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적 영성
잊혀진 삼위일체
삼위일체가 잊혀져 가고 있다. 이는 영국교회 협의회가 펴낸 책의 주제이다. 이 책은 오늘날 교회에서 삼위일체가 삶과 동떨어진 사변적인 교리로 취급되고 있는 문제를 지적한다. 몰트만과 라너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입으로는 전통적인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하지만 실제 삶 속에서는 거의 단일신론자(monotheists)들처럼 살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근거 없는 말은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삼위이든, 이위이든, 아니면 일위이든 별 상관이 없는 것같이 살아간다. 만약 하나님이 삼위가 아니라 이위라면 형식적 신앙고백은 달라지겠지만 실제 삶에는 별 차이가 없을지 모른다.
오늘날 영성에 대한 가르침들이 삼위일체에 대한 기존의 무관심을 그대로 반영하는 오류를 답습하고 있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최근 영성에 대해 쓴 책들에는 삼위일체와 영성의 관련성에 대한 논의가 대부분 생략되었거나 아니면 아주 피상적으로 다루어졌을 뿐이다. 그 결과 한국 교회 내에 영성의 심각한 빈곤과 영성이해의 혼돈을 가져오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은 삼위일체의 신비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삼위일체적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삼위일체적 독특성이 기독교 영성을 다른 모든 영성과 가장 확실히 구별되게 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실용적인가?
이렇게 중요한 논의가 영성이해에 있어서 자주 무시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대개 삼위일체 교리를 실천전적인 면과 무관한 추상적인 이론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임마누엘 칸트는 이러한 생각을 잘 대변해 주었다. 칸트는 삼위일체 교리는 아무런 실천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삼위하나님을 섬기든 십위 하나님을 섬기든 전혀 차이가 없다. 그것은 “이 차이에서부터 실천적인 삶을 위한 어떤 다른 원리도 도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칸트에게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의 실용성이다. 이 면에서 현대의 실용주의도 칸트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암 제임스도 종교의 실용성에 우선적인 가치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가치관은 현대인들 안에 지배적인 사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이런 시대의 풍조에 깊이 젖어 있기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실용주의적 논리가 작용한다. 하나님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혜택과 유익은 무엇이며, 우리 삶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과 효과는 무엇인가에 우리의 일차적인 관심이 기울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의 특징은 하나님을 섬김으로 얻게 되는 축복과 혜택보다 하나님 자신을 더 알기 원함에서 나타난다. 본회퍼의 말과 같이, 참된 신앙은 “어떻게(how)”보다 “누구(who)”에 우선적인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어떻게(how)” 축복을 받을 것인가, 혹은 “무슨(what)” 혜택과 유익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관심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누구(who)”인지 아는 것이 우리 신앙에 선행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구원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의 가장 깊은 비밀인 삼위일체를 계시해 주셨다. 이 삼위하나님을 아는 것이 구원이고 영생이며, 이 삼위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 신앙생활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실생활과 별 상관없는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 교리와 삶과 영성의 근본 바탕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는 사역을 삼위일체적으로 성취하셨다. 신약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세 가지 교회에 대한 이미지 - 하나님의 가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은 교회의 삼위일체적 특성을 잘 부각시킨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에서 묘사하고 있는 교회는 성령 안에서 삼위하나님이 충만히 거하는 공동체이며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삼위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어 가는 새 언약의 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사역과 활동 - 예배, 설교, 교제, 기도, 봉사, 선교는 삼위일체적 내용과 특성을 풍성히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과연 우리 강단에서 삼위하나님의 사역과 은혜를 온전히 밝히는 설교, 삼위일체적으로 균형 잡힌 메시지가 전파되고 있는가? 우리의 예배는 삼위하나님의 부요한 임재 속에 드려지고 있는가에 대한 심각한 성찰이 필요하다.
만약 하나님이 이위하나님이라면?
그렇다면 삼위일체 교리가 우리 신앙생활에 구체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만약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삼위가 아니라 이위나 일위하나님이라면 우리의 실제 삶에 어떤 차이가 있을 것인가? 사실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명시적으로는 삼위론자임을 자처하지만 암묵적으로는 이위론자처럼 신앙생활 하는지도 모른다. 저명한 성경학자들 중에도 신약성경은 삼위보다 이위를 계시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궁켈은 성령의 인격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성령은 인격이라기보다는 능력으로 신약에 증거 되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성령을 인격이 아니라 능력으로 보는 이들이 교회 안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이위론자들이다. 그러나 이들만이 아니라, 입으로는 성령의 인격성을 인정하지만 실제로는 성령을 인격으로 대하지 않고 자신이 마구 사용할 수 있는 능력으로 취급하는 이들도 실상은 이위론자들이다. 이런 이들을 성령운동이나 성령집회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성령의 위격성이 무시된 이위론적 신앙의 실제적 폐해는 무엇인가? 만일 성령이 단순히 능력이나 영향력이라면,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효력을 전달하는 도구는 될 수 있지만 하나님 자신을 중재하는 채널은 될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은 하나님 자신과 분리되어 전달되지 않는다. 이 구원의 선물은 죄 용서함과 천국 가는 티켓만이 아니라 삼위하나님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다. 삼위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여 우리와 교제하며 천국의 실체를 누리게 하는 것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그 안에 상호내재 할 수 있는 신적 인격체이기에 우리 안에 삼위하나님의 내주를 실현시킬 수 있다. 성령 안에 성자가 거하고 성자 안에 성부가 거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함으로써 그 안에서 성자와 성부도 우리 안에 거하신다.
성령이 인격이 아니라 능력이라면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고 우리 안에 삼위하나님의 인격적 임재를 실현하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은 좌절될 수밖에 없다. 그 동안 한국교회에 수많은 성령집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 사역의 가장 중요한 열매인 인격과 성품의 변화는 잘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사람들이 삼위하나님과 교제하는 삶 자체보다 성령의 능력과 혜택을 더 추구한 잘못된 신앙관의 결과이다.
성자중심주의
현대교회에 하나님을 실제 일위나 이위하나님처럼 섬기는 경향과 맞물려 나타나는 현상은 일위나 이위하나님에게 편중된 신앙이다. 많은 경우 교인들의 신앙과 영성이 삼위일체적으로 균형 잡혀 있지 않다. 어떤 이들은 성부와 성령보다 예수께 일방적으로 치중하는 신앙생활을 한다.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계시되었기에 복음과 신앙은 예수중심성을 띨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앙의 예수중심적 특성은 예수와 함께 성부와 성령이 균형 있게 강조되고 조화롭게 이해되는 삼위일체적 맥락 속에서 온전히 드러난다. 성부와 성령사역을 상대적으로 무시한 채 예수에게만 집중하는 신앙은 삼위일체적 균형뿐 아니라 진정한 예수중심성까지 잃게 된다.
잊혀진 아버지라는 책에서 톰 스메일이 지적했듯이, 많은 교인들의 삶 속에서 성부하나님이 실제적으로 무시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교인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성부하나님 보다 더 친밀하게 느껴지며, 그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보여준 사랑이 더 실제적이고 실감나게 와 닿는다. 그러나 십자가고난의 목적은 이 아버지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함이며 우리가 성부와 사랑의 관계를 누리게 하기 위함이다. 성령체험은 이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아들로 대우하심을 실제 맛보게 하신다. 우리의 영적 빈곤은 성부의 사랑과 하나님 자녀 됨의 권세를 깊이 인식하고 체험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
성부중심주의
반면, 현대의 다원주의적 관심을 가진 진보적 신앙인들은 예수보다 오히려 성부에 더 치중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교회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버리는 전통신앙의 폐쇄성을 탈피하고 모든 문화와 종교적 영역을 포함한 창조세계에 하나님이 범우주적으로 역사함을 강조하는 신앙관을 선호한다. 곧 예수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 신앙의 초점을 옮기며, 구원 중심에서 창조 중심으로 사고를 전환하고, 교회적 지평에서 우주적 지평으로 신앙의 폭을 넓히기를 원한다.
이러한 하나님 중심의 신앙관에 의하면 성령은 예수의 영이기 전에 하나님의 영이다. 성령은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론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창조계 안에서 다른 종교적 매개체를 통해서도 보편적으로 역사한다. 따라서 다른 종교인들 안에 나타나는 뛰어난 덕성과 영성도 피조계 속에 임재하시는 성령의 산물인 것이다. 최근 일상과 세속 속의 영성, 생태학적 영성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면서 하나님중심의 성령론이 무분별하게 영성이해에 도입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자칫 잘못하면 혼합주의로 가는 지름길을 열어 놓는 결과를 낳는다. 현대 상황에 맞는 폭넓은 신앙을 구가하려는 시도 속에는 항상 십자가의 거리끼는 것을 피해보려는 끊임없는 유혹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보편적 내재를 강조하는 하나님중심의 성령론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이라는 복음의 핵심을 왜곡시키는 위험을 안고 있다.
성령과 보혈은 직결되어 있다. 성령은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서만 역사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이다. 성령은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이루신 구속의 열매를 개인과 교회뿐만 아니라 온 만물 안에 적용하신다. 성령은 십자가로 만물을 회복하며 하나님과 화목케 하려는 구속의 경륜을 실현하신다. 그러므로 십자가 보혈에 근거한 그리스도중심의 성령론은, 진보주의자들이 염려하듯이, 개인구원과 교회와 관련해서만 성령사역을 편협하게 이해하는 견해가 아니라 십자가의 빛 가운데서 성령사역의 우주적 차원을 조망하는 폭넓은 시야를 제공하는 입장이다.
성령중심주의
성부와 성자에 대한 선호도가 판이하게 다르듯이, 성령에 대한 관심도 교인들에 따라 상반되게 나타난다. 전통교회는 대체로 성령에 대해 좀 무심한 반면 오순절 교회는 성령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이런 대조적 현상이 두드러지기에 기독교 안에는 마치 예수파와 성령파가 존재하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한다. 예수파는 예수를 믿는 것으로 만족하나, 성령파는 그 외에 성령체험이 추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성령파는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성령을 받는다는 예수 중심적인 신앙관을 견지한다. 그러나 예수체험과 성령체험이 단계적으로 분리되면서 실제적 관심의 초점은 예수보다 성령에게로 옮겨지기 쉽다. 그러나 성령사역의 근본 특성은 우리의 관심을 자신이 아니라 예수께로 집중하게 하는 것이다. 성령은 자신이 아니라 예수를 드러내고 영화롭게 하며, 예수의 진리와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한다(요 16:13-15). 그러므로 예수가 바로 전파되며 예수와 그의 십자가에 영광이 돌아가는 곳에 성령이 가장 충만하게 임재하고 역사한다. 아무리 성령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언급이 수없이 반복될지라도 예수 십자가의 도가 바르게 전파되지 않는 곳에는 성령이 현저히 부재할 수 있다. 성령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성령 중심적 성령론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적 성령론이다. 이 점을 무시한 성령 위주의 신앙과 영성은 성경과 거리가 먼 비기독교적 신령주의로 치우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요즘 성령에 관한 글 중에서 형식적으로는 삼위하나님을 언급하지만, 실제 그 내용에 있어서는 과도하게 성령에게 편중된 메시지를 간혹 접하게 된다. 어떤 이는 성령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법에 대해 쓴 책에서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성령님과 교제하기 위해 항상 성령님께 기도할 것을 권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성령님께 기도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령님, 안녕하세요? 성령님 어떻게 할까요?, 성령님, 제게 말씀해 주세요, 성령님, 함께 가시지요, 성령님, 저를 도와주세요, 성령님, 저를 인도해주세요” 그는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불렀으나, 이제는 “‘여호와여’라고 부르기 보다는 ‘성령님, 사랑하는 성령님!’하고 부르는 것이 더 친근감을 가져다 준다”고 하였다. 물론 그는 항상 성령의 임재를 의식하며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는 삶을 논하려는 선한 의도로 이 책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성령과 교제하는 삶은 삼위일체적 균형과 조화가 깨지고 그 질서가 무너져 버린 신앙생활이다. 그것은 고백론적으로는 삼위하나님을 인정할지라도, 실제 기도생활에서는 성령이라는 일위하나님 아니면 기껏해야 예수를 포함한 이위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성령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논할 때 꼭 유념해야 할 사실이 있다. 성령은 분명 신적 인격체이기에 우리의 경배와 교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성령은 예수님의 인격과 구별되는 고유한 인격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성령은 자신의 인격을 우리와 성부 그리고 성자가 인격적으로 만나는 교제의 장, 영역으로 제공하신다. 성령은 자신의 인격 안에서 우리와 신랑 예수가 연합하여 교제하는 신방을 차려 주신다. 성령은 우리를 신랑 예수와 교제케 하는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분이며, 자신이 신랑을 대신한 교제의 대상으로 나서지 않는다. 이 점이 자기를 비우시는 성령의 인격적 특성이다. 성령은 우리와 예수 그리고 성부와 사랑의 교제를 맺어 주시고 자신은 뒤로 물러나 그 사랑의 교제를 지켜보며 즐거워하는 신랑의 친구와 같은 소임을 담당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을 깊이 체험할수록 우리는 예수와 성부와 깊은 인격적 교제를 누린다.
성령은 영성의 원천이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도와 성부와 성자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다 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다. 우리는 예수를 잘 믿고 따르며 닮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이러한 선함과 능력이 없다. 우리 안에서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고 자유케 하여 예수를 잘 믿고 닮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체험하면 새로워진 나를 체험한다. 변화된 나(I), 자유해진 나, 주님을 사랑하는 나를 발견한다. 동시에 성령을 체험하면 성부와 성자를 ‘나를 사랑하는 당신(Thou)’으로 체험한다. 이것이 성령체험의 두 차원이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의 교제를 누리면서 이런 관계를 맺어 주시고 이 모든 사랑의 교제 속에 은밀히 임재해 계신 성령님께 깊은 사랑과 감사를 올려드린다.
우리 기도의 대상은 누구인가?
앞에서 언급한 책에서 또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마치 성령님이 우리 기도의 유일한 대상인 것 같이 성령님께 항상 기도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에 대한 의문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우리는 기도를 삼위하나님 중 누구에게 드려야 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서로 대립된다. 기도는 성부 하나님께만 드려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삼위하나님 모두가 기도의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필자는 이 두 입장의 적절한 조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성경에는 예수께 기도한 예가 두 번 나타난다. 스데반이 순교하면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라고 부르짖은 외마디 형태의 기도와 요한계시록 마지막 부분에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는 예수 재림에 대한 간절한 소원의 기도적 표현이 기록되어 있다. 성령께 대한 기도의 구체적 사례나 명령 역시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주기도문과 복음서에서의 예수의 가르침과 바울서신서의 증거는 기도는 성부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라는 입장을 압도적으로 지지한다.
그렇다면 성자와 성령은 기도의 대상에서 제외되는가? 어떤 의미에서는 삼위하나님 모두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받으신다고 볼 수 있다. 비록 기도에 있어서 삼위하나님 각자의 역할이 구별되어 있지만, 각 위격이 자신의 독특한 사역을 수행할 때에도 그는 다른 두 위격과 상호내재하는 가운데 그 일을 행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성자와 성령은 성부의 기도를 들으시는 역할에 동참한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우리의 기도가 성자나 성령의 독특한 사역과 긴밀히 관련된 것일 때 성자와 성령께 기도할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재림의 주역은 예수님이며 그의 미션이기에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듯이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다. 또한 그의 구속사역에 대해 감사하며 그의 중보의 은혜를 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고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케 하시는 것은 성령의 독특한 사역이기에 “성령이여, 바르게 기도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우리를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다.
삼위일체적 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도의 일반적인 형태는 예수를 통해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경이 제시한 패턴을 따르는 것이 온당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첫째, 이는 계시에 충실한 기도가 되기 때문이다. 주기도문과 공관복음 여러 곳에서 주님께서는 분명히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어떤 신학자는 제자들이 성부 하나님께만 기도한 것은 예수의 지상 생애 동안 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신이 지상에 있을 동안만 성부께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부께 대한 기도는 자신이 떠난 후에 본격적으로 제자들의 삶 속에 실현될 것으로 보셨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강림을 언급하는 고별 메시지에서 성령이 임하는 날에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셨다(요 14:23-24). 이는 성령 안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성부께 구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이다. 또한 바울서신에서의 바울의 기도문과 기도에 대한 언급들을 살펴볼 때 바울도 주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둘째,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예수의 모범을 따르는 기도이다. 예수는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기도하는 삶을 사셨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우리를 예수와 같이 아버지와 친밀히 교통하는 기도의 삶을 살게 하신다. 그러므로 아들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이들은 아들과 같이 기도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기도를 통하여 예수가 누렸던 아들의 특권을 누리며 예수를 닮아가게 된다. 예수는 우리 기도의 중보자가 되시는 동시에 우리 기도의 모델이 되신다. 예수는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서 중보자로서 우리와 함께 아버지와 교통하신다.
셋째, 이렇게 계시된 패턴을 따르는 기도는 삼위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잘 반영하는 기도이다. 성부께서는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우리의 구속을 완성하셨다. 성자와 성령의 사역은 우리를 아버지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 구속의 목적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 안에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성령 안에서 예수를 통해 아버지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삼위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기억하며, 그 은혜를 맛보며 감사한다. 우리는 이 기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의 혜택을 실제 경험한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예수의 은혜의 귀함을 마음에 되새기며 감사한다. 동시에 기도 속에서 성부와의 교통을 실제 체험하게 하는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누린다. 이와 같이 기도는 삼위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에 근거하며, 그 은혜를 구체적으로 체험하며 감사하는 것이기에, 그 패턴과 내용은 이 삼위하나님의 경륜을 최대한 잘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기도는 고역스러운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성부께서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진귀한 선물이다. 그와 동시에 기도는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께 우리가 올려 드리는 최고의 감사 표현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이 선물과 우리로부터 올라가는 감사의 제사는 모두 은혜의 소산이다. 이는 둘 다 예수를 통한 성령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인간의 공로에 근거하거나 인간의 자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에 모든 영적 우월주의와 자랑을 배재한다. 이 삼위일체적 특성이 이 기도를 다른 모든 비기독교적 기도들과 본질적으로 구별되게 한다.
일위론적 기도
따라서 ‘예수를 통해서’ 기도하지 않고, 성부를 무시한 채 ‘예수에게’ 일방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기도에 있어 예수의 독특한 중보사역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는다. 예수께 주로 기도한다면 우리 기도의 중보자는 누구인가? 성부나 성령이 기도의 중보자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예수를 중보로 해서 예수께 기도드린다면 그 기도는 삼위일체적 특성과 균형을 상실한 일위론적 기도가 되어버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지 않고 항상 ‘성령께’ 기도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오류로 치우친다. 성령이 우리 기도의 객관적인 대상이라면 우리 안에서 기도를 가능케 하며 기도의 원동력을 부여하는 이는 누구인가? 그 분이 바로 성령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기도의 주 대상으로 삼는 가르침은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을 간과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그 결과 기도는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의 산물이 아니라 성령께 나아가기 위한 인간의 자력적 행위, 성령 은혜를 향한 인간의 노력으로 이해되기 쉽다.
또한 성부가 우리 기도의 주된 대상임을 인정하지 않은 채, 성부에게와 똑같이 성자와 성령에게 주로 기도할 수 있다는 가르침은 실천적인 면에 있어서 여러 가지 혼란을 야기한다. 각 사람마다 자신의 영적성향과 관심에 따라 특정한 위격에게 집중할 가능성이 높다. 주일학교 학생들은 주로 예수님께 기도할 것이며, 다원주의적 신앙을 가진 이들은 성부하나님을 기도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반면에 성령을 좋아하는 이들은 주로 성령께 기도하기 쉽다. 하나님에 대한 남성적 이미지를 혐오하는 여성신학자들이나 자연에 맞는 비인격적 신(神) 개념을 원하는 생태학자들도 성령 하나님을 선호할 것이다.
이러한 혼란을 막고 기도의 삼위일체적 특성을 보존하려면 성령 안에서 예수를 통해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기도생활에서 마치 일위나 이위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은 빈곤한 영성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며 우리 안에 삼위일체적 의식을 고양시켜 준다.
성령체험과 삼위일체 신앙
삼위일체의 신앙은 원래 예배의 토양과 체험의 현장 속에서 싹튼 것이다. 초대교인들은 오순절에 임한 성령을 체험함으로써 삼위일체를 체험하였다. 그들에게는 성령체험이 삼위일체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이를 통하여 그들은 삼위일체적 예배와 삶과 신앙을 영위할 수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삼위일체에 대한 체험이 교리보다 앞선다는 말은 일리가 있다. 초대교인들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이론적으로 잘 정리된 삼위일체 교리는 없었으나, 그들의 삶 속에서 삼위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을 풍성히 누렸다. 그들에게 삼위일체의 신비는 단순히 교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누리는 진리이며, 예배 속에서 체험하는 송영의 신학이다.
최근 신학계에서는 삶과 체험의 장과 분리되어 먼 나라, 이론의 영역으로 이주해 버린 삼위일체 교리를 다시 본연의 위치로 복귀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는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작업과 함께 우리 교회가 성령충만한 공동체로 변화하는 부흥의 역사가 필요하다. 그것은 성령이 충만히 임재하는 공동체에서만 삼위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체험하는 역동적인 예배가 가능하며, 생동감이 있는 삼위일체적 신앙과 삶이 배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의 삼위일체 신앙이 성경 계시에 충실한 신학과 함께 성령체험에 근거할 때 삼위일체 교리와 삶의 괴리가 극복되고, “잊혀진 삼위일체”가 우리교회 안에서 다시 생생하게 기억되며 체험될 것이다.
'좋은 말씀 > 박영돈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른이 된다는 것 / 박영돈목사 (0) | 2016.06.30 |
---|---|
개혁주의 구원론이 전파되지 않는 개혁교회 / 박영돈 (0) | 2016.06.28 |
영화의 한 대사가 설교보다 낫다. / 박영돈목사 (0) | 2016.06.28 |
혼자만 충만한 것도 문제 / 박영돈목사 (0) | 2016.06.27 |
하나님의 징계 아래 있는 한국교회 / 박영돈목사 (0) | 2016.0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