을 보고 우리가 짐작하여 보건대 그 호기심 이외에 삭개오 자신도 모르는, 말하자면 그 잠재의식 가운데 자기는 그런 천한 직업을 가지고 그런 일을 하고 있지만 마음속 깊은 자리에 그 사람도 옳고 깨끗한 생활을 동경하는 마음이 속 깊은 곳에 있었던 같습니다. 양심의 불이 아주 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여간 이 삭개오가 예수를 보기 위해 거리에 나와 보니까 두 가지 장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볼 수 없고 하나는 자기 키가 너무 잘아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하다 못해서 높은 나무에 올라가 앉으면 그 가운데로 지나가는 예수를 잘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서 예수님이 지나갈 길에 먼저 가서 예수님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의 일이란 하루의 생활을 돌아다 볼 때에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삭개오가 그날 아침에 나와서 나무 위에 올라가 앉을 때는 그날 저녁에 자기에게 무슨 변화가 생기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나무 위에 올라가 앉아 있는 동안에 뜻밖에 그야말로 천만 뜻밖에 자기 일생에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일생의 혁명적인 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거기 올라앉아 있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얼굴을 들어 나무 위의 삭개오를 쳐다보았다고 합니다. 그것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님께서 직접 자기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삭개오야 일어나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저녁 너희 집에 유하겠다. 그 말을 들을 때 삭개오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이 다 놀랐습니다. 삭개오는 너무 기뻐서 허둥지둥 내려와서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갔고 무리들은 수군거리면서 예수 님이 죄인의 집에 머문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 성경이 삭개오의 집에서 된 일을 자세히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잘 대접도 하고 여러 가지 말로 삭개오가 죄를 자백한 줄 압니다. 그 모든 한 말을 성경에 단단한 이런 말로 기록했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대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이것이 삭개오가 그 날 저녁에 한 고백의 결론인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오늘 저녁 이 집에 큰 구원이 이르렀구나 이 사람도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했습니다. 이렇게 간단한 기사로 마치었습니다.
여기에 오늘 아침 축복할 말씀은 삭개오의 고백인 것입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討索)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이것이 참 회개입니다. 회개에는 열매가 있습니다. 참 회개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여러분 회개는 물론 제일 먼저 죄를 깨닫는 것이 첫 걸음인 줄 압니다. 그러나 단순히 죄를 깨닫는 것만이 회개는 아닙니다. 몰론 죄를 깨닫는 것도 어려운 일인 줄 압니다. 모든 사람이 다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자기 허물을 모릅니다. 다윗같이 좋은 사람일지라도 마음이 곧은 사람일지라도 자기가 그런 음란한 죄는 짖고 자기의 충성된 부하 우리아를 억울하게 그렇게 원수에게 죽게 하고 그리고 그 우리아의 아내를 취해다 궁전에 갔다 두고도 얼마 동안 다윗의 양심이 얼마나 둔해졌던지 양심의 괴로움이 없었습니다. 평안히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단이라는 선지자를 보내서 비유를 들어 책망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사람이 부자인데 자기 집에는 소와 양이 많고 그 이웃의 가난한 사람에게는 어린 암 양 새끼를 딸처럼 여기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자 집에 손님이 왔는데 자기 집에 양과 소는 두어 두고 이 가난한 집의 어린 암 양을 빼앗아 잡아서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 때에 다윗이 노하여서 하는 말이 그런 놈이 이 나라에 있다면 곧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 나단은 왕이여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올시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다윗은 깨달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깨닫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해서 예수님이 산상보훈에 말씀하시기를 어찌해서 네 눈의 들보는 보니 못하고 형제의 눈에 티를 뽑으라 하느냐. 먼저 네 눈의 들보를 뽑으라. 그리고 나서 형제의 눈의 티를 뽑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허물을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회개하려면 우리의 허물을 깨달아야만 됩니다. 무서운 죄를 많이 짓고도 이 죄를 깨닫지 못하고 무심하게 앉아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첫째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깨닫는 것만으로 완전한 회개는 아닙니다. 깨달으면 후회합니다. 그저 이 다음에는 그런 죄 안 짓겠다고 후회 많이 합니다. 유다 가 예수를 은 삼십에 팔아먹은 다음에 많이 후회하였습니다. 얼마나 후회하였는지 은 삼십 냥 다시 가지고 선전에 가서 돈을 돌려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안 받으므로 은을 삼십 냥 그 성전 뜰에 내버리고 왔습니다. 얼마나 후회하였습니까. 너무 후회한 끝에 목매어 자살했습니다. 그러나 후회만이 회개가 아닙니다. 만일 유가다 그 돈을 내버리고 난 다음 낙심하지 않고 다시 예수님 앞에 돌아와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죄 사함을 구하였던들 유다도 죄 사람을 얻었을 것입니다. 후회만 하고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죄를 깨달았을 때 죄에 대해서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그 공포심만으로는 회개는 아닙니다. 상고사 가운데 민족들이 유럽을 점령해서 사방으로 흩어질 때 우스트로 고드라고 하는 족속이 이태리 평원을 점령하고 오스트로 왕국을 건설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왕 가운데 데로도링이라는 유명한 왕이 있었습니다. 삼십여 년 동안 그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또 여러 가지로 보아 좋은 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년에 혈기를 못 이겨서 무죄한 친구 두 사람을 억울하게 죽였습니다. 한 사람은 보에디오스 또 한 사람은 디메커스라고 하는 사람인데 비참하게 목 달아 죽였습니다. 그 다음 왕 자기가 실수한 것을 알고 항상 후회하였습니다. 양심에 가책을 받아서는 후회했습니다. 어떤 날 저녁에 특별히 좋은 요리를 만들어 왔는데 그날 저녁 특히 요리인이 생선으로 좋은 요리를 만들어 왔습니다. 왕이 생선을 볼 때 생선의 빨간 눈알을 들여다보니 거기에서 자기가 죽인 사람의 눈알이 보였습니다. 생선의 아가리에 날카로운 이빨을 볼 때 마치 자기가 죽인 그 두 사람이 자기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이를 악물고 뛰어 나오는 것 같아서 무서웠습니다. 이 데로도링 왕이 너무 무서워서 나는 불편해서 저녁은 먹지 못하겠다고 하고 자기 침상에 돌아가서 누웠습니다. 얼마나 무섭든지 그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삼일 후에 죽었습니다. 죄라는 것은 무섭습니다. 우리 인생이 다 죄를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죄를 단순히 무서워한다고 이것이 참 회개는 아닙니다.
그러면 참 회개는 무엇입니까? 이사야 55장 7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했습니다. 회개하는 것은 죄를 깨달아 알고 후회하고 무서워할뿐더러 죄가 이렇게 무서우므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마음을 돌이키고 도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회개입니다. 죄가 무서운 줄을 깨달아서 그 자리에 그냥 앉아 있지 않고 일어나서 마음을 돌이켜서 주께로 나오는 것입니다.
가령 여기 어떤 청년이 오는 주일날 공일인데 청량리 요리 집에 가서 놀기나 하겠다고 나간다고 합시다. 나가는데 사방에서 종소리가 울립니다. 아 이것 주일날인데 이렇게 다 예수께 나와 예배하라고 종소리가 나는데 내가 이렇게 딴 방향으로 가서 되나 하여 그 마음이 돌아섰습니다. 그 때에 그 청년 마음이 돌아섰다면 그 청년의 몸까지 돌아설 것입니다. 몸까지 온전히 돌이켜서 자기가 가던 방향에서 돌아서서 반대 방향으로 오게 될 때 그것이 온전히 회개입니다. 요새 말로 말하면 180도 전환하는 것입니다. 마음만 이렇게 180도로 돌아선다고 하면 몸도 돌아서야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회개에는 열매가 있고 이 회개에는 행동 곧 실행이 따르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토색한 것을 회개하고 자기가 과거에 가난한 사람에게서 불의 하게 재물을 취한 것을 회개한 다음에는 사 배나 갚아 주기로 결심하고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우선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의 재산을 손해 나게 하였다고 하면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이면 자기가 가능하기만 하면 남의 재산 손해 난 것도 갚아 줄 것입니다. 삭개오와 같이 갚아 주는 것 없이 마음만 돌이켜서 회개하였다고 하는 것은 참 회개가 아닙니다. 미국의 유명한 무디 목사의 전기 가운데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 목사가 어떤 곳에 가서 부흥회 할 때 어느 저녁 어떤 청년이 와서 말하기를 자기가 시내 어떤 상점에서 점원으로 있는데 불행히도 한달 전에 돈을 1500불 훔쳐서 다 쓰고 지금 950불밖에 없는데 이번 이 부흥회에 참석하면서 생각해 보니 내가 큰 죄를 지었으므로 또 내가 꼭 이 돈을 갚아 주어야 되겠는데 남은 것이 950불밖에 없고 채울 돈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제가 그래서 생각하기를 남은 것 950불은 꼭 쓰지 않고 이것 가지고 장사를 잘해서 1500불이 된 다음에 꼭 갖다 갚으면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무디 선생이 가만히 생각하다가 하는 말이 내 생각 같아서는 그 도적질한 돈을 가지고 장사한대야 장사가 잘 될 것 같지 않으니 그 남은 것 가지고 가서 갚아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 하는 말이 이것 가지고야 어떻게 부끄러워서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나하고 같이 가서 사정을 다 말하고 갚아 주자는 것입니다. 그 청년을 데리고 가서 그 사정을 다 말하고 나머지 돈을 갚아 주었습니다. 그 주인은 놀라서 눈이 둥글 해 지면서 입을 다물지를 못합니다. 그 주인은 두 번 놀랐다고 합니다.
첫째는 그 청년을 그런 청년인 줄 몰랐는데 훔쳤다고 하는 사실에 놀라고, 둘째는 이 청년 회개하고 가져온 것에 놀랐습니다. 그리면서 이 주인 하는 말이 이 청년 이렇게 회개하고 돌아왔으니 이전보다 이제는 더 신용할 수 있고 또 모든 죄 다 용서하고 이것도 감사히 받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미국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 일생에서도 이런 일을 가지고 와서 의논하고 갚아 준 일이 여러 번 있습니다.
정신적인 면, 도덕적인 면에 있어서 내 죄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친 것 있으면 명예적으로나 어떤 면으로든지 갚아 주려고 힘쓰는 명이 없으면 참된 회개는 아닙니다. 여기 삭개오가 절반은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다고 하는 것도 이유가 있는 줄 압니다. 가난한 사람이 반드시 불쌍해서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사실 내 죄를 회개하고 청산하려고 할 것이면 온전히 청산하려고 하여도 할 수 없습니다. 가령 10년 전에 어떤 청년이 죄를 지어 남의 재산을 훔쳤는데 그것을 갖다 주려고 해도 어디 있는지 몰라서 갖다 주지 못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는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 삭개오도 아야 절반을 갈라서 갚아 주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적 보상입니다.
바로20년 전인가 봅니다. 신문을 보니까 방탕하게 살던 청년이 예수를 믿고 회개한 후에 그가 방탕한 생활을 해서 많은 죄악을 쌓았는데 어떻게 하면 이 사회에 갚을 수 있을까 해서 특별히 걸인을 구제하는 사업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일종의 사회적 보상입니다. 사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 죄의 영향 결과는 나만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도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우리가 죄 지은 것 다 갚을래 야 갚을 길 없습니다. 여러분 톨스토이의 부활이란 책을 읽은 이 있을 줄 압니다. 거기 어떤 귀족 청년이 자기 숙모네 집에 있는 가련한 여자 카츄샤라는 여자를 유인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가련한 여자는 그 귀족 청년에게 정조를 유린당하고 그 집에서 쫓겨나고 마지막에는 점점 떨어져서 창녀가 되고 나중에는 살인과 강도 혐의로써 어떤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이 무심하게 재판정에 배심원이 되어서 들어가 보니까 어떤 여자가 재판을 받는데 가만히 보니까 몇 10년 전에 자기가 정조를 유린했던 가츄샤라는 여자입니다. 이 청년 가만히 생각하니 자기의 일시적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 여자의 일생을 그르쳤습니다. 이 청년은 무엇을 해서든지 갚으려고 애써 보고 그 가운데서 좋은 사람 만들어 보려고 애쓰면서 시베리아까지 따라갔었으나 헛되게 돌아옵니다. 그런고로 죄는 무섭습니다.
특별히 청년 시대에 죄를 삼가야 할 것은 청년 시대에 죄는 잘못 지으면 나만 망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일생을 망치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청년이 그 후에 회개해서 그 영혼의 구원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 죄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끼친 죄의 결과는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데 까지는 갚아 주어야 합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교사 앨버트 슈바이처라는 독일의 유명한 선교사, 그는 철학박사, 신학박사, 음악 박사, 의학박사인 그는 아프리카 밀림 지대에 가서 흑인들의 상처를 싸매 주고 수술을 해주고 흑인과 같이 살면서 그 일생을 그 부인과 같이 살면서 그 흑인들에게 선교하고 도와주었습니다. 슈바이처가 독일 안에서 유명한 대학 교수 자리를 다 내놓고 아프리카로 간 동기 가운데 중요한 동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 번은 어떤 공원을 지나갈 때에 구기 흑인의 동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흑인의 동상을 볼 때 과거 100년간 백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지은 죄악이 생각났습니다. 그 사람들 무지하다고 잡아다가 종으로 팔았습니다. 가서는 학대했습니다. 짐승처럼 대우했습니다. 착취해서는 돈 모아다 자기네 나라에서 잘 살았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과거 백년 동안 백인들이 아프리카에 가서 흑인에게 지은 죄를 만분지일이라도 보상해 볼 수 없을까? 그 죄악을 갚기 위해서 슈바이처가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이것도 사회적 보상입니다.
참 회개에는 열매가 있고 실행이 따릅니다. 어떤 목사님 이런 말씀했습니다. 어떤 작은 교회에 가서 부흥회를 하는데 도무지 은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날 아침 장로 한 분이 일어나서 하는 말씀이 이번 부흥회에 은혜가 없는 것은 모두 다 제 죄인 줄 압니다. 제가 이 교회 장로라고 하면서도 지금까지 어떤 직분하고 한 교회 있으면서 담을 막고 서로 외면하고 지냈습니다. 제가 이제 이 죄를 자복 합니다. 하면서 그 사람에게 가서 자기 잘못을 자복하고 화목하였습니다. 그 후부터 그 교회에 큰 은혜가 있었다고 합니다. 참 회개는 열매가 있습니다.
금년 새해를 당해서 우리가 다 새로운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새로운 축복을 받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가정으로나 교회로나 새로운 축복을 받아야 이 민족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국가가 새 축복을 받아야겠습니다. 그러나 그저 새해라고 모든 것이 그저 새로워지는 것 아닙니다. 새해라고 그저 새 복이 임하는 것 아닙니다. 시편 66편 18절에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 하시리라.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우리가 아무리 은혜를 달라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누가 마음속에 죄악을 품었는지 사람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이사야 59장 1-2절에『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이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저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우리를 구원 못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귀가 가리워서 우리의 부르짖음을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민족 사이를 막았습니다. 또 반면에 역대기 하 7장 14절에『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했습니다. 그 땅을 고칠지라. 내 이름으로 일컬어는 내 백성을 믿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믿는다고 하는 너희들, 내 백성이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치겠다고 한 말씀은 나라에 축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요엘 2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仁愛)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 하시나니』했습니다. 우리가 옷을 찢지 말고 참으로 마음을 찢자 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면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애가 크셔서 뜻을 돌이켜서 내리려고 하시던 재앙도 내리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개인이나 가정, 교회, 우리 전 민족이 새 해에 축복 받는 길은 오직 하나인데 회개의 좁은 길입니다. 참 회개는 후회만이 아닙니다. 아는 것, 죄를 무서워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죄의 자리에서 떠나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같이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죄를 보십니다. 거기 죄가 있습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래야 줄 수 없습니다. 이 새 해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이 일년 동안을 걸어가야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실 것입니다. (1956년 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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