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 책이라.』(계20:12)
오늘 아침 최후의 심판에 대하여 잠깐 생각하겠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이와 같이 기록되었습니다.『사람이 한 번 죽고 그 후에 심판 받는 것은 정하신 것이니라』인간의 생활이란 확실성 있는 것이 많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이와 같이 이 자리에 모여 앉았지만 내일 무슨 일을 당할지 우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명년에 될 일을 우리가 확실히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인간의 생활이란 불확실한 것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 두 가지는 있습니다. 첫째는 죽는다는 사실, 둘째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조만간 차이는 있지만 다 죽을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확실치 않는 것이 없습니다. 또한 죽은 후에 심판이 있을 것이 확실합니다. 거기에 불분명한 점이 조금도 없습니다. 이 최후 심판에 대해서는 온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우리 주님께서 분명히 여러 가지 교훈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 사도들이 분명한 글로써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낼 때가 있겠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면양과 산양을 갈라 세울 때가 있겠다고 분명하게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7장 3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아덴에 가서 전도할 때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심판할 날짜를 정하여 두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0절에는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 선악간에 그 행한 대로 갚음을 받으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로마서 2장 16절을 보면 우리의 은밀한 죄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러나고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 날이 있겠다고 가르쳐 줍니다. 내 양심이 이후에 반드시 내가 행한 모든 일에 대하여 선악간에 보응(報應)을 받으리라 하는 그런 느낌을 우리에게 지적해 줍니다. 그런 까닭에 사후의 심판은 단순히 기독교에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계시 종교가 아닌 이른바 자연 종교, 세계의 다른 종교에서도 이것을 흔히 가르칩니다. 사후 심판에 대한 사상은 옛날 유대 사람에게만 가르친 것이 아니고, 동양 사람이나 서양 사람이나 애굽 사람이나 헬라 사람이나 중국 사람이나 우리 한국 사람에게도, 비록 희미하기는 하지마는, 그 심판에 대한 사상이 다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기 훨씬 전에 살던 헬라의 철학가 플라톤이 기록한「오라터글드」라는 책 가운데, 헬라에 어떤 군인이 전쟁에 나가서 중상을 당하여 다 죽은 줄 알고 그 시체를 불사르기 위하여 나무를 모아놓고 그 시체를 그 위에 놓고 막 불사르려고 할 때 죽은 줄 알았던 그 군인이 다시 소생하여 깨어났다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이가 깨어나서 자기가 죽은 줄 알았던 그 때의 모든 경험을 말한 것이 거기에 기록되었습니다. 그이가 죽어서 어떤 곳에 가니까 두 길이 갈라지더랍니다. 그 길 가운데는 심판하는 이가 있어 일생에 모든 행한 일을 따라서 심판을 해서 옳은 생활을 한 사람은 오른편 길인 하늘 나라로 가는 길로 보내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왼편 길로 보내게 되었는데 왼편으로 가를 사람마다 높이 플래카드에다가 그가 지은 죄를 크게 쓴 것을 들어서 다른 사람이 다 볼 수 있게 했답니다. 나는 이런 죄를 지어서 지옥으로 갑니다 하는 이런 것을 들고서 가는 그 모양을 보았노라 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후에 대한 심판 사상은 동서를 물론하고, 어떤 민족을 물론하고 그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양심이 그것을 우리에게 지적하여 주는 까닭입니다.
또한 사후의 심판은 인간의 이성이 지적하여 줍니다. 이치로 생각해 보아도 꼭 그래야 될 것입니다. 그 까닭은 우주는 도덕적 우주인데 하나님의 공의가 인간 생활에 있어서, 현세에 있어서만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일상 생활에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현세에도 있을 때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으면 그 죄 때문에 육신의 고통을 받을 수도 있고 어떤 재난을 입을 수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양심의 고통을 심히 받아서 말하자면 지옥의 형별을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아네 죄 지은 사람이 받는 것이 또한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죄 지은 사람의 자손을 삼사 대까지 형벌 하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옳은 사람의 자손은 수천 대까지 복을 빌어 주시겠다는 그런 말씀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죄를 따라서 어떤 민족을 벌하고 아무리 강한 국가일지라도 도덕이 부패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떠날 때에 큰 심판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현세에서는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올시다. 그 까닭은 어떤 사람을 완전히 심판하려고 하면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는 생명이 끊어질 때까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의 전 기간이 끝나야 그 사람의 생활을 온전히 심판할 수 있는데, 단순히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그 사람의 전 기간을 심판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또 한 가지는 사람이란 것은 단순히 육신만이 사람이 아니고 그 영혼이 사람인데 육신은 죽고 그 영혼이 살아 있으니까 육신 생활만 가지고는 완전히 그 사람의 생활을 심판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하나님이란 사실을 알리리만큼 자주 심판하시고, 또 최후의 심판이 있을 터이니까 이 현세에서는 사사건건 다 하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생이 깨달을 수 있으리만큼 만 이 세상에서는 심판하십니다. 그런 까닭으로 죽은 후에 심판이 있으리라는 것을 우리 이성으로써 생각하여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또는 우리 인간 세상에 있어서는 우리 인간으로서는 완전한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려야 할 수 없습니다. 가령 우리 인간의 국가에서도 법정에서 죄인을 공의로 공판하려는 것이 국가의 이상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법률로는 벌하지 못할 죄를 사람이 많이 짓고 있습니다. 모든 영적 죄는 인간의 법률로는 벌할 수 없습니다. 교만한 죄, 시기한 죄, 이것이 온전히 행동으로만 나타날 때에만 어느 정도 제재할 수 있지만, 인간 법률로서는 이런 죄들을 공판하려야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죄가 있는 것도 사람은 분명히 알 수가 없으므로 죄를 많이 지어서 벌을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람을 벌하지 못하는 때가 많습니다. 마땅히 잡아서 사형할 사람인데 그 사형 죄수를 붙잡지 못하는 때가 많습니다. 또 오히려 그 반대로 사람을 잘 못 잡아서 형벌 안 할 사람을 형벌 하는 경우도 이 세상 법정에는 종종 있습니다. 또 죄 지은 사람을 형벌 할 때에도 열 가지 죄를 지었으면 열만큼 하고 다섯 가지 죄를 지었으면 다섯만큼 꼭 적당하게 우리 인간의 재판장들은 죄를 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서양에 재판소 꼭 대기에는 혹 어떤 동상을 만들어 놓는데 어떤 상을 만들어 놓느냐 하면 재판장을 만들어 놓고 그 재판장은 저울대를 쥐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재판장의 눈을 보면 눈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인간의 재판장이라 아무리 저울대를 잡고 꼭 공평하게 다른 사람을 재판하려 하지마는 눈이 가리워 졌습니다. 세상 사람은 모든 것을 자세히 볼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공평이란 아무래도 부족하고 불완전하다 하는 뜻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이 세상에서는 완전한 공의가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사후에 온전히 공의가 이루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사후에 최후의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이 최후의 심판을 하실 분은 누구이신가 함을 가르쳐 줍니다.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지만, 삼위일체 가운데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겠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마지막에 인간의 죄악을 재판할 재판장으로 임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재판장으로 임하시는 것은 가장 적당한 일로 생각합니다. 그 까닭은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과 같이 모든 시험을 다 당하여 보셨지마는 죄는 없으신 분입니다. 그는 재판장의 눈에 수건을 가리운 것처럼 사람을 알지 못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속 가운데 있는 것을 꿰뚫어 보시고 과거와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그리스도입니다. 또한 이 재판장은 조급한 판단을 내릴 분이 아닙니다. 그 대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인생의 모든 슬픔과 모든 고통을 당하셨으므로 얼마든지 동정할 줄 아는, 동정할 수 있는 재판장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가 이와 같은 재판장을 모시게 될 것을 생각할 때 저윽이 우리 마음 가운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 다음에 최후 심판에 대하여 성경에 보면, 인간들을 심판할 때에 어떻게 어떤 표준을 가지고 심판을 하겠느냐 하는 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20장 12절을 여러분께서 들으셨습니다. 책들이 펴 놓였다는 것을 보니까 책이 여러 권입니다. 아마 제 짐작에는 사람 하나마다 책 한 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의 일생의 모든 생각, 모든 말, 모든 행동을 하나도 빠짐 없이 변함없이 꼭 사실대로 기록한 책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른 생각할 때에 책을 쓰는 사람은 공부 많이 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소설 쓰는 사람들은 특별히 재주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이 분명히 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세요.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책을 출판했든지 못했든지 책 한 권을 씁니다. 아세요? 여러분의 매일 매일의 생활이 그 한 책이 됩니다. 혹 어떤 사람은 자기의 생활을 스스로 써서 자서전을 냅니다. 모든 자서전은 한 소설입니다. 아무리 정직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내면 생활을 꼭 그대로 쓸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께서 이 다음 하늘 나라에 갔을 때 책 한 권을 보실 텐데 그 책은 여러분이 쓰신 책입니다. 그 책에는 여러분이 일생토록 마음속에 생각한 것, 누구를 미워한 것, 누구를 싫어한 것, 혼자서 무슨 일 한 것, 비밀히 무슨 일 한 것, 하나도 빠짐 없는 여러분 자신의 전기를 여러분이 직면할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무슨 책 쓰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어제 토요일 무슨 책 한 페이지를 썼습니까? 나타나는 행동만이 아닙니다. 은밀한 것까지 다 심판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에게 숨긴 것까지 다 기록되었다고 그랬습니다. 책을 펴놓는다는 것은 공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 개인의 모든 사람의 비밀 된 생각, 더러운 모든 행동,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것, 내 아내도 모르는 것, 내 부모도 모르는 것을 그 때에는 다 공개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책을 쓰는가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가 정죄(定罪)하는 사람 특별히 없겠습니다. 우리가 그 책을 대면하면 그 책 자체가 나를 더욱 정죄 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책을 다 공개해서 펴놓게 될 때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솔직히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책만 있다고 하면 구원을 얻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책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다른 책이 있는데 그 책은 무슨 책이냐 하면 생명 책이라고 했습니다. 이 생명 책은 한 권입니다. 여러 권 아닙니다. 다른 책 즉 생명 책 하권이 그 앞에 또한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우리의 지식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여간한 좋은 일을 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생활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 아닙니다. 세상 사람이 보기에 선하다고 하는 사람, 세상 사람이 보기에 도덕적 인물이라고 하는 사람, 세상 사람이 보기에 군자라고 하는 사람도 다 하나님 앞에서 볼 때에 더러운 인간뿐입니다. 그 사람의 책에도 더러운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이 생명 책에 기록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렇게 하나님의 온전한 공의 아래에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생명의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로 하여금 모든 인간의 죄 짐을 지게 해서 대신 형벌을 받게 했습니다. 아무리 죄가 많지만 그를 믿고 죄를 회개하는 사람은 죄를 용서해 주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모든 더러운 죄를 지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생명 책에 기록한 것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습니다. 이 다음에 하늘 나라에 가서 핑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 얻을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네가 이 길을 걸었느냐, 안 걸었느냐? 이것으로써 생명 책에 우리의 이름이 업느냐 잇느냐 하는 것이 작정된 것입니다.
그러면 행한 대로 심판 받는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그 뜻도 또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지마는, 하늘 나라에 가서 상을 더 받고 덜 받는 것은 우리가 믿은 후에 하나님의 일을 얼마나 더 부지런히 하고, 얼마나 더 충성하고, 얼마나 더 장성했는지, 그 행위를 따라서 우리가 상을 더 받기도 하고 덜 받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사람은 누구나 다 멸망을 받는데 지옥에 가서 형벌을 받는 데도 등급이 있습니다. 악한 일을 더 많이 한 사람은 더 큰 형벌을 받고 적게 한 사람은 적게 받겠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어거스틴 수도원」에 있을 때 한 번은 꿈을 꾸니까 시험하는 자가 나타나서 루터에게 책을 펴 보입니다. 그 책에 기록된 것을 보니까 전부자기의 지은 죄 즉 아이 적부터 젊었을 때까지 지은 죄가 전부 기록되었습니다. 그 때에 그 책을 가진 사단이 루터에게 하는 말이 이것이 사실이냐 물었습니다. 그러니 할 수 없어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에 하는 말이『네가 이런 더러운 죄는 짓고 구원을 얻겠단 말이냐?』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 기가 막히고 낙심되었습니다.
그 때에 위로부터 음성이 들리는데『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었느니라』는 말씀이 들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단에게 하는 말이 그 죄를 지우고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한다고 기록하라고 말할 때에 사단이 물러갔다고 합니다.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보혈을 믿고 그로 말미암아 죄 사람을 받는 길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다니엘 웹스터라는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요 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한 번은 국무장관으로 있을 때 된 일인데 뉴욕의 어떤 호텔에서 저명한 사람 약 20명과 같이 저녁을 먹을 때 저녁을 다 먹고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웹스터는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있더랍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웹스터 씨, 당신의 일생을 통해서 당신의 마음속에 들어온 생각 가운데 제일 중요한 생각은 무엇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이가 조금 있다 얼굴을 들고 대답하는 말이『제일 나에게 엄숙하고 중요한 생각은 내가 지금 하는 모든 일을 이 다음에 내가 하늘 나라에 가서 내가 책임 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을 할 때에 내 마음이 제일 엄숙해 집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생각, 내가 말하는 말, 내가 행사는 행동, 학생이면 학생으로서 행한 모든 것, 선생이면 선생으로서 행한 모든 것, 장관이면 장관으로서 행한 모든 것, 국회의원이면 국회의원으로서 행한 모든 것, 대통령이면 대통령으로서 행한 모든 것, 목사면 목사로서 행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서 심판을 받을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1954년 9월 26일)
'좋은 말씀 > 한경직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의 생명이 무엇이뇨? (야고보서4:12-17) (0) | 2017.02.04 |
---|---|
믿음과 착한 양심 (디모데 전서 1:12-20) (0) | 2017.02.03 |
기독교와 자유 (누가복음 4:18-19, 이사야 61:1-2) (0) | 2017.01.31 |
원자시대와 신앙생활 (베드로 후서 3:6-13) (0) | 2017.01.30 |
상한 그릇 (예레미야 18:1-10) (0) | 2017.0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