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을 구원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오늘 읽은 말씀은 우리가 다 어렸을 적부터 기억하는 말씀이올시다. 간단한 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기독교의 중심 되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 가운데 하나님이란 말, 사랑이란 말, 독생자를 보내셨단 말, 믿음, 또 영생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 구절을 4부분으로 다음과 같이 구별하고 이름지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부분을 하나님의 사랑의 호수라 이름 지었습니다. 여러분 백두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천지라는 큰 호수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호수 다음에 나오는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는 이 구절은 이 호수에서 흘려 내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의 강이요,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하는 이 부분은 사랑의 물을 떠서 마실 수 있는 그릇입니다. 아무리 좋은 물이 흐른다고 하여도 그릇이 있어서 그 물을 마셔야 우리의 기갈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 그릇은 믿음입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네 부분은 사랑의 결과입니다. 큰사랑의 호수에서 내러와서 흘러내리는 사랑의 강물을 사랑의 그릇인 믿음으로써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으리라 이렇게 해석한 학자도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같이 크리스마스 계절이 시작되는 이 주일에 이 하나님의 사랑의 호수가 얼마나 넓고 얼마나 깊고 얼마나 큰지 잠깐동안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생각할 때 먼저 기억해야 될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떤 방면에 대해서든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란 제한되어 있고 하나님은 그 본성에 있어서나 그 속성에 있어서나 모든 것이 무한하고 무궁하신 까닭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지식을 온전히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다고 하는 그 말씀으로 우리가 표시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다 상상해 알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무소불능(無所不能)하다고 혹은 전능하다고 하는 말로 우리가 표현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본성은 곧 사랑이신 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전적으로 이해하기는 제한 있는 인간으로써 불가능합니다. 단순히 우리는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바에 의지해서 그 사랑의 일단을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하신 대로 이 구절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대로 또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 각 사람 마음속에 지혜와 총명의 은혜를 주시는 대로 우리가 생각할 수밖에 없는 줄 압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했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이 세상은 어떠한 세상입니까? 그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사랑의 깊음과 넓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세상이란 말은 물론 세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혹은 그렇게 번역하면 하나님이 세계를 사랑하사라는 것이 되므로 하나님께서 해를 사랑하시고 달을 사랑하시고, 하나님께서 산천 초목을 사랑하시고 금수와 동물을 사랑하시고 라는 말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만물을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세상이란 그런 뜻이 아닌 줄 압니다. 여기 세상이란 세상 사람들을 가리키는 줄 압니다. 왜냐하면『누구든지 저를 믿으면』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세상 사람을 가리킨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사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사회, 즉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어떠한 세상입니까. 예레미야 17장 9절을 읽으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오 마는 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다고 이와 같이 기록했습니다. 로마서 1장 21-23절, 28-31절을 읽을 때 여기에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기록했는가 보세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며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으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며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사기 살인 분쟁 시기 악동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背約)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3장 10-18절을 읽으면『기록한 바 의인은 없으나 한 사람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惡毒)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平康)의 길을 알지 못하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사회요 세상 사람들의 특색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을 배반하여, 잔인하며, 포악하며, 무고하며, 악독하며, 음란하여 더러우며, 하나님을 부인하며,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이런 세상인데 하나님께서 이런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이와 같이 악독한 죄악에 빠진 세상 사람들을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십니다.
제가 바로 어제 판문점에 가서 휴전 감시 위원과 회견하면서 그 소위 군사 분계선 위에 서서 유엔(U. N)군 경비실과 인민군 경비원을 만나보면서 제 마음가운데 하나님이여 언제 이 선이 없어지겠습니까? 이렇게 기도하면서 또 한편 구석 마음가운데 올라오는 생각은 하나님께서 본래 이 작은 삼천리 강산을 우리 삼천만 민족에게 주셨는데 무엇이 이 삼천리강산 절반을 나눠 놓았느냐? 무엇이 이 땅을 나눠 놓았느냐?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정치적으로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지만 한가지로 말하면 인간 죄악이올시다. 인간의 이기심, 인간의 야심, 인간의 부덕, 인간의 이기심이 이 땅을 나눠 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도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랑하십니다.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 성경 구절을 해석해 내러가다가 인간의 모든 죄악을 생각하면서 이런 말로 부르짖었습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고 하면 이 땅 위의 세상은 벌써 산산이 때려 부순지 오래였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이런 반역자, 대역자, 원수까지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의 호수의 넓이가 얼마입니까?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가 얼마나 깊습니까? 좁은 우리 인간으로서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기를 얼마나 하셨는지 그 사랑을 형언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의 사랑을 간단하게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간단한 말 가운데 얼마나 깊은 뜻이 있는지 모릅니다. 선물을 주셨는데 독생자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종종 선물은 사랑의 척도가 됩니다. 그래서 신랑이 신부에게 사랑의 표로써 금가락지를 주는 수가 있습니다. 신부가 신랑에게 금시계든지 혹은 만년필 같은 것을 주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봉사와 희생의 선물일수록 사랑의 척도가 됩니다. 요한 복음 12장에 나타나는 베다니 마리아가 값진 향유가 든 옥합(玉盒)을 깨뜨려서 그 값진 기름을 예수 님 머리와 발에 붓고 그 머리털을 풀어서 그 발을 씻었다고 합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드린 향유 가운데 또 그 머리털을 풀어 발을 씻는 일 가운데서 우리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사랑을 헤아릴 수가 있습니다. 선물은 사랑을 헤아리는 한 방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인생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는데 이 독생자의 선물을 우리가 좀 생각해 보면 그 선물을 통해서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을 좀 이해할 줄 압니다. 어버이들이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구약에서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를 기억하면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다윗은 아들이 많은데 그 중 하나가 압살롬입니다. 인물은 잘났지만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검은 마음을 품고 자기 아버지를 배반하지 않았습니까? 군사를 끌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와서 다윗이 빨리 도망하지 않았다면 죽을 뻔했습니다. 궁중에 들어와서는 심지어 자기 아버지의 처첩을 능욕까지 한 그런 놈입니다. 하늘 아래 그런 아들은 용납하지 못할 아들입니다. 이런 아들과 싸우다가 압살롬이 그 상투가 나무에 걸려 매어 달려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이 찔렸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이 내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아 내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죽었더면 좋을 것을 네가 먼저 죽었구나 하고 대성통곡하였습니다.
이것이 어버이의 마음,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들은 그렇게 불량해도 그 아버지는 그를 사랑하고 아낍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생각해 보세요. 예수는 오직 하나의 아들이 아닙니까? 그는 독생자였습니다. 어떤 아들이라고 했는가 하면 복음서 중에 세례 받을 때, 변화산상에서 또는 다른 때 여러 번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이렇게 들렸습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이요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고 기뻐하는 그 아들입니다. 그 아들을 자기를 배역하고 원수가 된 다른 사람들,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선물로써 사랑을 헤아릴 수 있는데 그리스도의 선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 헤아려 보면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우리가 다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옛 말이 있습니다. 전에 어떤 집에서 아들 네 형제를 아주 곱게 기르는데 그 가정이 사업에 실패하여 대단히 빈곤해서 어떤 겨울에 도무지 생활해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옛날 사회에서는 아주 가난하면 아들과 딸을 종으로 팔아서 사는 그런 풍속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며칠을 굶고 가족이 모여 앉아서 그들 네 아들 가운데 하나를 팔아 생활해 볼 생각이 났습니다. 그럼 어떤 아들을 팔까 하고 생각하기를 먼저 다 길러 놓은 맏아들을 팔까 하였으나 옛날 맏아들은 제사하는 아들인데 어떻게 장손이야 팔 수 있나 하여 팔 수 없었습니다.
그럼 둘째 아들놈은 어떠한가 하니 어머니가 하는 말이 당신도 아시다시피 그 아들은 참 아버지 당신을 닮지 않았습니까? 만일 이 다음에 당신이 세상을 먼저 떠나면 내가 그 아들을 보면서 당신 생각을 하고 여생을 마칠 터인데 그 아들은 팔 수 없습니다 하고 반대하며 어머니가 그럼 셋째 아들이 어떠할까 고 말합니다. 그 아버지가 하는 말이 그것은 안 되지 셋째 놈은 꼭 당신을 닮았는데 이 세상일을 알 수 있습니까? 당신이 먼저 세상을 떠나도 내가 저 아들을 보고 세상을 살터인데 그 아들을 팔 수 없소 합니다. 그러면 아들 하나 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러면 그 놈을 팔까요 그러나 그 아들은 막둥인데 막둥이야말로 제일 사랑을 쏟는 아들인데 막둥이를 참아 팔 수 있는가 하고 팔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굶어 죽으면 굶어 죽읍시다. 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간접으로 들으니 우리 교회에 어떤 자매 가운데 8, 9 남매의 아들과 딸이 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나도 없앨 놈이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잘 미루어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아들 하나밖에 없는데 가장 사랑하고 기뻐하는 그 아들을 자기 원수 되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그 사랑의 호수의 넓이는 우리 좁은 인간의 마음으로는 다 생각할 수 없습니다.
셋째는 이와 같은 독생자를 어떤 모양으로 주셨으며 이와 같은 독생자를 어떤 처지에까지 빠지게 하면서 주셨는가? 그리고 어떤 모양의 선물로 주셨는가를 우리가 생각해 보십시다.
이 아들을 선물로 주실 때 모든 영광 다 내놓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늘 나라의 그 권세 존귀 영광을 내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이 아들을 죄악 많은 인간 세상에 내려보내실 때에 어느 곳에 먼저 내려 보내셨습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 가운데 제일 가난한, 집도 아닌 소와 나귀가 사는 마구 깐에, 그 귀한 몸이 제일 천한 구유에 첫 자리를 잡게 하셨습니다. 온 우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있을 곳이 없어 마구깐 한 구석 구유에 첫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만해도 하나님께서 그 선물을 주실 때에 이렇게까지 낮추신 것을 우리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는 다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단 한 살도 못되어서 약대를 타고 저 애굽으로 피난 갈 수박에 없었던 것도 압니다. 아기 때부터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멀리 애굽으로 피난 갔다가 나사렛에 돌아와서 가난한 목수 집에서 아버지를 돕고 어머니를 위해 아침과 저녁으로 물을 길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지요. 베들레헴에는 온 동네에 우물이 한 곳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우리 나라 제주도 비슷한 모양입니다. 제주도에는 한 곳 혹은 두 곳밖에 우물이 없습니다. 그 곳에 가서 아침저녁으로 물을 길은 줄 압니다. 목수 일을 돕기 위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무를 켜고 톱질을 하고 대패질하면서 자라났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사명을 하실 때가 외어서 나와서 봉사와 전도를 하실 때에는 예수 님이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여우도 굴이 있고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는 방랑의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외식과 중상과 모략의 바리새 교인들, 세상을 사랑하는 사두개 교인들 당시에 무책임한 로마의 법관, 알지 못하는 무지한 민중에게 갖은 천대를 받고 갖은 욕을 보고, 채찍을 맡고 뺨을 맞으며 침 뱉음을 받으며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넘어지면서 골고다 길을 향해 가시었습니다. 마지막에는 가장 흉악한 죄인 혹은 죄 지은 종을 죽이는 십자가 형틀에서 고생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육체의 고생뿐입니다. 만민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등에 온전히 놓이게 된 때 하나님께서 그를 온전히 떠나게 된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말씀은 곧 그 뜻인 줄 압니다.
온전히 하나님께서 버리시기까지 온전히 죄 덩어리를 보고 버리시기까지 육체의 고통 심령의 고통의 극단에까지 그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자기를 반역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세상들, 원수들을 구원하고 죄를 사해 주시고 돌이키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의 고통까지 당하게 하나님께서 이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은 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넓이는 다 깨달을 수 없는 줄 압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결심으로 칼을 가지고 그 아들을 잡으려는 순간에 제사 드릴 양이 저기 있으니 저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라 해서 아들을 채 죽이지는 않았지만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 그것을 보고서 아브라함에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한 것인가를 압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외아들을 끝까지, 사실상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도록 우리는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외아들보다도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을, 원수가 되는 사람들을 더 사랑해서 자기 외아들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일을 우리는 잘 깨달아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십자가 대할 때 그 일이 고마워 눈물로 다 갚을 수 없어서 이 몸 바칩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무엇으로 다 표현할 수가 없는 줄 압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확실히 증명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이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때입니다. 우리가 이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맞으려 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좀더 깨달을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사상을 보답할 수 있습니까? 간단히 말하면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 줄 압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 목적이 어디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는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옴으로써 하나님의 이 사랑에 보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권면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권면 합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온전히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아니한 사람이 이 가운데 계시면 이 크리스마스 계절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돌아오는 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묵시록22장 17절에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값없이 이 사랑의 생명수를 마시는 기쁜 명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는『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함이 마땅하도다』이렇게 성경에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세상 사람들을 이와 같이 사랑하셨으니 우리 세상 사람들도 좀 이 사랑을 본받아서 피차에 사랑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좀 더 피차에 용서할 줄을 알고 좀더 너그럽게 생각해 줍시다. 좀더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모든 막힌 담을 헐어버리는 이 시기가 되기 바랍니다. 믿는 사람들끼리 우선 더 사랑합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사랑할 수 있는 이 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시기에 좀더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으면 도와줍시다. 이 시기에 가난하고 헐벗고 명절이 되어도 명절같이 지내지 못하는 그런 교우, 친척, 그런 고아, 그런 홀로 사는 자매들을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셋째는 이 크신 사랑을 우리만 알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전파하여야 되겠습니다. 복음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 쓸쓸하고 냉랭(冷冷)한 세상에 전파하는 사랑이요 복음의 진수올시다, 하나님께서 이런 세상을 이와 같이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주셨다고 하는 기쁜 뉴스가 곧 복음이올시다. 이 기쁜 뉴스를 크리스마스를 당해서 좀 더 전파하십시다. 우리가 무엇으로써 크리스마스를 맞아야 할까요.
첫째는 내가 먼저 회개하고 온전히 하나님께 돌아옴으로써 이 크신 사랑을 보답합시다.
둘째는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이 크신 사랑을 보답합시다.
셋째는 우리가 이 크신 사랑을 전파함으로써 이 크신 사랑을 보답할 수 있는 줄 압니다.
(1955년 12월 18일)
'좋은 말씀 > 한경직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회개와 보상 (누가복음 19장 1-10) (0) | 2017.03.22 |
---|---|
크리스마스의 별 (마태복은 2장 1-12절) (0) | 2017.03.20 |
십년의 은총 -- 영락교회 창립 10주년 기념 예배 -- (0) | 2017.03.09 |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 (누가복음 12장 35-45절) (0) | 2017.03.07 |
범사에 감사하라 (데살로니가 전서 5:16-18) (0) | 2017.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