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주의와 승리주의 사이에서
설교자는 결코 신자는 죄를 이길 수 없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식의 패배주의와 방종을 조장하는 설교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 안의 은혜의 풍성함과 신자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죄를 충분히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으며 그런 삶을 살라고 끊임없이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성화 과정에서 많은 쓰러짐의 아픔과 낭패를 거듭하는 신자의 실존적인 연약함에 대한 깊은 배려와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유모가 갓난아이를 양육하듯이, 오래 참음과 온유와 눈물로 지난하고 힘겨운 성화의 노정에서 허우적거리는 연약한 신자들의 친절한 길벗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성화 과정에서 신자가 겪는 많은 실패와 좌절과 곤경에 깊이 공감하는 실존적인 깊이를 담아내지 못한 채 예수 믿으면 죄를 짓지 않는데 왜 당신들은 그런 식으로 사느냐고 밀어붙이는 것보다 그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 믿으면 어거스틴의 말대로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집니다. 신자 안에 거듭난 생명과 성품, 그리고 성령이 내주하기에 죄를 안 짓고 죄를 이길 수 있는 충분한 은혜와 가능성이 있지요. 제대로 성경과 신학을 공부한 설교자라면 이 정도의 기본 확신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의 풍성한 은혜와 능력을 의존해서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라고 항상 설교합니다. 저도 그러구요. 신자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패배주의를 조장하는 설교를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의 은혜의 풍성을 무시하고 값싼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거지요. 제대로 된 설교자라면 그렇게 어리석게 설교할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설교자는 이 은혜의 충족성과 함께 성화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신자의 연약성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거듭난 신자라 할지라도 죄를 이길 수 있는 충분한 자유와 은혜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헛되게 함으로 죄에 자주 쓰러지는 신자의 현실을 명백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화는 이미와 아직도의 구도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는 이미 죄에서 자유했고 죄를 이길 수 있지만 아직도 죄를 전혀 범하지 않는 완전 성화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거기에서 신자의 탄식과 회개의 눈물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완전 성화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화론적인 이단으로 규정되어왔습니다. 그런 주장은 성경말씀과 상충될 뿐 아니라 심각한 자기기만에 빠지는 겁니다. 패배주의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 과도하고 성급한 승리주의이지요.
예수 믿으면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면 그것이 다른 성경적 증거를 모두 무시해버리는 절대 교리로 작용하지요. 그 척도로 모든 신자를 진단한다면 연약하여 죄에 쓰러지는 신자는 복음을 제대로 믿지 않는 것이며 이단적이고 거듭나지 못한 것이라는 식으로 정죄하게 됩니다. 그런 가르침은 연약한 신자들을 더 심한 자괴감에 빠지게 할 것입니다. 승리주의 가르침이 많은 교인들을 더 낙심케 하고 절망과 자포자기의 나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 아이러니하지요.
제가 지적한 것은 하나님께 난 자마다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전후문맥과 성경전체 가르침의 맥락에서 해석하지 않고 절대 교리와 명제로 삼을 때 그런 설교를 듣는 이에게 많은 혼란과 의문과 오해를 야기시킨다는 거지요. 전에 그 본문을 그런 식으로 해석한 이들로 인해 한국교회가 많은 진통을 겪었지요. 이제는 그런 오역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그런 식의 주장을 접하며 당혹스러움을 느낀 겁니다.
교회역사 속에 탁월한 거룩의 경지에 이르렀던 성도들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도 명시되었듯이 자신이 이룬 거룩함이 경건의 작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여겼지요. 그들은 하루도 자신이 죄에서 완전히 자유한 삶을 산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죄의 기준이 낮거나 영적으로 아직 어둡고 둔감한 사람이 죄를 안 짓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주님의 밝은 임재 가운데 살수록 자신의 부족함에 더 민감해지지요. 그래서 가장 거룩한 사람, 죄를 안 짓는 사람이 가장 깊이 회개하며 삽니다. 어떤 특정한 죄를 짓지 않았을지라도 주님과 이웃을 더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 것, 주님을 더 온전히 닮지 못한 것, 형제의 허물과 교회와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끌어안고 회개하지요.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우리는 새롭게 되었지만 아직 죄인으로서 항상 십자가 보혈의 공로만 의지하고 주님께 나아갑니다. 끊임없이 우리 죄를 사하고 깨끗케 하는 그 보혈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우리는 승리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보혈만을 자랑하고 찬양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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