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목회편지

조병수의 목회편지(118)_ 선한고백 (딤전 6:12b)

새벽지기1 2016. 11. 14. 07:34


소명을 너무 사역과 관련해서만 이해하려는 시도는 문제가 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맡기시기 위하여 사람을 부르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전도가 소명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구제가 소명이다.

소명은 영생 위한 부르심 의미해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치유사역을 소명으로 받았다거나 찬양사역을 소명으로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본다. 하지만 소명이란 근본적으로 영생을 위한 부르심이다. 여기에 복음의 요점이 들어있다. 만일에 영생에 부르심을 이해하지 못한 채 소명을 사역과 연관시켜 생각한다면 그것은 기초를 놓지 않고 집을 짓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되고 만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근본적으로 전도를 위한 것도 아니고 구제를 위한 것도 아니다. 영생을 위한 부르심 없이는 그런 모든 것이 처음부터 아예 무의미하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영생을 위한 부르심을 이해하는 사람은 영생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오늘 날 현대교회에서 나타나는 치명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는 영생에 대한 신앙고백이 희미하다는 것이다. 좋게 표현해서 희미하다는 말이지, 사실은 그런 고백이 부재하다고 말해도 잘못이 아닐 정도이다. 슬픈 일이지만 영생에 대한 설교도 없고 영생에 대한 찬송도 없다. 설교자들은 이 땅에서의 성공과 행복을 말하느라고 분주하고, 신자들은 이 땅에서 뭔가 신비한 것을 체험하고 싶다는 노래를 부르느라고 바쁘다.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보느라 햇빛을 놓치는 것처럼 현세의 웰빙에 몰두하다가 영생의 영광을 느끼지 못한다. 가로등 밑을 떠나지 않으면 달의 찬연한 빛을 맛보지 못하듯이 영생을 알려면 일시의 그늘에서 떠나야 하는 법이다. 영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늘에 속한 것이다. 영생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있는 것을 가리킨다. 우스갯소리겠지만 어떤 이는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있으면 지겹지 않겠느냐고 말하는데,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 있으면 지겹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사람은 사랑할 자격이 없다. 아마도 이런 사람은 시편기자에게서 무릎을 꿇고 공손히 한 수 배워야 할 것이다(시 16:11).


또한 영생은 하나님을 영원히 아는 것이다(요 17:3). 사도 바울이 다른 데서 고백했던 것처럼, 신자는 영생의 세계에서 온전한 지식으로 인한 끊임없는 즐거움을 맛본다(고전 13:12). 달리 말하자면, 영생은 하나님의 은혜를 영원히 누리는 가장 큰 기쁨의 연속이다. 영생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은 그 신앙을 간직하려다가 이 세상에서 조금 잘못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 신자는 영생에 대한 고백 때문에 금생에서 희생하는 것도 감수한다.


또 다른 곳에서 사도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신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집, 하늘에 영원한 집이 있는 줄 알기 때문에 땅에 있는 장막 집이 무너지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다(고후 5:1). 그런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인간의 자존심을 버리며,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자신의 이름을 포기하며, 영생의 즐거움을 위해서 금생의 기쁨을 양보한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영생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디모데가 많은 증인들 앞에서 영생을 위하여 선한 신앙고백을 한 것을 칭찬하면서 가슴속에 두었던 이야기는 대략 이런 것이었으리라. 그리고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하면서 끝끝내 입 밖에 내지 않은 또 다른 이야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영생을 고백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보여야 할 품위에 관한 것이라 생각된다.


영생을 고백하는 신자는 아무 것도 없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이며, 부요에도 가난에도 처할 수 있기에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생을 고백하는 신자는 마음이 너그럽고 넉넉하며, 생각이 여유롭고 부드럽다.

영생을 위해 부름받음 명심해야

보석을 가진 사람은 잡석을 놓고 싸우지 않으며, 하늘을 소유한 사람은 땅을 위해서 다투지 않는다. 왕궁을 얻은 사람은 모래성 때문에 근심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세상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다. 내일을 아는 사람은 오늘에 매이지 않으며, 영생을 고백하는 사람은 금생 때문에 쩨쩨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