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승구교수

이단 문제에 대한 칼빈 신학의 의의(3) / 이승구 교수

새벽지기1 2016. 7. 7. 20:53


III.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칼빈의 이해

타락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어떤 선한 것도 칭찬할 만한 것도 낼 수 없다는 것이 칼빈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서 그 어떤 선한 것이나 칭찬할만한 것이 나온다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에게서만 나오는 것이다. 129) 성령의 역사하심과 은사에 대한 칼빈의 생각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은 이런 입장에서 “성령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계시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130)

칼빈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가장 강하게 강조한 분들 가운데 하나이다. 워필드가 잘 언급한 대로 칼빈은 “성령의 신학자”였던 것이다. 131) 하나님 백성들이 행하는 모든 것에서 나오는 모든 선한 결과들은 모두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주신 것이 아니면 우리에게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를 잊어버리고서 자신들에게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자신들이 무엇인가를 하는 것처럼 생각하며 행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 칼빈은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사들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오류를 교정하려고 한다고 한다. 즉, “사랑에 대해 별 고려가 없든지 전혀 생각이 없이 과시와 겉치장으로 은사를 사용하는” 것이 바로 그런 문제요 교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132)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영적 은사들을 주신 이유는 “교회가 그로부터 유익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Comm. I Cor. 12:7 [261]), 서로의 유익을 위해 그들이 서로를 돕도록(Comm. I Cor. 12:12 [264]), 좀 더 구체적으로는 “형제들을 세우기(the upbuilding of their brothers) 위한 것”(Comm. I Cor. 12:4 [260]), 즉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Comm. I Cor. 12:27 [270]). 133)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이와 같은 교회를 위한 다양한 은사들의 예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지혜의 말씀, 이를 칼빈은 “거룩한 것들에 대한 철저한 파악”(a through-going grasp of holy things)과 “가장 비밀스럽고 높은 성격의 것들에 대한 통찰을 포함하는 것”(including an insight, by their unveiling, into things of a more secret and lofty nature)으로 해석한다(Comm. I Cor. 12:8 [262]).
② 지식의 말씀. 이를 칼빈은 “거룩한 것들에 대한 이해”(an understanding of holy things)로 해석한다(Comm. I Cor. 12:8 [262]).
③ 믿음, 이를 칼빈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보기 보다는 이적이 수행되는 것을 믿는 믿음, 즉 이적 신앙으로 해석한다. 가룟 유다도 이런 믿음을 가진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Comm. I Cor. 12:9 [262]).
④ 신유의 은사들(gifts of healing), 이는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134) 칼빈은 “치유의 은사들은 나머지 이적들과 마찬가지로 주께서 일시적으로 베푸셨던 것들로서, 복음의 새로운 선포를 영원토록 놀랍게 만들기 위하여 지금은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135)
⑤ 기적들을 행함들(workings of miracles),
⑥ 예언함, 이에 대한 칼빈의 해석은 독특하니 그는 고린도 전서에서 말하는 선지자들이 성경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어 주는 독특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 즉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사자들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⑦ 영들을 분별함, 칼빈은 이를 그리스도의 참된 사역자들과 거짓 사역자들을 분별해 줄 수 있는 은사라고 본다(Comm. I Cor. 12:10 [263]).
⑧ 다양한 방언들(divers kinds of tongues)(고전 12:10, 28), 칼빈은 이를 여러 외국어에 대한 지식이 있어서 그 외국어들을 잘 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석한다. 136)
⑨ 방언들을 통역함(the interpretation of tongues), 칼빈은 이를 어떤 특정한 교회 공동체를 위해 외국어를 통역해주는 것으로 본다. 외국어를 많이 알아도 다른 특정한 지역의 언어를 못할 때는 통역자를 필요로 하며 그 통역자 역할을 하는 이들이 통역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Comm. I Cor. 12:10 [263], Comm. I Cor. 12:28 [272]).
⑩ 서로 돕는 은사(고전 12:28), 칼빈은 이를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고대 교회의 직분에 해당하는 은사이거나 가나한 자들을 돌아보는 집사의 사역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은 집사직에 대한 은사로 보는 것을 선호 한다고 말한다(Comm. I Cor. 12:28 [272]).
⑪ 다스리는 은사(고전 12:28), 칼빈은 이를 치리의 책임을 지는 장로들에게 주어진 은사라고 한다. 그러므로 교회에서의 “다스림은 무게와 경험과 권위가 다른 이들 보다 뛰어난 장로들에 의해서 수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Comm. I Cor. 12:10 [263], Comm. I Cor. 12:28 [272]).

우리나라에서 방언에 대한 오해가 특히 많기 때문에 여기서 칼빈의 방언 이해를 조금 더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칼빈은 성경이 말하는 방언들은(tongues) “외국어들”(foreign languages)이라고 단언한다. 137) 그래서 칼빈은 모든 언어가 다 “차별 없이 중요하고”, “복음을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할 때에 매우 중요하게 사용되는” 것이라고 한다(Comm. I Cor. 14:5 [287]). 이렇게 방언을 외국어로 보는 칼빈은 “방언으로 말하는 자는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말한다”(고전 14:2)는 구절의 뜻은 결국 그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는 뜻이므로 이는 (당시의 관용어적 표현으로 하자면) “자신에게 그리고 벽에 대고 설교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라고 해석한다(Comm. I Cor. 14:2 [286]). 따라서 “영으로 말한다”는 것도 칼빈은 나쁜 의미로 해석하여 제시하면서 “알 수 없게, 아무 효과도 내지 못하는, 수수께끼 같은 말들을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Comm. I Cor. 14:2 [286]).

방언으로 말하는 자는 “자기에게 덕을 세운다”(고전 14:4)는 말도 칼빈은 “자신에게 말한다”(he speaks to himself)는 뜻이든지(Comm. I Cor. 14:4 [286f.]), 바울이 “양보하는 방식으로 말하는”(by way of concession) 것이라고 본다.

핵심적 문제는 교회 공동체가 모여 있을 때는 자신을 추구하기 보다는 다른 이들을 위하고 모두를 위하려는 마음으로 모여야 하는데 같이 모여서도 자기를 드러내는 것만을 추구하는 그것이 문제라는 것이다(Comm. I Cor. 14:4 [287]). 도움을 주려는 열망이 없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또한 “방언으로 기도할 때 내 영으로 기도한다”는 말도(고전 14:14) 바울이 양보하는 식으로(by way of concession) 표현한 표현법이라고 칼빈은 해석한다. 즉, 당신의 영, 즉 당신에게 부여된 은사를 스스로 자랑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교회에 유용성이 없다면 그것이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다(Comm. I Cor. 14:14 [291]). 왜냐하면 영은(the spirit) 항상 이해(the understanding)와 함께 활동해야 하기 때문이다(Comm. I Cor. 14:14 [292]). “바울은 영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정신, 즉 이해 역시도 같이 기도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Comm. I Cor. 14:15 [292]).

이 문제에 대해서 칼빈과는 다른 해석을 한다고 해도 적어도 다음과 같은 칼빈의 말들은 모두가 유념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알 수 없는 말로 말하면 그는 교회의 교제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138) “모르는 사람들이 정상적인 말이 아니라 무의미한 소리를(a meaningless noise) 발하는 사람들을 보면 미쳤다고 하지 않겠는가?”(Comm. I Cor. 14:23 [297]) 그러므로 방언 문제에 대해서 칼빈과 다른 해석을 한다고 해도, 적어도 다음 같은 칼빈의 설명에는 동의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혼자 말하는 것을 구별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것은 금하는 것이다”(Comm. I Cor. 14:28 [301]).

치유나 능력 행함과 관련하여 안수하는 일이 많이 유행하는데, 이와 같이 안수하는 것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다음 과 같다: “만일 사도들이 그 당시에 행한 이 직무가 여전히 교회에 남아 있었다면 안수의 행위 역시 지켜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은혜를 주시는 일이 중지 되었으니 무슨 목적으로 안수를 행하겠는가?” 물론 이렇게 말할 때 칼빈이 성령님께서 오늘날 교회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성령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계시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안수를 행함으로써 베풀어졌던 이적적 권능과 놀라운 역사들은 이미 중단되었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런 일들을 중단 시키시면서도 그의 교회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그의 나라의 위대함과 그의 말씀의 위엄이 충분히 밝게 드러났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139)

칼빈이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이제 어떤 은사자들이나 교회 직분자의 안수 행위를 통해 치유하시는 일을 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통해서 “주님은 과연 어느 시대에나 자기 백성들과 함께 계시며, 옛날에 못지않게 필요한 때마다 그들의 연약함을 고쳐 주신다”는 것을 칼빈은 분명히 확언하고 있다. 140) 그러므로 어떤 이적적 은사가 더 이상 있지 않다고 하는 칼빈의 말을 이제 성령님께서 더 이상 이적을 베풀지 않으신다는 식으로 오해하거나 치부해 버리면 안 될 것이다. 많은 이들은 은사 중단론을 이와 같은 식으로 오해 하고 있으므로 심각한 것이다.

은사들에 대한 칼빈의 해석 가운데서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칼빈이 이 은사들이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거나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가룟 유다가 이적 신앙을 가졌었고, 실제로 여러 이적을 수행하였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구원에 참여 하지 못했다. 또한 고리도 전서 13장 앞부분에 대한 칼빈의 설명을 보며, 이런 은사들을 가지고 행한다고 해도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의 여러 방언들을 알고 말해도, 심지어 과장법적으로 말해서 천사의 방언을 말해도 141) 사랑이 없으면 그러하다는 것이다. 예언을 해도 그러하며, 이적을 일으킬 이적 신앙이 있어도 그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칼빈은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은사가 있다는 것, 따라서 초자연적 은사가 있다는 것이 그 사람이 반드시 구원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기본적으로 바울을 따라서 칼빈은 모든 진정한 은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마음대로 주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고린도전서와 로마서 주석에서 칼빈은 이점을 여러 번 강조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교회 전체를 위해서 교회 구성원들에게 하나님의 은사들을 나누어 주셨다는(distributing them among them) 것을 강조한다. 그 각각의 은사들은 교회 공동체를 섬기기 위한 것이다: 142) “하나님은 영은 이 은사들을 우리들 가운데 나누어주셨다. 그래서 우리들이 [교회의] 공동의 선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143)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서로에게 의존하게 우리를 엮으신다”는 것이다. 144) 바울에게서나 칼빈에게서나 은사(gifts)는 섬김(services)과 밀접히 연관되어 제시된다. 145) 그러므로 “각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들로 만족하고 그것을 최선을 다해 활용하도록” 하라고 한다(Comm. I Cor. 12:4 [260]).

이에 덧붙여서 칼빈은 아주 구체적으로 다음 같은 점을 강조한다: “그는[바울은] 다른 것[은사들을] 얻으려는 이기적 힘씀으로 자신들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146) 다른 말로 하자면, “각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것을 얻었는지를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의 성격을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과연 무엇에로 우리를 부르셨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Comm. I Cor. 12:4 [260]). 그리고 각자가 가진 그 모든 은사들은 결국 ‘모두의 세움’(健德, the edification of all)을 위해 있음을 알고 그렇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쓸데없고 헛된 일들에 집중하지 말고, 교회가 행하는 모든 일이 세움[健德, edification]을 위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147) 그리고 세움, 즉 건덕을 위해 행한다는 것의 의미를 칼빈은 다음 같이 제시한다: “은사를 부여 받은 모든 이들은 그것을 모두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려고 애써야 한다.” 148)

그러므로 성경과 이에 따르는 칼빈의 생각에 의하면 ① 자랑과 교만은 성령의 은사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다. 그 누구도 자충족적이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들은 없기 때문이다. 149) 그렇게 하는 이들은 자신을 교회 공동체로부터 떼어 내는 것이라고 칼빈은 생각한다. 또한 ② 신약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도 성령의 은사가 아닌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결국 신약 교회를 제대로 세우는 데 지장을 준 가룟 유다가 행한 이적들, 그 배후의 이적 신앙은 참된 은사가 아닌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원칙에서 벗어난 이들은 실질적으로는 “악한 영들에 의해 움직여지는 광신자들”이라고 칼빈은 언급한다. 150)

IV. 결론: 바르고 건강한 한국 교회를 지향하며

이상에서 우리는 이단들에 대한 칼빈의 이해를 살펴보면서 그가 고대 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사람들 뿐 아니라 종교 개혁 당시에 복음을 왜곡하여 반-펠라기우스주의를 주창하며, 잘못된 교회론을 제시하고 있는 천주교회와 소위 신령주의자들(spiritualists)의 심각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을 잘 볼 수 있었다. 더구나 성경 계시 이후에는 그리스도 재림 때까지 더 이상 다른 계시가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칼빈의 태도와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칼빈의 이해를 살펴 볼 때 오늘 우리 시대에 많은 이들이 성경 이외의 예언과 하나님의 음성을 이야기 하는 것에 대해서, 또한 소위 이적적 은사 운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 칼빈이 어떤 태도를 표명할 것인지를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이 자기 시대의 교회가 바르고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친 것과 같이 우리들이 섬기는 한국 교회가 바르고 건강하게 되려면 칼빈 자신이 그리한 바와 같이 성경의 가르침만을 중심으로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사용하셔서 역사하시는(cum verbo)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제대로 받아 나간다면 우리도 우리들의 교회를 바르고 건강하게 하는 일에 조그만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끝>

<각주>
129) Calvin, Comm. I Cor., 12:6 (261). 그리고 Calvin, Comm. I Cor. 12:8 (262)도 보라.
130) Calvin Institutes, 4. 19. 6.
131) B. B. Warfield, "John Calvin the Theologian," in Calvin and Augustine, ed. Samuel G. Craig (Philadelphia: P & R, 1956), 484f.
132) 또한 다음도 보라: Calvin, Comm. I Cor. 12:1 (258); Comm. I Cor. 12:7 (261); Comm. I Cor. 14:12 (290).
133) 또한 Calvin, Comm. I Cor. 12:31 (272f.); Comm. I Cor. 14:5 [288])도 보라.
134) Calvin, Comm. I Cor. 12:9 (262).
135) Calvin Institutes, 4. 19. 18.
136) Calvin, Comm. I Cor. 12:10 (263), Comm. I Cor. 12:28 (272); Comm. I Cor. 14:2 (286); Comm. I Cor. 14:5 (287); Comm. I Cor. 14:13 (291); Comm. I Cor. 14:16 (293); Comm. I Cor. 14:20 (396).
137) Calvin, Calvin, Comm. I Cor. 12:10 (263), Comm. I Cor. 12:28 (272); Comm. I Cor. 14:2 (286); Comm. I Cor. 14:5 (287); Comm. I Cor. 14:13 (291); Comm. I Cor. 14:16 (293); Comm. I Cor. 14:20 (296).
138) Calvin, Comm. I Cor. 14:1 (290): "… if anyone speaks in an unknown language he is not sharing in the fellowship of the Church, but is rather separated from it…."
139) Calvin Institutes, 4. 19. 7. 또한 Calvin, Comm. Mark 16:17도 보라.
140) Calvin Institutes, 4. 19. 19.

141) 그러므로 “천사의 말”을 칼빈은 “아주 놀랍고 보기 드문 어떤 것에 대한 과장법”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Comm. I Cor. 13:1 [274]]).
142) Calvin, Comm. I Cor. 12:4 (260); Comm. I Cor. 12:11 (263); Comm. I Cor. 12:27 (270).
143) Calvin, Comm. I Cor. 12:11 (263): “The Spirit of God … distributes these gifts among us, so that we may all make our contribution to the common good."
144) Calvin, Comm. I Cor. 12:11 (263): “… God binds us in dependence on each other…."
145) Calvin, Comm. I Cor. 12:5 (261); Comm. I Cor. 12:7 (261).
146) Calvin, Comm. I Cor. 12:4 (260): “He forbids them to overstep their own bounds by selfishly striving to get something else" (강조점은 필자가 덧붙인 것임). 또한 Calvin, Comm. I Cor. 12:12 (264): ” … not to trespass on other people's territory, for ambition, inquisitiveness or some other self-seeking motives drives many people into grasping more than is good for them")도 보라.
147) Calvin, Comm. I Cor. 14:26 (300).
148) Calvin, Comm. I Cor. 14:26 (300).
149) 이점에 대해서는 특히 Calvin, Comm. I Cor. 12:11 (263); 그리고 Comm. I Cor. 12:29 (272)을 보라.
150) Calvin, Comm. I Cor. 12:27 (270): "… fanatics, driven by an evil spir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