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승구교수

이단 문제에 대한 칼빈 신학의 의의(2) / 이승구 교수

새벽지기1 2016. 7. 6. 14:22


5. 교회론적 이단들

1) 화체설과 ‘피 없는 제사론’의 이단성
칼빈은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을 길게 논박하고 있다. 54) 또한 이런 화체설에서 나오는 성물 숭배도 강하게 비판한다. 이 때 칼빈은 재미있는 주장을 하니, 그것은 곧 주님의 명령은 “성찬물을 숭배하지 말고 받아서 먹고 마시라는” 것이었다고 하며, 사도들은 “엎드려 성찬물을 숭배하지 않고 기대어 앉아서 그것을 받아먹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55) 그러니 이런 모범에 반하는 성물 숭배는 미신이요 우상 숭배라고 칼빈은 강하게 주장하며 비판하는 것이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선물을 주신 분은 저버리고 선물 자체를 경배하는 이것이 우상숭배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우상숭배란 말인가?” 56)

칼빈은 피터 롬바르드의 이른 바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성물이요 본질이며, 그의 신비한 몸은 본질이며 성물이 아니다”라는 말과 “그리스도의 몸은 상징으로 나타나며, 상징 속에 포함되는 본질이며, 그의 신비한 몸은 상징으로 나타나지만 상징 속에 포함되지는 않는다”는 말에 대해 57) “그리스도 몸과 거기서 나오는바 영향을 주는 효과를 서로 구분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한다”고 하면서 “그러나 그 몸이 마치 성물인 것처럼 보며, 심지어 떡 속에 포함되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유류인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58) 이런 생각 때문에 천주교 사상에서는 “심지어 그리스도와 완전히 괴리된 상태에 있는 불경한 자들과 악인들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고 정확하게 지적한다. 59) 칼빈의 영적 임재설을 따라 생각하면 이와는 다르게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들은 … 그리스도의 몸을 먹을 수가 없다.” 60)

결국 칼빈은 천주교회의 미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강하게 비판한다:

“마귀가 그것을 [성찬의 순수함을] 흐리게 하고 왜곡시킬 뿐만 아니라 그것을 완전히 지워버려서 인류의 기억에서 사라지도록 하기 위하여 한 가지 표징을 만들어냈다는 데에서 그 끔찍스러운 가증함이 절정에 달했다. 마귀가 가장 지독한 한 가지 오류를 만들어 내어 거의 온 세상 전체의 눈을 멀게 했으니, 곧 미사(the Mass)가 죄 사함을 얻게 해주는 희생 제물이요 제사라는 믿음을 조장해 낸 것이 바로 그것이다.” 61)

이 구절만큼 천주교회의 미사 이해를 정확하게 드러내며 정곡을 찔러 비판하고 있는 것은 없다. 그것을 마귀가 만들어 냈다고 했으니 칼빈은 이런 일을 하는 천주교회를 이단이라고 보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는 미사를 제사라고 여기는 사상은 “로마의 그 적그리스도와 그 휘하의 선지자들이 온 세계에 가득 퍼뜨려 놓은 사상”이라고 언급하면서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62)

첫째로, 칼빈은 천주교회의 “사제”(priest)라는 용어를 비판한다. 그들은 부사제도 될 수 없으니 “죽음으로 방해받지 않으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한 제사장이시오, 그에게는 보좌하는 자가 필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63) “모든 제사장직은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된 것이다.” 64) 그래서 칼빈은 다음 같은 수사 의문문으로 묻기도 한다: “그들의 사제직을 뒷받침해 주는 성경적 근거가 하나도 없으니, 사제가 없이는 드릴 수 없다는 그들의 제사 역시 사라질 것이 아닌가?” 65) “이 불경한 자들이 대체 얼마나 뻔뻔하기에 감히 스스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제사장들(사제들)이라 칭한단 말인가?” 66)

칼빈은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인용한 후에 천주교도들은 “온 교회에게 주어진 것을 스스로 자기들에게만 적용시키며 모든 신자들로부터 빼앗은 칭호를 뻔뻔스럽게 자랑하니, 그야말로 불경스러운 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67) 그러므로 “스스로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사제라 부르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해치는 자들이라는 것을 틀림없는 사실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라고 칼빈은 단언한다. 68)

둘째로, 칼빈은 천주교회의 “제단”을 비판한다: “제단이 세워지면 곧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69) 그러므로 제단을 세워 피 없는 제사를 드리는 미사 행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을 은폐하고 매장시키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70)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똑 같은 하나의 제사를 자주 반복하는 것이라고” 하거나 “적용하는 것”이라고 하는 71) 천주교회의 미사는 “그리스도를 현저하게 모욕하며, 그의 십자가를 파묻고 짓누르며, 그의 죽으심을 망각하게 만들며,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는 은혜를 소멸시키며, 그의 죽으심을 기념하도록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성찬을 약화시키고 파괴시킨다”고 칼빈은 비판하는 것이다. 72)

왜냐하면 구약의 속죄와 화목의 제사들의 실현인 “참된 제사는 오직 한번 시행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신 그 한 번의 제사의 효과와 효능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73) 또한 “사도는 이 문제를 논하면서, 다른 제사가 있을 수 없으며, 이 그리스도의 제사는 단 한번만 드려진 것이요 절대로 반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74) 그러니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린 온전한 영원한 제사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제사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사는 불완전하고 연약하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고 칼빈은 강하게 묻는다. 75) 그래서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제물이시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오직 단 한 번의 제사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거기에 덧붙여야만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게 되는 것이다.”는 것을 강조하여 말한다. 76)

셋째로, 칼빈은 본격적으로 말하기를 “각 미사마다 새로이 죄사함과 새로이 의를 얻을 것을 약속하니” 결국 미사는 “그리스도의 참되고 유일무이한 죽으심을 제거해 버리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제거해 버리는” 역할을 한다고 비판한다. 77)

넷째로, 이와 유사하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얻으신 구속에 근거해서 미사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는 다고 하는 미사 이론은 결국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인정하지 않거나 생각하지 않도록 만듦으로 그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는 은택을 제거하여 버린다”고 비판한다. 78)

다섯째로, 칼빈은 사적인 미사(a private mass)는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신자들에게서 분리시키는 것이며 십자가로 이루신 연합을 “와해시키고 찢어 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79)

그러므로 “미사는 거기에 뒤따르는 부속물들을 다 제거하고 가장 순결한 상태로 그것을 취한다 할지라도, 밑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온갖 종류의 불경과 신성 모독과 우상 숭배와 참람함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이 칼빈의 판단이다. 80)

정리하면서 미사 문제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잘 드러내는 한 구절을 더 인용해 보도록 하겠다:

“…희생물을 드리는 제단이 아니라 함께 먹는 식탁을 주셨고, 제사장들을 구별하여 세워서 제사를 드리게 하신 것이 아니라 사역자들을 세우셔서 그 신성한 잔치를 나누어 주도록 하신 것이다. 그 신비가 높고 거룩할수록 더욱더 경건한 자세로 그것을 대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온갖 인간적인 상상과 추측들을 내어 버리고 오로지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굳게 붙드는 것처럼 안전한 것은 없다.” 81)

바로 이런 이해에 근거해서 후대 개혁파에서는 제단(alter)에서 성찬상(table)으로, 사제(priest)에서 목사(minister)라는 용어로의 전환이 명확하고 분명히 나타나게 된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머리됨을 대신하는 자(vicar)를 생각하는 일의 이단성
칼빈은 천주교회가 교황이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주장하며, 그렇기에 그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온 교회를 관장한다고 주장함을 잘 알고 있다. 82) 그러나 “한 사람을 보편 교회 위에 세우려는 그들의 처사는 그리스도께 큰 해를 끼는 것이다”는 83) 것을 칼빈은 성경과 교부들의 글을 들어 길게 논의한다. “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께서 그런 사람을 지명하셨다는 기록이 없으며, 오히려 여러 구절들에서 사실상 그런 논리를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엡 1:22, 4:15, 5:23; 골 1:18, 2:10).” 84) 더 구체적으로, “바울은 사역자들 가운데 일인통치를 제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기까지 한다.” 85) 또한 교부들은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몰랐다는 것을 잘 논의하며, 86) 다음 같은 키프리안과 어거스틴의 말을 길게 인용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한 사람을 통해서 열쇠를 모든 이들에게 주셔서, 모든 이들이 하나라는 사실을 드러내게 하셨다. 그 나머지 사도들도 베드로와 똑 같이 동일한 존귀와 권세를 동등하게 받은 것이다. 하나 됨에서부터 시작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임을 드러나도록 하신 것이다.” 87)
“만일 교회라는 비밀이 베드로 안에 없었더라면, 주께서는 그에게 ‘네가 열쇠를 주리니’(마 16:19)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만일에 그 말씀이 오직 베드로에게만 하신 말씀이라면 교회가 그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가 열쇠를 가지고 있다면, 그 열쇠를 받은 베드로는 온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88)

로마 교황제의 기원과 성당의 역사적 문제점을 길게 논의한 89) 후에 칼빈은 이에 대한 “그들의 주장들은 모두가 거짓이라는 것이 이미 분명히 드러났다”고 한다. 90) 그들이 보이는 것은 “무서운 배교”일 뿐이고, 91) 교황은 “맹렬한 힘으로 복음을 핍박함으로써 스스로 적그리스도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람”이라고 한다. 92) 그러므로 칼빈은 “교황 제도 그 자체가 교회의 질서와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93)

3) 상을 만들어 예배하는 것의 문제점
칼빈은 또한 상을 만들어 예배에 사용하는 천주교회는 잘못을 범하는 것임을 아주 분명히 하면서 “그들은 과연 자기들이 그 옛날의 우상숭배자들과 전연 다르다는 것을 한번 증명해보기를 바란다”고 단언한다. 94) 특히 구약 시대의 상 숭배를 언급한 후에 16세기 천주교회에서의 관행을 생각하면서 칼빈은 이렇게 탄식한다: “오늘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인정받기를 원하면서도 날마다 나무와 돌을 세워놓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하는 자들이 많이 있는데, 바로 그런 행위들을 과거에 유대인들이 행하였던 것이다.” 95)

그러나 이런 것들은 천주교에서 이야기하듯이 ‘봉사’(δυλεία)이지 ‘예배’(λατρεία)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모순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 참된 예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96) 이렇게 된 원인을 칼빈은 교회 안에 교리가 순수하지 못하게 된 것에서 찾고 있다: “우선 우리가 고대 교회의 권위에 조금이라도 무게를 둔다면, 참된 신앙이 번성하고 교리의 순전함을 갈구했던 500여 년 동안에는 예배당 안에 일반적으로 형상물이 전혀 없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역의 수수성이 다소 쇠퇴하면서 예배당들을 장식하기 위한 상들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97)

4) 천주교회에서 계속 지켜지고 있는 것들의 문제점
천주교회에서 계속 지켜지고 있는 것들을 “사순절 등의 부패한 제도들”이라고 언급함으로써 98) 칼빈은 성경에 근거가 없는 것을 다 혹독하게 비판하면서 제거하려고 하는 것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는 “이그나티우스의 이름 아래 제시되어 온 그 어처구니없는 제도들처럼 역겨운 것은 없을 것이다”라고 강하게 말한다. 99)

이상과 같은 것을 종합 해 볼 때 칼빈은 천주교회를 교회가 아니라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칼빈은 “그들에게 교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그들에게는 불경건의 학교와 온갖 종류의 오류가 가득한 소굴이 있을 뿐이다”고 단언한다. 100) 한 곳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로마교회주의자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의 철천지 원수들이면서도 오늘날 교회라는 이름을 갖고서 무식한 대중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공포를 조장하고 있다.” 101) 칼빈은 물론 그들에게 세례가 유지되는 등 “교회의 흔적은 남아 있도록” 하셨다는 것은 말한다. 102)

그러므로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4권 2장 마지막 부분에서 하고 있는 말이 칼빈의 태도를 대변할 것이다: “주께서 그들 속에 자기 백성의 남은 자들을-그들이 아무리 환란을 당하고 이리저리 흩어져 있을지라도-놀랍게 보존하고 게시다는 면에서는 … 그들을 교회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이 논의에서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할 그런 표지들이 그들에게서 지워져 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회중 개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교회의 적법한 형태가 없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103) 천주교회의 주장들을 논하면서 칼빈은 한 곳에서 “사단의 수족들은 의례 성경을 조롱하는 습관이 있으니 그런 자들이 이에 대해서 (잔을 금하는 것에 대해서) 거짓 주장을 늘어놓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104) 이는 칼빈이 천주교회를 어떻게 평가 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5) 도나티스트 이단(the Donatists)
칼빈은 또한 순결하고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다가 지나치게 나아가 “자기들이 벌써 일종의 영적인 존재들이 된 것처럼 자기들 스스로 완전한 거룩성을 지니고 있다는 거짓된 확신에 젖어서, 인간성의 잔재가 드러나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는 자들” 가운데 하나로 카타리파(the Cathari)와 도나티스파(the Donatists)를 지적하며 비판하고 있다. 105) 이런 도나티스트들의 주장에 반해서 칼빈은 어거스틴의 다음 같은 권면을 동감하며 소개하고 있다: “할 수 있는 만큼 긍휼로 교정시켜 주며, 그들로서 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인내로 견디며, 사랑으로 아파하고 슬퍼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교정시켜 주실 때까지, 아니면 마지막 추수 때에 가라지를 뽑으시고 쭉정이를 날려버리시기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마 13:40, 3:12; 눅 3:17).” 106)

그러므로 칼빈과 개혁자들은 도나티스트 같은 분리주의자들은 아닌 것이다. 칼빈은 천주교회와 관련해서는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들에게서 분리하는 일이 불가피했다는 것으로 충분한 사유가 된다”고 말한다. 107) 칼빈 등의 개혁자들이 천주교회로부터나뉘어진 것으로 그들이 분리주의자라고 할 수 없으니 그들이 자신들과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칼빈은 여러 곳에서 지적하기 때문이다. 108)

6) 일부 재세례파적 교회론의 문제점
칼빈은 곳곳에서 일부 재세례파 사람들이 이전의 노바티아누스파 사람들과 비슷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례를 받을 때에 순결하고 천사와 같고, 육체의 더러움에 전혀 물들지 않은 새로운 삶 속으로 거듭나는 것처럼 주장하면서, 세례를 받은 후에 누군가가 타락하여 떨어져 나가면 이들은 그 사람을 오로지 하나님의 무자비한 심판에 맡겨 버리는 것이다”고 하면서 이런 지나치게 강직한 입장이 노바티아누스 이단과 똑 같은 환상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109) 잘못 범죄하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용서받고 돌아올 수 있는 희망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교회 역사에 있어서 명백한 이단으로 규정된 것들을 칼빈도 이단이라고 생각하며 그와 같은 가르침이 교회 안에 있지 않도록 하는 일에 칼빈은 전심전력하였다. 더 나아가서 칼빈은 자신의 시대의 일부 사람들이 드러내고 있는 이단성을 분명히 드러내어 지적하는 것에 더 많은 지면과 시간을 할애 하고 있다. 칼빈의 수많은 주석과 글들, 그리고 설교들이 성경적 사상을 교회 안에 분명히 드러내어 이와 같은 비성경적 사상과 실천들이 교회 안에 있지 않도록 하는 일을 목표로 하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단에 대한 칼빈 자신의 입장은 매우 단호하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신자들의 일치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사악한 자들의 무리가 있을 뿐이다.” 110)

II. 예언 문제에 대한 칼빈의 견해

이제 이와 같이 기본적 이단들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정리한 터 위에서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이단 운동의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 이 절에서는 칼빈이 성경 이외의 계시, 즉 사적 계시를 말하는 이들에 대해서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지의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칼빈은 에베소서 4:11의 말씀에 근거하여 사도들, 선지자들, 복음 전하는 자들을 “주께서 그의 나라의 시작 때에 일으키셨다고” 하고, “이들이 없으면 교회가 절대로 진전해 갈 수 없는” 목사와 교사를 “교회에 항상 있는 일상적 직분”이라고 한다는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다. 111) 칼빈은 이와 같은 평상 직분, 즉 교회 안에 계속 있도록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직분으로 목사인 교훈 장로 외에 치리 장로와 집사를 성경으로부터 찾아 언급하고 있다. 112) 그는 이 직분들이 천주교회적 모순을 벗어 버리고 온전히 회복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113) 그런데 칼빈이 일시적인 직분들로 언급하는 사도들, 선지자들, 그리고 복음전하는 자들에 대해서 칼빈은 “시대의 요청에 따라서 이따금씩 다시 일으키시는 것이다.”고 말하여, 114) 신사도 운동을 하시는 분들과 같은 분들이 자신들의 사역의 근거로 할 만한 표현이 나타나고 있으므로 칼빈이 이렇게 말한 의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칼빈은 “사도들”은 온 땅에 나가 복음을 전하여 “처음 교회를 세우는 자들로서 그 기초를 온 세상에 세운 자들”이라고 한다. 115) “선지자”라는 명칭은 “특별한 계시에 뛰어난 자들을 지칭한다”고 한다. “복음 전하는 자들”은 사도들을 대리하여 기능을 발휘한 자들인데, 이들은 교회에 영구히 존재하는 것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고, 신약 교회의 초석을 놓은 창설 직원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뒤에 칼빈은 “오늘날 이 시대의 경우처럼 주께서 그 후의 시대에도 사도들을, 아니면 그들을 대신하는 복음 전하는 자들을 때때로 일으키셨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기에 116)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칼빈의 이런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되니, 이는 과거 사도나 선지자들처럼 새로운 계시를 전달하는 이들을 주께서 세우신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맥에서 칼빈은 루터나 부쳐 같은 개혁자들을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우신 복음 전하는 자들로 생각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첫째로, 이 말을 한 바로 뒤에 칼빈은 “적그리스도의 반역으로부터 교회를 돌이키도록 인도할 그런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때 칼빈은 초기 개혁자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둘째로, 칼빈은 “정상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교회들에는 그 직분이 취할 자리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117) 그러므로 칼빈은 정상적인 교회 안에 계속해서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이나 복음 전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셋째로, 칼빈은 사도들과 그 이후의 사역자들의 차이를 아주 명확히 하고 있다. 그 본질적 차이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도들은 확실하고도 순전한 성령의 서기관들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글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외의 사람들의 유일한 임무는, 성경 안에 있고 인쳐져 있는 것을 가르치는 일이다.” 118) 그러므로 계시의 전달자들인 사도와는 달리 칼빈이 주께서 때때로 일으키실 수 있다고 말한 특별하고 비상한 사역자들을 포함하여 우리 시대의 모든 사역자들은 다 사도와 선지자들의 가르침인 성경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신실한 사역자들로서는 새로운 어떤 교리를 만들어 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복종하게 하신 그 가르침을[즉 성경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119)

다른 말로, 칼빈은 이렇게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반드시 유념해야 할 보편적 규범은 바로 이것이다. 곧, 하나님께서 새로운 가르침을 제시할 수 있는 자격을 사람들에게서 박탈하시고, 그리하여 그 홀로 신령한 교리를 가르치시는 우리의 스승이 되시도록 하신다는 것이다…이 규범은 개개인 신자에게는 물론 교회 전체에게도 똑 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120)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성경에 기록된 계시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라고 하면서 새로운 가르침을 베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칼빈에게는 매우 중요한 요점이었다. 어떤 점에서 이것이 어떤 이들이 참 교회 인가 아닌가를 보여 주는 큰 시금석의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충실한 참 교회는 “자기 스스로 지혜로워서도 안 되며, 자기 스스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서도 안 되며, 오직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그치신 곳에서 자기 자신의 지혜도 멈추도록 그 한계점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121) 그러하기에 “주께서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조명하셔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다른 무엇을 행하시는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122) 이와 관련하여 칼빈은 크리소스톰의 이름으로 쓰여진 한 저작으로부터 다음 같은 말을 동감하면서 인용하여 제시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대해서 자랑하지만, 자기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자들은 거짓으로 성령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스스로 말씀하지 않고(요 12:49; 14:10), 율법과 선지자에 근거하여 말씀한다고(요 12:50) 증언하셨으니, 성령의 이름을 빙자하여 전해지는 것 가운데서 복음에서 떠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믿지 말도록 합시다. 그리스도께서 율법과 선지자의 마침이 되시듯이(참조. 롬 10:4), 성령께서는 복음의 마침이신 것입니다.” 123)

그러므로 칼빈에게는 성경에 주어진 것 외에 그 누구라도 그 어떤 것도 덧붙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 큰 날이 밝아 오기까지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바라고 찾고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이 세대를 가리켜 성경이 ‘마지막 때’(요일 2:18), ‘모든 날 마지막’(히 1:2), ‘말세’(벧전 1:20)라고 부르며, 어떤 새로운 가르침이나 계시에 대하여 헛되이 기대함으로 속는 사람이 없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124) 이에 따라서 칼빈은 그렇게 새로운 계시를 말하는 것은 모두 정죄 받아 마땅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칼빈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거룩한 가르침에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과 생각과 혀를 온전히 고정시켜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이것이야 말로 최고의 스승이신 성령님의 학교이며, 이 학교에서 우리는 다른 곳에서 무엇을 얻을 필요가 없이 전진하며, 거기서 가르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기꺼이 알지 않으리라는 자세를 가져야 마땅한 것이다.”고 말한다. 125)

이와 같이 에베소서 주석과 기독교 강요에서는 신약 시대의 선지자들을 생각하면서 성경이 완성된 이제는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는 있지 않다고 단언하는 칼빈은 고린도전서 주석에서는 본문에 언급된 “예언하는 일”을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예언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것을 생각하면서 논의한다. 즉 칼빈은 고린도전서에서 언급된 예언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선지자들, 즉 “미래의 일을 말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성경을 다루는 독특한 은사를 부여 받은 사람들, 즉 성경을 잘 해석할 뿐만 아니라 지혜로 성경의 가르침을 이 시대에 적절하게 적용하여 주는 은사를 가진 분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126)

칼빈이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첫째로, 이 본문에서 바울이 예언하는 일을 교회 안에서 교회를 세우는 데 가장 큰 원천이 되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미래에 되어질 일을 미리 언급하는데 적용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127)

둘째로는 바울이 선지자의 사역을 규정하여 제시할 때 그는 권면하고 격려하고 가르치라고 하고 있는데
이런 일들은 미래 일을 예언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이유로 칼빈은 이 맥락에서 선지자들은 ① 성경을 잘 해석하는 사람들이며, ② 교회의 직접적 필요를 파악할 수 있는 놀라운 지혜와 재능을 부여 받아 그 상황에 적실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분들은 하나님께서 전하기 원하시는 소식을 전하는 사신들(messengers)인 것이라고 한다. 즉, 여기서 선지자들은 “성경의 예언들, 위협들, 약속들, 그리고 모든 교훈들을 교회의 현재적 필요에 적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경험과 기술이 많은 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Comm. I Cor. 12:28 [271]). 이와 같이 고린도전서에 언급된 선지자는 “계시의 해석자요 계시의 사역자이다.”라고 칼빈은 보는 것이다. 128) 우리나라에서는 박윤선 목사님이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같은 방향에서 해석하셨다.

그러므로 덕을 세우는 데 유용한 말을 한다는 것은 교회를 따라서 각각의 성원들을 “세우는 데 적당한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라고 한다(Comm. I Cor. 14:3 [286]). 다시 말하지만, 칼빈은 이 맥락에서 예언한다는 말을 “앞일을 미리 말하는 은사”로 보지 않고(not the gift of foretelling) “우리를 종교적으로 훈련하는 것, 우리를 가르쳐서 신앙에로, 하나님 경외와 예배에로, 거룩과 의의 책임에로 이끌어 가는 가르침을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Comm. I Cor. 14:3 [286]). 구약과 신약 초기의 선지자들과 고린도전서에 언급된 이 은사를 받은 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칼빈은 이 어귀에 대한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Comm. I Cor. 12:28 [271]). 그러므로 고린도서에서 언급된 선지자들에 대한 해석이 어떠하든지 간에, 칼빈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예언 사역이 교회 공동체 안에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칼빈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가 살던 시대에도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은 이런 자들이 성경이 말하는 선지자들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이들은 악한 영에 의해 지도함을 받는 광신자들이라고 하며(Comm. I Cor. 12:27 [270]), 신령주의자들(spiritualists)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실질적으로 교회를 통치하시는 성령님께 불순종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가지 않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이들은 교회를 어지럽히며 혼란 가운데 있도록 하는 이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나 에베소서 주석에서나 고린도전서 주석에서도 그 어떤 예언사역과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다. <계속>


각주

54) Calvin Institutes, 4. 17. 13-17.
55) Calvin Institutes, 4. 17. 35.
56) Calvin Institutes, 4. 17. 36.
57) Lombard, Sentences, 4. 8. 4; 4, 9. 2, cited in Calvin Institutes, 4. 17. 33.


58) Calvin Institutes, 4. 17. 33.
59) Calvin Institutes, 4. 17. 33.
60) Calvin Institutes, 4. 17. 33. 바로 이런 뜻에서 칼빈은 “믿음으로 맛보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을 수가 없다”고 한다(Calvin Institutes, 4. 17. 33).
61) Calvin Institutes, 4. 18. 1.
62) Calvin Institutes, 4. 18. 1.
63) Calvin Institutes, 4. 18. 2.
64) Calvin Institutes, 4. 19. 30.
65) Calvin Institutes, 4. 18. 9.
66) Calvin Institutes, 4. 18. 14. 또한 Calvin Institutes, 4. 19. 28도 보라.
67) Calvin Institutes, 4. 19. 25.
68) Calvin Institutes, 4. 19. 28.
69) Calvin Institutes, 4. 18. 3.
70) Calvin Institutes, 4. 18. 3.

71) Calvin Institutes, 4. 18. 3.
72) Calvin Institutes, 4. 18. 1.
73) Calvin Institutes, 4. 18. 13.
74) Calvin Institutes, 4. 18. 3.
75) Calvin Institutes, 4. 18. 3.
76) Calvin Institutes, 4. 18. 6.
77) Calvin Institutes, 4. 18. 5.
78) Calvin Institutes, 4. 18. 6.
79) Calvin Institutes, 4. 18. 7.
80) Calvin Institutes, 4. 18. 18.
81) Calvin Institutes, 4. 18. 12.
82) Calvin Institutes, 4. 6. 1.
83) Calvin Institutes, 4. 6. 9.
84) Calvin Institutes, 4. 6. 9.
85) Calvin Institutes, 4. 6. 10.
86) Calvin Institutes, 4. 1. 17.
87) Cyprian, on the Unity of the Catholic Church, 4, cited in Calvin Institutes, 4. 6. 4.
88) Augustine, John's Gospel, 1. 12, 11:5, cited in Calvin Institutes, 4. 6. 4.
89) Calvin Institutes, 4. 7. 1-30.
90) Calvin Institutes, 4. 7. 23.

91) Calvin Institutes, 4. 7. 24.
92) Calvin Institutes, 4. 7. 24.
93) Calvin Institutes, 4. 7. 26.
94) Calvin Institutes, 1. 11. 11.
95) Calvin Institutes, 1. 11. 10.
96) Calvin Institutes, 1. 11. 11.
97) Calvin Institutes, 1. 11. 13.
98) Calvin, Institutes 1. 13. 29. 특히 Calvin Institutes, 4. 12. 20을 보라.
99) Calvin, Institutes 1. 13. 29.
100) Calvin Institutes, 4. 2. 10.
101) Calvin Institutes, 4. 2. 4.
102) Calvin Institutes, 4. 2. 11.
103) Calvin Institutes, 4. 2. 12.
104) Calvin Institutes, 4. 17. 48.
105) Calvin Institutes, 4. 1. 13. 또한 Calvin Institutes, 4. 8. 12; Calvin Institutes, 4. 19. 11도 보라.
106) Augustine, Against the Letters of Parmenianus, 3. 2. 15, cited in Calvin Institutes, 4. 1. 16.
107) Calvin Institutes, 4. 2. 4.
108) 이는 “분리주의자들은 동일한 믿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교제의 끈을 깨뜨리는 자들”이라는 어거스틴의 말을 칼빈이 인용하고 있는 것에(Augustine, Questions on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11. 1-2, cited in Calvin Institutes, 4. 2. 5) 근거해서 하는 말이다.
109) Calvin Institutes, 4. 1. 23.
110) Calvin Institutes, 4. 2. 5.

111) Calvin Institutes, 4. 3. 4, 강조점은 주어진 것임.
112) 다스리는 장로[治理長老]에 대해서는 Calvin Institutes, 4. 3. 8을 그리고 집사에 대해서는 Calvin Institutes, 4. 3. 9를 보라.
113) Calvin Institutes, 4. 19. 28; 4. 19. 32.
114) Calvin Institutes, 4. 3. 4.
115) Calvin Institutes, 4. 3. 4.
116) Calvin Institutes, 4. 3. 4.
117) Calvin Institutes, 4. 3. 4.
118) Calvin Institutes, 4. 8. 9, 강조점은 덧붙인 것임.
119) Calvin Institutes, 4. 8. 9, 강조점은 덧붙인 것임.
120) Calvin Institutes, 4. 8. 9.
121) Calvin Institutes, 4. 8. 12.
122) Calvin Institutes, 4. 8. 12, 강조점은 주어진 것임.
123) Pseudo-Chrysostom, Sermo de Sancto Spiritu, 10, cited in Calvin Institutes, 4. 8. 12.
124) Calvin Institutes, 4. 18. 20, 강조점은 주어진 것임.
125) Calvin Institutes, 4. 17. 36.
126) John Calvin, The First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Corinthians, Calvin's Commentaries, trans. John W. Fraser, eds., David W. Torrance and Thomas F. Torrance (Edinburgh: Oliver and Boyd, 1960; reprint, Grand Rapids: Eerdmans, 1976), 271. 이하 이 책으로부터의 인용은 칼빈학계의 관례에 따라서 Comm. I Cor. 12:28 (271)로 약하여 제시하기로 한다. ( ) 안은 1960년 영역판을 어드만 출판사에서 재판하여 낸 판의 면수이다.
127) Calvin, Comm. I Cor. 12:28 (271).
128) Calvin, Comm. I Cor. 14:6 (288): "So a prophet will be the interpreter and minister of reve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