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4)
정치적으로 볼 때 오늘날 우리는 혼란한 상태에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정상적으로 산업이 움직이지 못하고 혼란기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에서 되는 모든 일이 그러한데 특히 도덕적으로는 더욱 심하여 일정한 표준이 없고 재래의 도덕은 권위를 상실하고 새로운 표준도 없어서 혼란 그대로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우리 교회가 완전한 표준이 있으면 좋은데 역시 같은 상태에 있습니다. 해방 후 이런 파 저런 파가 있어서 혼란합니다 교회에서도 신앙의 노선을 운위하게 되고 이리저리 밀리고 우왕좌왕하는 청년 학생이 있습니다. 신앙의 바른 노선이 어디 있습니까?
한 가지 경계할 것은 세계 노선이라는 말이 종종 들립니다. 세계 노선을 부르짖고 알고 싶은 사람이 있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운위하는 것이 있습니다. 세계 노선이란 말은 아마 온 세계 사람이 믿는 길일 것입니다. 보통으로 세계 사람이 다 이 노선으로 가니 너희도 마땅히 이 길을 따라가라 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 태도가 옳은가 옳지 않은가를 판단합시다. 얼른 생각하기에는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면 세상 사람이 가는 길은 옳은 때도 있고 잘못된 때도 있습니다. 성경 말씀과 같이 풍조에 밀려서 바로 가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따라갑니다. 이런 태도로 2, 3세기에 살았더라면 옳게 믿지 못했을 검입니다. 2, 3세기에 굉장히 떠돌던 노스틱주의를 따라갔을 것입니다. 중세기에 살았더라면 마리아를 숭배하고 모든 성자에게 분향(焚香)했을 것입니다. 설사 세상 사람이 다 따라갈지라도 반드시 그것이 옳은 길이 아닙니다.
신앙에는 표준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풍조를 표준으로 삼으면 바로 가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바로 믿고 따라갈 수 있을까요? 신앙의 표준을 바로 정하여야 됩니다. 성경, 교회, 전통, 이성, 감정, 실용(實用)등을 흔히 신앙의 표준으로 삼습니다. 우리 장로교에서는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하지만, 천주교에서는 신앙의 표준을 성경과 교회의 전통으로 하고 있어서 마리아 숭배 등을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예수 님을 보고 직접 따르고 오순절에 성신 받은 제자들이 믿는 대로 믿으면 됩니다. 1, 2세기에는 전통이 없었습니다. 사도들의 신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있습니다. 전통은 세상의 풍속과 사조가 교회에 혼입(混入)되어 성립된 것으로 신앙의 표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성을 신앙의 표준으로 삼는 사람을 합리주의자라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이성이 있어 우리의 理智에 비추어 보아서 이지에 맞는 것은 믿고 이지에 맞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이지가 만물의 척도입니다. 소위 신 신학(新神學)의 진수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으나 삼위일체는 이성으로 알 수 없으니 믿을 수 없습니다. 치병(治病)에 대한 이적은 혹 믿을 수 있으나 자연에 대한 이적은 믿을 수 없습니다. 이성을 신앙의 표준으로 합니다. 성경도 이성으로 판단합니다. 이것이 옳습니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성도 제한된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성을 초월하는 존재가 많은 것입니다. 이 조그마한 제한된 이성을 가지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진리를 전부 판단하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소경 다섯 사람이 코끼리 구경한 비유를 아시겠습니다. 자기가 직접 만져본 것만을 가지고 그것이 코끼리라고 하는 것은 일면 옳고 다 옳은 것입니다. 우리 사람의 좁은 이성을 신앙의 표준으로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감정으로 신앙의 표준을 삼는 자들은 소위 신비주의자들입니다. 신앙의 표준을 성경에 두지 않고, 감정적으로, 어떤 들리는 음성, 생각을 성경과 대조해서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소위 영파(靈派)의 사람들입니다 성경보다도 자기의 일시적 기분과 감정으로 표준을 삼는 것은 잘못입니다.
실용주의 즉 월리암 제임스를 원조로 하는 미국의 철학적 실천주의가 있는데 종교에 관한 진리도 해 보아서 좋은 결과가 되는 것은 믿고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것을 결과적으로 좋으니 믿는다는 것은 이론으로 우리가 알 수 있으나 오리? 신앙 노선으로는 삼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어 보아서 믿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표준으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는 신앙 노선은 사람의 전통, 이성, 감정, 실용에 둘 수 없습니다. 사도의 신앙을 가르치는 것은 신약성경이올시다. 사도의 신앙, 그것이 고금 동서양을 상관할 것 없이 바른 신앙의 노선입니다. 바른 신앙의 표준은 신구약성경 가운데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1953년 5월 17일 저녁·부산 영락교회 베다니 학생회 헌신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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