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믿음」과 「양심」은 한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서로 떠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 착한 양심을 가질 수 없고 또 착한 양심이 없이 믿음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참 믿음이 있는 곳에 어디든지 착한 양심이 그림자와 같이 따라다닐 것입니다. 믿음의 비밀은 깨끗한 양심에서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이 시간, 믿음과 양심과의 관계에 대해서 잠깐 생각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고자 합니다.
먼저 양심이란 성경에 어떤 의미로 쓰입니까? 로마서 2장 15절에 양심은 우리 마음에 새긴 율법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기록된 율법을 주시기 전에 우리 마음을 창조하신 후에는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뜻을 기록해 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앙심은 우리 마음속에 이미 기록된 율법이올시다. 마태복음 6장 22절에 양심은 눈이란 뜻이 있습니다. 눈이 없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눈이 없으면 무엇을 분간할 구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속에 양심이 없으면 무엇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양심은 마음의 등불이란 의미도 있습니다. 캄캄한 밤에 등불이 없으면 어디를 가야 할는지, 어디 위험한 일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양심은 우리 마음속을 밝게 하는 등불입니다. 또한 양심은 우리 마음속의 하나님의 음성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영혼에게 직접 말씀하시며 원하실 때에 우리의 양심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양심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런고로 양심이 우리 인간 생활에서 행하는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양심은 우리 인생의 도덕적 생활에 있어서 지남철의 역할을 합니다. 선과 악을 분별해서 어느 길이 바른 길이고 어느 길이 그릇된 길임을 말해 줍니다. 지남철이 언제든지 남쪽을 향해서 가리키는 것 같이 베드로 전서 3장 21절에『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선한 양심은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가르쳐 줍니다.
뿐만 아니라, 양심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그릇된 길로 나아가려고 할 때는 경고해 줍니다. 위험 신호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하와가 유혹을 받을 때에 양심의 경고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담이 유혹을 받을 때에도 양심의 경고가 있었던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재판할 때에 양심의 경고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무죄한 사람이라 하는 경고를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죄를 지을 때에 양심의 경고가 없이 범죄한 사람이라 하는 것은 별로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고, 양심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그릇된 길로 나가 죄를 범하면 우리를 가책합니다. 우리를 책망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우리의 마음속에 공포심이 들어오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다음에 날이 서늘할 때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오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몰래 숲 속에 숨었다고 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는데, 아담과 하와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죄 지은 사람들은 다 하나님을 무서워하게 됩니다. 그 마음속에 공포심이 채워집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에게 묻는 말이 이런 여자는 우리 율법에 의지하건대 돌로 처서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말씀하겠느냐고 물은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이 때 주님께서 곧 대답하지 않고 무리를 숙이고 땅에 무슨 글자를 쓰시다가 얼마 후에 조용히 머리를 들고 여러 사람에게『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가 없는 사람은 돌로 치라』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머리를 숙여서 글로 썼다고 합니다. 얼마 후에 다시 머리를 들어보니 한 사람 두 사람 슬며시 달아나고 그 여자만 남았습니다. 무엇이 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리를 다 피하게 만들었습니까? 성경에 기록한 대로 양심의 가책 때문입니다. 양심의 가책이 그 사람들로 하여금 달아나게 했습니다. 무엇이 유다로 하여금 어두운 밤에 나가서 스스로 목메어 죽게 만들었습니까? 양심이 유다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와 반대로 양심은 우리가 그 양심을 순복해서 바른 길로 갈 때에는 우리를 칭찬해 주고 우리에게 상을 줍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을 때에 양심의 경고를 듣고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이런 악한 일을 행할 수가 있겠느냐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유혹을 이긴 다음에 그로 말미암아 일시 누명을 쓰게 되어 애굽의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지마는, 성경에 기록하기를『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하셨다』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그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같이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같이 함으로써 비록 몸은 감옥에 있지마는 그의 마음은 화평하였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주를 위해서 채찍으로 많이 맞으며 감옥에 갇힐지라도 항상 마음에 기쁘고 즐거움이 있는 것은 양심이 그들을 칭찬해 주고 양심이 그들에게 상을 준 까닭입니다. 양심은 이와 같은 귀중한 역할을 합니다. 선악을 분별해 주고, 우리를 경고해 주고, 우리가 잘못할 때에 가책해 주고, 우리가 잘할 대에 칭찬해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다음에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은, 이렇게 귀한 양심도 잘못하면 타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병들 수 있습니다. 디도서 1장 15절을 읽으면 '양심이 더러워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양심이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양심의 경고를 불구하고 죄를 지으면 그만큼 우리 양심이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집니다. 더러워지게 되면 선악의 분별이 희미해집니다. 불분명해집니다. 도덕적 판단이 분명하지 못하게 됩니다. 양심이 약해집니다.
사람은 자유가 있어서 양심의 명령을 순복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거부하면 그만 양심은 그만큼 더러워집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타락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 전서 4장 2절을 보면『양심이 화인을 맞았느니라』하는 말이 있습니다. 양심이 화인을 맞아 아주 무감각해져서 마비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처음에 남의 물건을 도적질할 때에는 양심이 불안합니다. 속이 두근거리고 양심이 불안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도적질을 한 번 하고 나면 그 다음에 도적질할 때에는 첫 번보다 불안이 적어집니다. 그 다음에 습관이 되면 거의 양심의 가책이 없이 도적질을 계속하게 됩니다. 가령 어떤 공무원이 있는데, 처음에 어떤 사람에게 무슨 부탁을 들어주고 뇌물을 얼마 받을 때에는 양심이 불안한 것을 느낍니다.『아, 이것 내가 받아 될 수 있나. 내가 나라 일 하는 사람으로 뇌물을 받아 될 수 있나.』양심이 불안하지만 그냥 받습니다. 그렇지마는 한 번 받고 두 번 받을 때에는 첫 번보다 과히 불안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세 번 받고, 네 번 받고, 여러 번 습관이 되면, 그 다음에는 무얼 하나 해 준 다음에는 저 놈이 왜 안 가져오나 하고 그 다음에는 기다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벌써 아주 양심은 마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일층 양심이 타락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23절을 보면『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하는 말이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이렇게 양심이 마비된 후에 계속해서 그냥 좌를 짓는다고 하면 한층 더 타락해서 양심이 왜곡됩니다. 비뚤어집니다. 전도됩니다. 위와 아래가 바뀌어집니다. 양심이 왜곡되고 전도되면 그 때야말로 말할 수 없는 구렁텅이에 떨어집니다. 지금 뇌물 받는 공무원 이야기를 했지만, 앙심이 마비된 경우에는 누가 안 가져오면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섭섭한 그 정도에 그치는 줄 압니까? 그 다음에는 아무 때 자기가 무슨 일을 하여 주었는데 상대방이 아무 인사가 없으니 무슨 일이냐 면서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그런 일을 하게 되면 거기에 맞는 줄 압니다.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을 슬그머니 좀 나오라고 하여서 아예 흥정하자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의 양심은 벌써 자기가 뇌물 받는 것이 합당하지 않는 그런 정도가 지나서 뇌물 받는 것이 옳은 줄 안단 말입니다. 악을 선으로 여긴단 말입니다. 도덕적 판단을 거꾸로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런 사람은 무소불위(無所不爲)입니다. 못할 것이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양심이 평안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북 공산당의 양심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북 공산당들이 사람을 학살하고 물건을 몰수하고 별의별 일 다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 없이 합니다. 양심이 끝까지 타락해서 왜곡이 되고 전도가 되어 이런 일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 믿음의 파산은 말할 것 없고 그 인격이 온전히 파산해 버립니다. 이 양심의 전도처럼 양심의 왜곡처럼 가련한 일이 없고 두려운 일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악하고 가장 추악한 모든 행동은 이런 사람들로 이루어집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착한 양심은 어떤 것입니까? 착한 양심은 한 번도 죄 지은 일없는 그런 양심이란 뜻이 아닙니다. 누구나 죄 짓지 않는 사람이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9장 14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옛날에는 짐승의 피와 암송아지를 태운 재로써 사람을 깨끗하게 하였는데 하물며 흠 없고 깨끗한 그리스도의 피로써 어찌하여 우리의 더러워진 양심을 깨끗이 씻을 수가 없겠습니까? 선한 양심은 전에 죄를 지었지만, 그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이 씻음을 받은 양심이올시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그는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깨끗이 씻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회개하고 씻음을 받은 중생 한 양심이올시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심을 주셨지만 그 양심은 부족한 까닭으로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더 분명하게 나타냈습니다. 그 말씀은 성경에 있습니다. 그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난 이가 예수 그리스도올시다. 성경에 있는 말씀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양심이 수양을 받고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때에는 단순히 우리의 양심이 부족해서, 양심이 연약해서 바로 판단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우리의 부족한 양심, 연약한 양심으로 좀 더 예민하게 좀 더 모든 것을 바로 판단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돌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을 보고 그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의 생활과 교훈과 성경의 말씀으로 우리 양심을 훈련시키고 수양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양심이 점점 자라서 선한 양심이 됩니다. 그래야 사도 바울의 부르짖은 말씀과 같이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부끄럼이 없는 양심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양심의 권위를 잠깐 말하겠습니다. 양심은 우리 인간의 도덕적 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내적 권위입니다. 우리 인간 생활의 표준이 둘 있는데 하나는 외적 권위, 하나는 내적 권위입니다. 외적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생활과 교훈입니다. 내적 권위는 곧 양심입니다 언제든지 이것이 하나가 될 때에 실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내적 권위가 되는 양심의 명령에 순복 하여야 됩니다. 이해와 득실을 초월해서, 빈부와 영고를 초월해서 우리는 이 양심의 명령에 순복 하여야 되겠습니다.
마음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겠습니다. 양심에 순복하기 위해서 돈을 많이 벌어서 불안한 양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보다 낫습니다. 착한 양심대로 살기 위해서 평민의 자리에서 매일 보통 생활을 하는 것이 불안한 양심을 가지고 윗사람의 명령이라고 자기의 양심에 거슬리는데도 북구하고『예, 예, 지당하옵니다.』하면서 사는 높은 지위의 사람보다 실상은 행복 된 사람이올시다. 옛날에 성도들이 양심의 명령대로 순복하기 위해서 감옥에도 갔고 어떤 때에는 생명도 바쳤습니다. 양심은 우리의 도덕적 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내적 권위올시다. 우리가 양심의 명령에 순복하지 않으면 벌써 우리의 신앙은 잘못된 자리로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한국의 현상을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농림부 사건이니 무슨 금융 부정 대부사건이니 해운공사 사건이니 하는 모든 사건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 민족이 과연 양심의 명령에 순복하는 민족입니까? 오늘날의 현상이 어떻습니까? 오늘의 관청을 보고 오늘의 경제계를 보고 오늘의 문화계의 각 방면을 돌아다볼 때에 오늘 우리 사회 현상이 어떻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집이 무너지고 우리의 도회가 폐허가 된 것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마는, 그보다도 뜻 있는 사람의 눈물을 자아내는 것은 우리 민족이 전체적으로 양심의 마비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기 매우 드뭅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런 사회에 있어서 양심의 역할을 해야 됩니다. 사실 교회는 국가의 양심입니다. 믿는 사람은 믿지 아니하는 이런 사회에 있어서 양심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양심 생활이 어떠합니까? 우리 국회에 들어간 믿는 사람이 국회에서 양심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앞으로 우리 국회에서는 우리 대한민국의 장래의 운명에 관계가 되는 여러 가지 중요한 안건을 표결할 것인데 그 때 우리 믿는 사람들이 자기 신분 여하를 돌아보지 않고, 자기가 이 앞으로 다시 재선이 될는지 안 될는지 돌보지 않고, 자기에게 권리가 돌아오겠지 안 돌아오겠지 돌아보지 않고, 양심에 입각해서 모든 것을 표결하겠습니까?
오늘 대한민국의 국회는 전 대한민국 국민이 주목해 볼뿐더러 온 세계가 주목해 보고 있습니다. 양심적 분자가 몇이나 됩니까? 우리 믿는 사람이 그 역할을 합니까?
오늘날 관청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여러 가지로 사건이 많은 그런 가운데 과연 양심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스스로 판단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방면에 우리 믿는 자의 양심이 예민하지 아니 하리요 마는 특별히 우리 자신의 결혼 생활과 가정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많은 생각을 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곳 저 곳에서 들리는 말을 들을 것 같으면 여러 가지 그 반대되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38선으로 말미암아 그 가정이 분리되어서 가족이 이북에 있고 남편 한 사람만 이남에 내려와서 독신 생활을 하게 되는 그 분들의 가련한 신세를 생각할 때 실상 무엇으로 동정의 뜻을 표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또 그 사정이 매우 어려울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사람이면 양심이 맑은 생활을 하여야 되겠습니다. (1954년 10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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