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면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
오늘은 주님의 성일인 동시에 민족으로서 잊을 수 없는 8월 15일입니다.
첫째로, 오늘은 해방 기념일입니다. 우리 민족이 40년 간 일본 제국주의 아래서 압박을 받다가 해방되어 우리가 자유를 얻은 날입니다.
둘째로 기억할 것은, 우리가 받은 이 해방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조금이라도 과거의 애국 지사들과 독립 운동을 한 여러 동포들의 노력을 과소 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인류의 역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옛날 유대인이 바벨론에 잡혀갔다가 파사가 근동 일대를 다스릴 때에 돌아오듯이 연합국의 승리로 말미암아 일본의 패전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의 자유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크신 은혜로 자유를 주셨지만, 속담의「호사다마」(好事多魔)로 공산당들의 야욕으로 말미암아 아직까지 북한 동포는 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또 국토 양단과 민족 분열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은 과거 수 년 간 말할 수 없이 비참한 길을 걸어왔고 결국은 6·25사변이라는 참절(慘絶)한 민족적 비극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날을 당해서 깨달을 바도 있고 결심한 바도 있는 줄 압니다만, 제일 먼저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깊이 깨달아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우리가 8·15 그 날 얻었던 그 감격과 민족 양심으로 다시 돌아가야 되겠습니다. 그 동안 너무도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이 날의 감격과 민족적 양심을 잃어버린 현상이 너무도 많습니다.
다음은 우리가 특별히 이 날 남북의 통일과 실지(失地)의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또 이를 위해서 우리 민족의 전 정력을 모아서 노력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때가 이른 것입니다. 인간적 견지에서 우리의 노력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럴수록 만능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낙심하지 말고 간절히 기도와 노력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 날 우리는 이렇게 남한에서라도 귀한 자유를 향유하였으매 이 남한에 세워진 대한민국을 관민(官民)이 일치 협력해서 과연 문자 그대로 자유를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있도록 또 이러한 나라를 발전시키고 육성하기 위해서 새로운 결심과 각오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날을 당해서 이 날의 의의(意義)와 이 날의 결심을 생각하면서 또한 주님의 교훈을 더듬어 오늘 우리의 은혜로 삼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 나가서 40일 주야로 기도하시며 모든 악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성신의 충만하심을 입어서, 누가복음에 의하면 크신 능력으로 먼저 자기가 자란 갈릴리 나사렛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안식일을 당하여 예수 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시매 그의 앞에 성경을 들었습니다. 예수 님께서 성경을 받으시고 이사야 61장 1-2절과 누가복음 4장 18-19절에 있는 말씀을 읽었습니다.『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 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하며, 눌린 자를 다시 자유롭게 하며, 주의 영광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글이 오늘날 너희에게 응하였느니라』
예수 님께서 자기가 역사를 시작하실 때에 이사야 61장에 있는 말씀을 읽은 까닭은 이 말씀 가운데서 자기의 사명을 발견하셨고 이 말씀이 자기에게 와서 응한 것을 깨달으시고 이 말을 통하여 장차 자기가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선포하시려 함인 것입니다.
포로 된 자를 자유롭게 하시고, 눈먼 자를 보게 하시고, 눌림을 받은 사람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님께서 세 살에 오신 것은 사로잡힌 자들을 해방하고, 눌린 자를 해방해서 그 얽매인 쇠사슬을 풀고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그 형상대로 지으시고 사람에게는 양심을 주시고 한 걸음 더 나가서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범한 후에는 그 성품이 부패해지고 여러 가지 죄악의 결과로 말미암아 본래 받은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심령의 자유를 아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심령의 자유를 잃어버린 결과 모든 다른 방면의 자유도 결국 잃게 되었습니다. 얽매이는 죄악의 결과로 말미암아 정치적 방면, 경제적 방면, 사회적, 문화적인 모든 다른 방면에까지 인생이 얽매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눈을 들어 세계의 정세를 살펴보십시오, 아직 정치적 견지에서 볼 때에도 악한 독재자의 정치 하에 노예 생활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거의 세계의 절반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자유 세계에서 산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도 그의 내적 생활과 그의 심적 상태를 보면, 죄악의 쇠사슬에 얽매인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는 모든 자유의 근본이 되는 자유입니다. 사람의 심령을 얽매는 모든 죄악의 쇠사슬을 풀어서 그 심령 속에 자유를 주십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그런 자유를 주셨습니다. 삭개오에게도 그런 자유를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그런 자유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의 생활을 보면, 사실 옥에 갇힌 때가 많습니다. 로마 감옥에 갇혀 있던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유인이었습니다. 로마 감옥이 사도 바울을 얽매지 못했습니다. 그 심령은 자유의 혼이올시다. 그 때 로마 제위(帝位)에는 네로라는 청년이 황제로 앉아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그야말로 세계에 가장 방대했던 로마 제국의 모든 정권과 백만의 대군을 한 손에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네로의 생활을 보면 그는 종이었습니다. 죄악의 종이었습니다. 악한 성품의 종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감정의 종이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에게 주시는 자유는 무엇보다 먼저 사람으로 하여금 근본 속을 부자유롭게 하는 죄악의 아성을 깨뜨리고 나올 수 있는 심령의 자유인 것입니다. 이 심령의 자유를 얻은 사람은 세계의 어떠한 부자유한 환경에 있을지라도 그 영혼을 구원할 다른 세력은 천하에 없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먼저 정신적 자유를 주시고 이 자유를 통해서 다른 여러 가지 죄악에 얽매인 쇠사슬을 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면, 유대 사람들에게는 예수님 당시의 율법이라는 것이 큰 구속의 세력이었습니다. 율법은 본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유대인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죄로 말미암아 여러 지도자들의 편견(偏見)과 그런 사람을 통해 들어온 전통과 해석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당시에는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보다도 여러 가지 영적 자유를 구속했습니다. 안식일의 모든 규례를 보아도 그렇고, 예배 시의 모든 규례를 보아도 그렇고, 손발을 씻는 규례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복음으로써 구원을 얻어서 생명을 구원하신 다음에는 번다한 율법의 구속에서 해방하였습니다.
모든 율법은 그리스도에게 와서 다 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도 율법 가운데 도덕적인 방면을 지키지만, 이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리, 구원받은 우리가 감사한 마음으로 그 율법을 기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흔히 죄악의 결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사귀 들린 사람을 혹은 병 가운데 사로잡힌 사람들을 권능으로 고쳐주어서 모든 병과 사귀의 세력 가운데서 해방해 주었습니다. 그것 역시 심령의 자유를 얻은 후에 자유인에게 오는 결과로 이와 같이 나타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죄악의 결과로 인생을 구속하는 모든 쇠사슬이 하나씩 하나씩 끊어진 것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가는 곳마다 여러 가지 사교(邪敎)와 미신에 얽매인 쇠사슬에서 인간들을 해방해 주었습니다. 여러 가지 사교는 여러 가지로 사람을 얽매는 것입니다. 구속합니다.
지금까지 인도(印度)의 3억 대중이 얽매여 있는 힌두교를 생각해 보세요. 사람을 4대 계급으로 나눕니다. 그 계급 사이에는 천양지차가 있습니다. 인도인의 어떤 사람은 4대 계급에 들어갈 수 없는, 소위 만지지도 못하는 불촉(不觸)계급까지 있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아직까지 그 계급에 종노릇합니다. 인도 대중 가운데 예수를 믿는 3백만 기독교도만이 그 계급의 사슬을 푼 것입니다. 또한 여러 가지 미신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있던 여러 가지 미신을 생각해 보세요. 미신 때문에 어떤 여행할 날을 자유로 작정할 수 없고, 미신 때문에 잔치할 날도 자유로 정할 수 없고, 어디로 마음대로 가지도 못하게 여러 가지로 미신이 사람의 자유를 구속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는 사람마다 이 미신의 쇠사슬에서 벗어났습니다.
인도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통해서 역사를 통해서 기독교 복음이 가는 곳마다 사교와 미신의 쇠사슬에서 인간을 해방했습니다. 또한 기독교 복음이 가는 곳마다 문화적으로 큰 해방이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세계의 많은 사람이 무지(無知)와 미개(未開)와 문명(文明)의 쇠사슬에 걸려 있습니다. 알지 못해서, 무식해서 여러 가지 얽매이지 않을 곳에 얽매이었습니다.
한국도 역시 그랬습니다. 우리가 기독교 복음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다른 공헌은 말할 것 없이 학교와 문화 기관을 통해서 한국을 문화적으로 해방한 모든 사실을 볼 때에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한 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한글을 대중에게 보급한 공헌만 해도 우리 문화사상(史上) 잊지 못할 금자탑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느 곳에나 기독교 복음이 가는 곳마다 자유를 얻고 또한 기독교 복음이 가는 곳마다 사회적 해방이 있었습니다. 죄악의 역사 가운데 하나는 사회적으로 일생을 구속한 것입니다. 지나간 세기까지 노예 제도가 있었습니다. 사람을 종으로 부렸습니다. 상전은 노예의 생명을 좌우하는 절대 권리를 가졌습니다. 이와 같은 노예 제도는 결국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복음 그대로 성취하겠다는 지도자들로 말미암아 완전히 온 세계에서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자유를 얻었습니다.
여러 세기 동안 어떤 나라를 물론하고 사회적으로 여자를 구속했습니다. 여자는 차별했습니다. 여자의 외출은 특히 금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근동(近東)지방에서는 여자가 외출할 때에 얼굴을 가립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결국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이라는 사상 가운데서 남녀의 동등을 주장하게 되었고 오늘날은 정치 방면으로나 각 방면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된 것입니다. 결국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여자에게 맨 사슬을 끊어서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또한 정치적으로 볼 때 더욱 현저합니다. 죄악이 인간 사회에 한 번 들어온 후부터 정치 제도라는 것은 거의 세력 가진 사람의 농락물이 되어서 옛날이나 오늘이나 세력 가진 폭군들 혹은 독재자들이 국민을 압박하고 자유를 많이 구속했습니다.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우익 독재자들이 믿는 사람을 구속하고 압박했습니다. 오늘날은 좌익 독재자들인 말렌코프나 모택동이나 김일성 같은 자들이 국민을 압박하고 자유를 구속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역사를 보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사람의 생명은 존귀하고 사람은 평등이며 사람은 자유가 있는 것을 밝히 알게 되었고, 이 기본 인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서 아무도 빼앗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임금이나 어떤 정부라도 이 자유를 빼앗을 수 없다고 하는 민주주의 정치 사상과 민주주의 정치 제도가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민주주의 진영에게 결국은 우익 독재자들이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오래지 않아서 민주주의 진영, 자유 진영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죄악 독재자들이 멸망할 날도 멀지 않은 줄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는 한, 어떠한 정치적 세력이라도 인간을 영원히 압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결국 정치적으로 인간에게 자유를 주어 해방하고야 맙니다. 경제적으로도 역시 기독교가 인간에게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농촌 운동을 통한다든 가, 혹은 노동법안을 제정해서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고, 토지법안을 제정해서 모든 농민들의 권리를 옹호해주고, 여러 가지 조합 제도와 보험 제도를 두어서 일반적으로 보호를 받게 하는 이른바 복지국가 제도를 선진 기독교 국가에서 실행해서 기독교 진리가 오래 확보되고 기독교 정신에 의지해서 사회 제도가 수립된 나라일수록 기본적으로 그 경제 생활이 비교적 균등한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은 피 흘리는 일없이, 사람을 숙청하는 일없이 정당한 민주주의 제도와 그 자유를 통해서 결국은 온전히 전 인류를 빈궁에서 해방할 날도 멀지 않은 줄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러 오셨습니다. 먼저 죄악의 쇠사슬을 끊어서 우리의 심령이 자유를 주시고, 그 다음에 죄악의 여파로 말미암아 오는 모든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쇠사슬을 끊어서 우리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를 부여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후서 3장 17절에『주는 신이시니 주의 신이 있는 곳에 자유 함이 있느니라.』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주의 신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인간에게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오한복음 8장 32절에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너희가 내 길에 항상 있으면 너희가 참 내 제자가 될 것이요, 또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놓아주리라.』주님의 진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인간은 해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갈라디아서 5장 1절에『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이렇게 자유 함을 주어 자유 하게 하셨으니 그런고로 너희들은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죄의 멍에를 메지 맙시다! 다시 사회적으로 죄의 멍에를 메지 맙시다! 다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죄의 멍에를 메지 맙시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으로 그리스도께서 해방하여 주신 것입니다.
(1954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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