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로이드 존스

복음전도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시작하는 바울 / 로이드 존스

새벽지기1 2016. 7. 8. 15:28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개념은 구약의 종족 신의 잔재나 유물에 불과하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구약의 여호와는 무서운 존재요, ‘피에 굶주린 신’, ‘성난 신’이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한 신은 부족적인 신이요, 우리 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에 관해서 가르치고 하나님의 부성애에 대한 전체 개념을 가르치는 예수님의 교훈과 그 하나님의 진노의 개념은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바울이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 뒤에도 여전히 그것을 떨쳐내지 못해서 이 진노의 개념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바울과 주 예수 그리스도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그들은 구약이 참된 계시가 아니라면서 자기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아버지, 오직 사랑만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한다.

 

또 하나님의 진노의 문제에 대해서 어려움을 겪는 복음적인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성경에 그 말이 나타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인다. 이론적으로는 받아들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부정한다. 그들은 말한다. “하나님의 진노를 먼저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맨먼저 말하면 사람들이 와서 당신의 설교를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젊은 사람들은 그것을 들으면 멀리 달아날 것입니다.” “백년 전에는 그것이 통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지금은 안됩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매력적인 것이 되게 해야지요.”

 

이 문제를 직면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셔야 한다. “아,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진노”라고 말하고는 다음 요점으로 나아가고, 또 다음 구절로 얼른 나아가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문제는 실제로 우리가 이 교훈을 받아들이고 있느냐? 우리가 그 교훈에 의해서 통제를 받고 있느냐? 이론 뿐만 아니라 실제 영역에 있어서 그것이 우리를 주관하시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 교리를 실제에 있어서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의 친구나, 돕는 자나, 불쌍히 여기는 자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자나, 사람들과 함께 계실 자로 소개한다. 그 모든 것도 절대적으로 다 진리이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출발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지 않다. 바울은 그런 식으로 먼저 출발하지않는다. 이 위대한 사도는 그 하나님의 진노부터 먼저 출발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우리가 복음을 믿지만 인간 지혜와 인간의 전략적인 차원에서 즉각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비극은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성령의 권능을 믿지 않는다는데 있다. 바울은 모든 것을 성령의 권능에 다 맡겼다. 바울이 아니라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경고하실 것이다. 그것이 바로 능력이 되는 복음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든지, 어떻게 행하든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진리를 전하는 것이다. 그 적용은 성령께서 하신다.

 

사도 바울은 이 로마서에서만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개념을 열 번이나 거듭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시는가? 첫 번째 경우가 1;18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두 번째 경우는 2:5이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다시 8절에,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노와 분으로’. 그는 얼마나 그 진노의 개념을 자주 반복하는가!

 

그 다음은 3:5이다.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흠정역은 “보수하시는 하나님”라고 했는데 잘못된 번역이다. 다음의 경우는 4:15이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5:9이다.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9:22이다.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벌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12:9이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네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13:4이다.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끝으로 13:5이다.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은 주도적인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좇아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거대한 개념의 차원에서가 아니고는 복음을 생각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바울 서신들을 다 훑어보더라도 이 개념은 어느 곳에서나 발견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고전 3장에서 “모든 사람의 공력이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고전 11장에서 성찬식에 관해서 말하면서 병든 사람도 많이 있고 심지어 ‘잠든’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말한다.(이하 생략)

 

-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7권, pp 402-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