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승구교수

유아 세례에 대한 장로 교회의 이해 / 이승구 박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새벽지기1 2016. 7. 14. 15:02


유아 세례에 대한 장로 교회의 이해

 

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고, 그 신앙을 고백하는 참된 신자들에게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 그렇다면, 아직 자신의 입으로 신앙을 고백할 수 없는 어린 아기들에게도 과연 세례를 베풀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 될 수 있다. 이 질문은 고대 교회의 터툴리안이나 종교 개혁 시대에 급진적 개혁자들이었던 재세례파에 속한 이들에 의해서 우리에게 제기된 질문이다. 그리고 지금도 침례교인들과 바르트를 따르는 이들은 아주 심각하게 이 질문을 우리에게 제기한다. 예를 들어서, 침례교 신학의 입장에서 세례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A. T. 로벗슨은 “신약에는 유아 세례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소논문에서 생각할 바와 같이, 이런 주장은 옳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그저 교회 안에서 습관적으로 행하던 것을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반복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교회 안에서 행하는 일에 대하여 분명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유익을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적으로 보면 교회는 과연 어린아이들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성경에는 어린아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거나, 세례를 베풀지 말아야 한다거나 어떤 구체적인 진술이 많은 말로 나타나 있지는 않다. 이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성경 구절을 언급하는 것은 있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성경의 전체 구조로부터만 찾아야 한다. 그렇기에 이 작업은 신학적 작업이 되는 것이다.

 

1. 어린 아기들도 은혜 언약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어린아이들이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근거로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은혜 언약(covenant of grace)이다. 은혜 언약은 인간이 죄로 타락한 이후 하나님께서 죄에 빠진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마련해 주신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에 대한 언약으로, 이는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내려 주신 언약을 뜻하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대리 속죄의 죽음을 죽으셔서 구원을 이루신 것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적용시켜 주신다는 식으로 그렇게 구체적인 정보를 가지고 제시되고 믿어진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저 여인의 후손을 통해서 구원하실 것임을 시사하시고, 그가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언약을 실현하는 방식으로 그 구원을 이루실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그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그 구원을 이루 실 것이라고 점진적으로 그 내용을 제시하시고 그에 따라서 사람들을 은혜 언약 안에 있도록 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그 언약은 시행 형식은 다양하지만, 그 언약의 본질과 그 내용은 늘 같은 것이다. 아브라함 언약에 속한 본질적인 것은 모세의 시내 언약에도 속하며, 다윗 언약에도 속하고, 신약에도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언약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신약의 은혜 언약의 백성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시행 형식은 좀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구약의 아브라함 때서부터는 은혜 언약에 속하려면 베는 예식인 할례(割禮, circumcision)를 받아야 했다. 은혜 언약의 표를 자신의 몸에 지닌다는 표로 할례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더 이상 할례를 받아 은혜 언약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다. 신약의 백성들에게는 세례를 받아 은혜 언약에 참여하는 표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 시대에는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할례를 받을 때에(창 17:24) 하나님께서는 난지 팔일 된 어린아이들에게 할례를 베풀라고 했다(창 17:12, 레 12:3). 그러므로 구약 시대에는 어린아이들도 은혜 언약에 속하는 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원칙이 적용되면 신약에서도 어린아이들도 은혜 언약에 속하는 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다우(W. H. T. Dau) 같은 이는 옛 언약에서는 유아들이 할례를 통해 은혜 언약에 참여 할 수 있었는데, 새 언약이 이 보다 더 열등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논의도 하고 있다. 새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요, 그 발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갈 3:15-17 참조). 이렇게 보면, 유아 세례를 베풀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우리가 그에 속해 있는 은혜 언약뿐임이 드러난다. 유아 세례를 받는 아이들도 하나님의 은혜 언약에 속하는 것이고,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이와 같이 믿는 이들의 자녀들을 언약의 자녀들로 보는 이 입장과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사도적 교회 안에서는 적어도 유아 세례를 허용하고 시행해 왔었다. 물론 그런 증거가 없다고 논의하려는 학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처음 교회가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사실은 거의 분명한 듯싶다. 그리고 이것은 처음 복음 선포자들의 선언 속에 함의된 태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서, 예루살렘의 믿는 유대인들에게 처음 세례 받으라고 권면하면서 베드로는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말했음을 기억해 보라(행 2:38f.).

 

 

2. 어린 아기들에게도 구속이 약속되어졌다.

 

 

그러므로 유아 세례를 받은 어린아이들에게도 구속이 약속되어져 있다고 우리는 성경에 근거하여 믿는 것이다. 어린아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 언약이 제공하는 구속으로부터 제외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구속의 은혜를 얻고자 성숙하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니다. 갓 태어난 신자의 자녀들에게도 그들이 이미 은혜 언약의 범위 안에 있으므로 구속의 약속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이 약속을 믿고서 유아 세례를 시행하여 어린아이들도 이 약속 안에 있음을 고백하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어린아이들도 그들 자신으로서는 구원함에 이를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을 성령님께서 적용시켜 주실 때에만 그들이 구원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고백하는 것이기도 한다. 아무리 순결해 보이는 아기라도 구속을 필요로 하지 않을 아기는 이 세상에 한 아이도 없다. 갓 태어난 아기들이라고 해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실에 의해서만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또는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 10:14//마 19:14//눅 18:16f.)와 같은 말씀을 어린아이는 순결하고 깨끗하기 때문에 당연히 천국에 들어갈 만하다고 해석하는 것은 성경 전체의 뜻을 아주 곡해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이 구절들의 직접적 문맥상의 대조에 유의하면서 이런 구절이 어린아이들의 수줍고 겸손하며 자기 주장이 없고 어떤 지위에 연연하지 않는 것 또는 자기 부인 때문에 천국에 합당하다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의 전적인 의존성과 단순한 신뢰(simple trust)를 칭찬하시며 이 말씀을 하시고 있다고 보는 해석도 있으며, 또한 아이들의 무력함과 도움 받을 데 없음을 강조하시면서 세상의 낮은 자들과 천국을 연관시키는 해석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해석들을 하면서 만일에 우리가 어린 아이 자체에게 어떤 칭찬할만한 점이 있다는 식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성경의 작은 맥락에는 잘 유의하면서도 성경 전체의 문맥과 잘 어울릴 수 없는 해석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성경은 아무리 어린아이들이라도 모두 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필요로 한다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도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구속함을 받아야만 한다. 그것을 표현하며 주께서 십자가의 구속으로 아이들을 구원하심을 믿음으로 표현하는 일이 유아 세례식인 것이다.

그러나 또한 오스카 쿨만이나 요아킴 예레미아스가 그렇게 하듯이, 마태복음 19:14에 사용된 용어가 세례 의식에 사용된 전문적 용어라고 보면서 이 구절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이 1세기 교회의 유아 세례적 정황이며, 따라서 이 구절이 유아 세례를 직접적으로 지지하는 구절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또 너무 지나친 해석이며, 이런 구절이 예수님의 생존시에 그 삶의 정황을 가지고 있음을 의심하는 문제성을 지닌 해석일 것이다. 이런 구절들은 아마도 돌이킴과 중생 등을 언급하는 구절들로 해석되어야만 성경 전체와 잘 연관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초자연적 중생과 돌이킴이 있어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요한 복음 3:3-6과 연관시켜서 해석하는 것이 옳으리라고 여겨진다. 모든 사람에게 이런 초자연적 중생과 돌이킴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이미 언약의 영역 안에 있다는 확언도 있다(고전 7:14 참조). 심지어 한편만이 믿게 된 경우에도 그 자녀들이 거룩하다고 단언하는 것을 보면 이것이 분명해 진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의 아이들은 이미 언약의 자녀인 것이다. 이 언약의 자녀들에게는 그들이 언약 안에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구속의 약속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어떤 관심을 가지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개입해 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들이 세례를 받게 될 때에 큰 감격으로 가득 차야 한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성이 여기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녀들에 대해서까지 하나님의 것이라 선언하시며, 자신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지칭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어린 아기들도 세레로 기독교회 안에 속하게 된다.

 

 

또한 유아 세례를 받은 아이들은 그 사실에 근거해서 원칙적으로 교회에 받아들여지는 것이고, 교회 안에 속해 있는 이들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들도 하나님의 특별한 공동체(Gemeide)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그 아이들은 교회 안에서 성장해서 성숙한 후에는 자신들의 입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하고 그 고백에 근거해서 교회의 성숙한 정회원으로 받아 들여야만 한다[入敎]. 그러나 그렇게 입교에 의해 교회의 정회원이 되기 전에라도 유아 세례를 받은 아이들은 교회에 속해 있는 교회의 한 지체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어서 우리가 관찰하는 교회[可視的 敎會, 有形 敎會, church visible]는 진정한 신자들과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의 약속은 신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이렇게 유아 세례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 속한 아이들은 불신자들의 자녀들과 구별되고, 기독교 가정과 교회 안에서 언약의 자녀들로서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을 받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 공동체의 회원들로서 복음의 선포를 들으며 자라고, 그 복음의 풍성한 의미 안에서 양육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언약적 책임을 받아들이도록,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도록] 양육 받고 도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이미 교회 안에 심겨진 자들이 얻는 특권이다. (이점을 아주 강조하면서도 우리는 교회 밖에 있는 자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의 중요성도 매우 강조해야만 한다. 과거의 교회가 이 일을 등한히 했다면 우리들 가운데 많은 수는 지금까지도 교회 안에 속해 있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4. 유아 세례는 은혜 언약의 표요, 믿음의 행위이다.

 

 

유아 세례가 이와 같이 은혜 언약의 표라고 하면 유아 세례를 행할 때에 은혜 언약 교리에

근거해서 유아 세례를 베푸는 목사님이나 어린 아기를 세례 받도록 데려 오는 부모나, 그 유아 세례식에 참석하여 증인과 공동 교육자로서의 증언을 하는 온 회중이 이 세례를 받는 아이가 은혜 언약의 자녀라는 믿음을 가지고서 이 거룩한 일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이 믿음이 없이는 이 세례식은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한다. 천주교회의 유아 영세식과 개신교회의 유아 세례식의 차이가 바로 여기서 나타난다. 천주교회에서는 신부님이 영세를 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 역사해서(ex opere operato) 그 아이를 중생시킨다고 생각한다. 이를 흔히 세례 중생설(baptismal regeneration theory)이라고 한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그런 기계적인 성례관은 성례를 마술적인 것으로 전락시키는 비성경적 견해라고 생각한다. 세례는 어린 이이들을 중생시키거나 그들 안에 신앙을 생성시키는 마술적인 의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유아 세례를 베풀고 받아도, 베푸는 이나 그 부모에게 성령님께서 이 유아 세례를 은혜의 방도로 유효하게 사용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그 유아 세례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개신교도들이 성경에서 발견한 유아 세례관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이 잘 표현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성령님께서는 거룩한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우리의 심령에 신앙을 생성시키시고, 거룩한 성례를 통해서 그것을 견고케 하시는 것이다”(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 제 65문답). 그러므로 유아 세례에 있어서도 이 일의 주체자는 성령님이시다.

이런 입장에서는 집례자와 부모에게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에 행하시는 일에 대한 믿음이 없이 유아 세례가 시행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거룩한 예식[聖禮]을 모독하고 훼손하는 것이 될 뿐이라고 간주한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집례자와 그 부모에게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를 성령으로 적용시켜 주셔서 이 아이를 구속하시며,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으로 세우신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유아 세례야말로 교회의 믿음을 드러내는 믿음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을 세례 받도록 데려 올 때에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사역을 이 아이에게도 적용시켜 주셔서 이 아이를 언약 백성을 삼으신다는 것을 믿고서 베푼 유아 세례는 반드시 그 효과가 있어서 그 은혜를 그 아이에게 내려주는 것이다. 물론 유아 세례를 베풀 때만 그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성령의 사역에 대한 믿음 가운데서 온 교회가 그 언약의 자녀들을 가르쳐서 이 아이들이 성숙하면 그들의 마음과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게 해야 하지만 말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제 74문답은 우리가 이번에 살펴 본 유아 세례의 시행 근거와 의미를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고 있다.

 

(문) 유아들도 세례를 받아야만 합니까?

(답) 그렇다. 그들의 부모들만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도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다.

어린 아이들도 어른에 못지 않게

그리스도의 피와 신앙을 생성시키는 성령을 통해서

죄 용서함을 받도록 약속되었다.

그러므로 그 언약의 표인 세례로써 어린 아이들도

그리스도의 교회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불신자들의 자녀들과 구별되어야 한다.

이것이 구약 시대에는 할례로써 이루어졌지만,

신약에서는 세례로 대체되었다.

5. 유아 세례 이후의 우리들의 책임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아직 신앙을 고백할 수 없는 어린 아기들에게 세례를 베푼 후에는 그 아이들이 성장해서 자신들의 입으로 신앙을 고백할 수 있을 때까지 그 아이들에게 주의 교양과 훈계로 가르칠 책임이 그 부모와 교회 공동체에게 있다. 그러므로 유아 세례를 베푼 후에 제대로 된 기독교 교육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유아 세례를 베푸는 우리가 오히려 유아 세례의 의미를 상실시키게 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유아 세례를 베푸는 개혁 교회의 일원들로서 우리는 어린 아기들이 자라나서 자신들의 의식(意識)을 가지고 신앙을 고백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그 아이들을 교육해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5-1. 부모의 책임

 

그런데 유아 세례 받은 아이들을 교육시킬 일차적 책임은 그 아이들의 부모에게 있다. 부모의 이런 교육적 책임은 그 자녀를 낳은 부모들의 자연적 책임이기도 하지만, 이는 결국 언약의 부모로서의 언약적 책임이 된다. 부모는 자녀들을 그 자녀들 자신을 위해서 양육하거나 자신들을 위해서 양육하거나, 또 이 사회나 세상을 위해서 양육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인 부모는 언약의 자녀들을 주님을 위해 양육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 일을 어떤 식으로 감당해야 과연 주님을 위해 언약의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이 되는 것일까?

첫째로, 부모에게는 신앙의 내용을 가르칠 책임이 있다. 다른 것들도 잘 가르쳐야만 하지만, 무엇보다도 신앙의 내용을 잘 가르칠 때 우리는 비로소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엡 6:4)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전수받은 사도적 가르침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가르쳐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먼저 사도적 가르침의 내용을 잘 알고 있어야만 한다.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를 먼저 강조하고, 그 후에야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라고 명하셨던 것이다(신 6: 6, 7). 이 원칙은 신약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가정에서의 이 가르침은 우리의 삶의 모든 정황 가운데서 베풀어져야만 한다. 구약에서는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라고 하셨다(신 6: 7). 이는 우리의 삶의 모든 정황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 있든지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신앙의 내용을 자녀들에게 잘 가르쳐야만 한다. 그리고 이 일의 일차적인 책임은 하나님께서 그 가정의 머리로 인정하시는 아버지에게 있다. 아버지가 일차적으로 자녀의 신앙 교육을 책임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들은 스스로 신앙의 내용을 잘 파악해서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일에 힘써야 한다.

둘째로, 부모는 신앙의 내용을 잘 전달하기 위해서라도 그 신앙에 있어서 본을 보일 필요가 있다. 부모의 본이 없으면 우리가 가르치는 내용이 효과적으로 전달된다고 보증하기 어렵다. 그런 본의 하나로 부모는 교육을 하면서 분노의 감정을 가지지 말고, 또 자녀가 분노를 느끼지 않도록 교육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라고 말하고 있다(엡 6:4). 이는 부모와 자녀 중에서 더 연약한 쪽인 자녀의 감정, 특히 자녀의 분노의 감정을 고려한 교육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명령이다. 부모의, 특히 아버지의 절대적 권위(patria potestas)만이 중시되던 고대의 분위기 속에서 이는 매우 혁명적이고 시사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의미는 더 혁명적이다. 이는 결국 부모에게 그 자녀들에게 ‘비합리적인 요구’를 하지 말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녀가 낙심할 것을 염려하는 세심한 배려의 교육이다(골 3: 21).

셋째로, 그 부모는 아이들에게 신앙을 전수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만 한다. 흔히 잠재적 교육 과정(hidden curriculum)이라고 불리는 이런 분위기와 정황을 사용해서 우리는 주님에 대한 말씀을 다음 세대에 잘 전달해야 한다.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이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명령했다: “너는 또 그것을[하나님의 말씀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 8, 9). 이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다 동원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환경은 자녀들을 기독교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다 사용해서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결국은 자신의 입으로 신앙을 고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신들이 의식을 가지고 분명히 스스로의 믿음을 공표해야 할 것인데, 그것이 가능할 때까지 일차적으로 부모가 신앙을 가르치고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가정은 공식적인 학교는 아니다. 가정은 무엇보다도 그 안에서 우리가 편히 쉬고, 삶을 함께 나누는 삶의 장(場)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정은 어색한 교육적 분위기와 이상스러운 종교적 분위기로 숨막히는 가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의 가정은 폭 넓은 하나님의 가정의 한 부분으로서 아주 즐겁고 자연스러우면서도 그 안에서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한 의미가 내용과 삶으로 전달되는 교육의 장이 되기도 해야만 한다.

 

5-2. 교회 회중들의 책임

 

그런데 유아 세례자들을 가르치고 교육할 책임은 부모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속해 있는 교회의 회중에게도 있다. 그러면 한 교회 공동체의 회중들은 언약 공동체의 일원들로서 언약의 자녀들에게 대하여 과연 어떤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일까?

첫째로, 회중들은 그 아이의 부모가 제대로 양육과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일은 그들이 그 아이의 유아 세례식의 증인이 된 책임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늘 회중 앞에서 유아 세례를 베품으로써 교회 공동체의 회중이 감당해야할 책임을 분명히 의식시켜야만 한다. 그러므로 누가 유아 세례를 받는지도 모르는 식의 유아 세례식이 반복되는 것은 다시금 고려해 보아야 할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교회는 진지하게 온 회중의 책임을 상기시키는 식으로 유아 세례식을 시행해야 할 것이고, 모든 회중은 다 같이 그들의 책임을 감당해야만 한다. 부모가 제대로 교육의 책임을 감당하고 있지 않다면 함께 권면해서 부모가 언약의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 감당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회중들이라도 그런 가르침을 감당해야 한다.

둘째로, 회중들은 다 같이 합력해서 그 교회 공동체의 교회에서의 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교회의 어린이들과 학생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은 첫째로 그 교회 안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을 잘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차적으로 교회 밖에 있는 아이들과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려는 목적도 가집니다. 가정에서의 교육으로 다 감당할 수 없는 신앙 내용과 교육을 위해서, 또 집단과 공동체 안에서의 삶의 내용을 위한 교육을 위해서 한 교회의 회중 전체가 교회 안의 어린이들과 학생들을 위한 그 교회의 교육을 감당해야 한다. 주일 학교를 잘 운영하는 것도 이를 효과적으로 감당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노력은 주일 학교 교육 이상으로 나아가려는 것이기도 해야만 한다.

 

 

5-3. 기독교 학교의 책임

 

그런데 부모와 교회의 가르침으로 언약의 자녀들의 교육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 하나의 중요한 기독교 교육 기관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기독교 학교이다(Christian school or Christian day-school). 그런데 이 기독교 학교는 실질적으로 기독교인인 학부모들이 그 비용을 담당해서 운영할 수도 있고, 지교회(肢敎會)의 회중들이 부담해서 운영할 수도 있으며, 노회나 총회의 결의에 의해서 그 모든 지교회들의 연합된 노력에 의해 운영될 수도 있으므로, 이는 결국 부모와 교회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학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학교는 특별한 목적으로 부모와 교회 회중들에 의해서 세워지고 운영되는 기독교 교육 기관이다.

기독교 학교는 그리스도인인 교사와 그리스도인인 학생이 함께 작업하는 기독교적 학문 공동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이 기독교 학교에서 그리스도인인 교사는 그리스도인인 학생들이 모든 면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돕다. 그러므로 기독교 학교는 좀더 전문적으로 교육을 감당함으로써 가정 교육과 교회의 교육을 돕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독교 학교에 관련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통합적인 기독교 교육에 대한 이상(vision)이 있어야 하고, 이 일에 헌신된 교사들과 학부모들이 있어서 기독교 학교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특히 교사들은 신앙과 자신이 가르치는 교과가 잘 통합되게 가르쳐야만 하고, 그런 교육을 감당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이런 참된 기독교 교육자들을 교육시키고 양성할 수 있는 기독교 교육 대학원과 같은 기관이 있어야만 하고, 신앙과 학문이 참으로 통합된 참된 기독교적 학문(Christian scholarship)을 하는 기독교 대학교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기관들을 통해서 진정한 기독교 학교가 이루어지고 유지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인 부모들과 교회로서 우리는 진정한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할 책임을 감당해야만 한다. 그것은 물론 부모와 교회 공동체의 많은 희생과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언약 공동체에 속해 있는 이들로서 감당해야 하는 책임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이 기독교 학교를 세우고 운영하는 일을 잘 감당해야만 한다.

 

 

6. 결론

 

 

우리는 유아 세례를 받은 아이들에 대한 세 가지 교육의 장인 가정과 교회와 학교를 생각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정은 이상한 종교적 냄새를 풍기지 않는 진정한 기독교 가정이어야 하고, 우리의 교회는 교회의 교육을 잘 감당하는 교육적인 교회여야만 하며, 우리가 관련하는 학교는 참된 기독교 학교여야만 한다. 이 세 가지 교육의 장이 제대로 존재하고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토대는 기독교 공동체의 언약적 예식인 유아 세례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참된 교육의 토대는 유아 세례이다. 그러므로 유아 세례야말로 개혁 교회의 교육적 사역의 근본적 토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유아 세례를 항상 중시하고 존중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유아 세례를 참으로 존중하는 방식은 유아 세례 받은 아이들에 대한 우리의 교육을 제대로 감당하는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런 의미의 기독교 교육에 힘쓰는 이들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