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교리강좌(3)

제2장 교회의 표지와 정치

새벽지기1 2016. 6. 21. 14:01

 

2 장  교회의 표지와 정치

 

1. 교회의 세 가지 표지

 

1) 말씀 선포

 

교회의 일차적 임무이다. 교회는 바로 그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고 생겨났다.

 

. 교회에서 성도들을 세우고 견고하게 하기 위해 선포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머리 되심과 주 되심을 인정하는 사람들의 교제이며, 말씀은 이들이 믿음 안에서 강건해지도록 하기 위해 선포된다. 신약의 서신서들은 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되었으며, 사도들과 선지자들도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선포했다. 사람들이 회심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기로 태어났으며. 교훈을 받아야 했다. 오류에 대해 경고를 받고 이단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했다. 그래서 교회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 복음 전도

 주님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것처럼, 제자들도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가지고 오셨으며, 우리도 같은 메시지를 가지고 보냄을 받았다. 외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자각하고,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명력 있는 믿음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회의 사역의 일부이다.  

 

2) 성례 집행

 

교회는 말씀전파와 관련하여 성례가 올바르고 참되게 시행되는 곳이다

.

3) 권징

 

이 교리가 심각하게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교회가 왜 그 모양인지, 왜 교인들의 수는 줄어들고 교회가 사람들에게 능력도,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는지, 왜 교회가 세상적 여흥이나 놀이 같은 것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주장을 펼칠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지, 왜 교회가 그렇게 위험한 상황에 처했는지 설명해 달라고 한다면, 저로서는 권징을 시행하는데 실패한 것이 궁극적 원인이라고 말씀 드릴 수 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징계가 소홀히 여겨지고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은 그렇게 된 것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이 주제를 충분히 자세히 다루고 싶다. 권징이 시행되어야 하는 근거는 성경이다.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이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화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18:15-17).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16-17). 권징은 고전 5장 전체의 주제이다. 마지막은 이런 말로 끝난다.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이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을 것이다.

 

고후 2, 특히 바울이 징계 받은 사람을 다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5절에서 10절까지에 이 문제가 다시 언급된다. 규모 없는 삶을 사는 교인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침을 주는 살후 3장에서도 이 문제가 등장한다. 디도서 3:10에는 분명한 명령이 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요한이서 10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계시록에 실려 있는 각 교회들에게 보내는 여러 편지에도 권징의 시행에 대한 권고가 담겨 있다.

 

권징 시행에 반대하는 자들이 범하는 오류

 

이런 정당화하는 근거를 마태복음 13장의 가라지 비유에서 찾는다. 이것은 성경을 극도로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가라지의 비유는 분명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한 표현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보다 크다. 우리 주님 스스로 이 비유를 해석해 주시면서 곡식과 가라지를 뿌린 밭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좋은 씨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가라지의 비유는 지역 교회내의 권징 문제와 아무 상관도 없다.

 

가라지의 비유를 교회에 적용하는 것은 로마카톨릭과 동일한 오류에 빠지는 것이며, 로마 교회를 따르는 대부분의 교회들 역시 같은 오류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권징은 두 가지 주요한 방침에 따라 시행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권징은 교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3:10). 요한은 참된 교리를 전달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에는 말할 것도 없고 집으로도 결코 영접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를 그들의 집에 절대 들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말이 절대로 아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일 뿐 아니라 교사라고 주장하면서도 거짓을 가르친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절대 집에 들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고전 5:11에서 바울은 이것을 명쾌하게 사실상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모든 권징의 문제에서 나는 바깥에 있는 세상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사람들로부터 너희를 지키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단지 형제인 어떤 사람이 이런 죄를 저지르면 그와는 사귀지 말라는 말이다.

 

저는 독일로부터 치명적인 고등비평이 유입되기 시작하던 19세기에 우리 선조들이 마땅히 해야 했던 권징을 시행하는 데 실패했다고 주저 없이 말한다. 잘못된 관용과 가라지 비유에 대한 오해로 인해 그들은 상황이 곧 나아지기를 소망하며 이 잘못된 가르침을 허용했다. 그들은 긍정적으로 증언하고 부정적인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했다. 교회 지도자들이 범한 그 끔찍한 잘못의 결과를 우리 세대가 거두고 있다.

 

신자의 삶도 권징의 대상이다.

 

신자가 모순 되고 죄악된 삶을 그리스도의 대의에 헤아릴 수 없는 해를 끼친다. 그가 아무리 정통적인 교리를 주장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기질과 욕구와 감정과 육욕을 통제하고 다스리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가 전파하는 믿음을 말과 행동으로 부인하는 자요, 외인들에게 장애물과 거치는 것이 되는 사람이다.  

 

성경은 불순종하는 형제가 돌이켜 징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는 실제로 교회에서 쫓겨나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런 자를 사탄에 내주어”야 할 수도 있다.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고전5:5)하기 위해서이다. 정확하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 사탄에게 내어주면 사탄은 그의 육체에 고통을 줄 것이다. 곤고하고 비참한 상태가 됨으로써 제 정신이 들어 그의 영혼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부흥과 각성이 일어난 시기의 교회사를 읽어보라. 시대와 관계 없이 그런 시기에는 언제나 권징이 두드러지게 시행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웨슬리가 도착했을 때 육백여명의 사람이 보여 있었다. 그가 교인들을 한 명씩 점검하기 시작했으며, 며칠 후 그가 점검을 다 마치자 교인 수는 삼백 명으로 줄어 있었다. 존 웨슬리가 오늘날 다시 돌아온다면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한 생각이 든다!

 

부흥과 각성의 기간에는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이 언제나 정결함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신약성경으로 돌아가서 그 가르침에 따라 살기만을 힘썼다. 신약은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 도구, 통로는 반드시 깨끗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모인’ 교회가 아니라 ‘정결한’ 교회를 가르치는 것이다. 여러 면에서 세상과 섞인 교회가 어떻게 성령의 통로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런 일은 거의 생각할 수도 없다! 교회의 세 번째 표지는 권징이다.

 

2. 교회의 정치

 

신약 성경이 교회 정치에 대해 그리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교회를 가르치고 다스릴 수 있었던 때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교회 스스로 언제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는 뭔가를 덧붙이기 시작했다.

때로는 성경에 반하는 전통이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1) 교회 정치를 인정하지 않는 견해

 

모여든 모든 구성원이 성령에 순종하기 때문에 정치 따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

교회지상주의 또는 ‘기독교 국가’라는 개념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났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화 되었을 때, 교회는 스스로를 ‘기독교 국가’라고 부르기로 결정했으며, 제도와 정치를 포함한 많은 개념을 로마 제국으로부터 차용했다. 성경에서는 현대 로마카톨릭 교회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 드린다. 그들은 전통은 성경과 대등한 것이다.

 

조직은 언제나 영혼을 죽이며, 기관은 영혼을 소멸시킨다고 한다. 교회가 너무 복잡해지고, 편협해지고, 경직된 나머지 성령이 역사하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 결과, 역사적으로 부흥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거의 언제나 새로운 교단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너무 살아 있고 기존 질서를 뒤집는 것이었기에, 옛 교회 조직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배제 되었다.

어떠한 지도력도 믿지 않는 것과, 실제로 교회에 지도자가 없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지도자는 불가피하게 있어야 하며, 그것을 공식화해 놓지 않으면 반드시 누군가가 자칭 지도자로 나설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와 교회의 제도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한 것이 되도록 하자.

 

2) 에라스투스주의적 견해

교회는 국가의 한 부분이며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교회를 다스린다는 견해이다



국가는 교회의 성직자들, 특히 고위 성직자들을 임명하며, 그들이 또다른 사람들을 임명한다. 루터파 교회와 영국 국교회의 견해이다.

 

3) 감독 정치

 

감독 제도로서 감독들에 의한 정치를 그 신념으로 한다. 이들은 교회를 돌볼 책임을 그리스도가 직접적인 영적 후계자인 성직자단 혹은 감독단에게 위임하셨다고 가르친다.

교회 정치는 오로지 감독들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이트풋 감독은 신약 성경에서 감독과 장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만족스럽게 증명하였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1:1). 큰 교구 전체에 하나의 감독이 있어서 그 한 사람의 감독이 여러 교회를 책임지는 것과는 달리, 신약에서는 한 교회에 여러 명의  감독이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의 감독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 지위와 기능을 부여받은 나이 든 남자들, 즉 장로들이었다.

 

감독제도는 신약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학자들’과 전적으로 의견이 일치한다.

이것은 1세기로부터 수 세기의 시간이 흐른 후 키프리아누스라는 사람에 의해 생겨난 개념이다.

 

4) 로마가톨릭의 견해

 

감독제도의 기원을 사도 베드로에게서 찾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감독에 의한 교회의 다스림을 믿는다면 논리적 결론은 다른 모든 감독단을 지배하는 하나의 감독직이 있으며 그 감독직을 맡은 사람이 최종 권위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는 권위를 가지고 말하며, 무오하고, 그의 모든 말은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이 로마카톨릭의 주장이다. 교황은 감독의 우두머리일 뿐 아니라 사도 베드로의 직접적인 후계자이며, 따라서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역사적으로 정당한 논거를 전혀 갖고 있지 못한다.

 

5) 장로교의  견해

 

장로회주의자들은 먼저 지역 교회는 그 자체가 하나의 실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질서와 형식을 위해, 그리고 혼란을 피하기 위해, 지역 교회들이 모두 인정하고 모두 따를 만한 하나의 조직체를 만드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래서 노회(presbytery)를 결성했다. 노회의 결정에 따를 것을 엄숙히 동의한다. 더 나아가 노회들을 묶어  총회를 구성한다. 최고법원인 충회의 결정에 노회는 따른다. 이 제도는 장로교회, 그리고 존 녹스와 종교개혁 시대 이후일반적인 스코틀랜드 교회의 정치 방법이 되었다.

 

6) 회중파(혹은 독립파)의 견해

 

모든 지역교회는 그 자체가 하나의 실체이며,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교회는 주님의 임재와 주님이 교회의 머리이심을 믿는,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고  기다릴 때 주님이 성령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고 교리와 권징 등을 결정하는 데 필요한 지혜를 주시리라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다. 지역교회는 자율적인 존재로서 스스로를 다스리며, 감독단이 노회나 총회나 그 밖의 어떤 상위 기관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원래 17세기에 소위 회중주의자들과 침례교도들은 그랬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교회가 얼마나 있는가? 그들도 모두 교회 유지 기금과 그 기금을 통해 지역 교회를 통제하는 일에 있어서 장로회적 개념을 받아들였다.

 

7) 성경적인 이상은 회중파의 지역교회 개념이다.

 

이 문제를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독립적인 지역 교회의 개념이 가장 성경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지역 교회들이 모여서 교제를 나누는 것은 좋다. 회의를 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제가 신약 시대에 주어진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한 바로는 어떠한 회의도 구속력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도 지역 교회들을 향해 권공의 말을 전했을 뿐 법률적인 권한은 없었다. 단순히 “성령과 우리는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라”(28)라고 말했을 뿐이다.

저는 독립적인 지역 교회의 견해를 지지한다. 제가 보기에는 그것이 신약에 나타난 형태에 가장 가까운 듯하다. 각각의 지역교회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이지만 같은 마음을 가지고 같은 영을 소유한 사람들과 언제라도 모여서 교제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다른 견해를 받아 들이면, 교리 면에서나 실천 면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감독기관에 속해야 할 것이고, 단지 그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당신이 틀렸다고, 그리고 위험하다고 믿는 그 가르침을 재정적으로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은 역사상 언제나 일어났으며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가 이런 입장에 처해 있다. 분명 믿음을 부정하는 목회자나 사역들을 위해 재정지원을 하는 자유교회에 복음주의자가 소속되어 있기도 하다.

 

반복해 말하지만, 신약의 가르침과 지난 수 세기에  걸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상적인 것은 지역 교회라고 생각한다. 의견이 일치한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의견의 일치를 본 다른 사람들과 교제를 가지되 아무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개개의 교회에 무엇을 강요하거나 양심을 구속할 권리는 없는 상태이다. 같은 마음을 가진 신자들이 자기 자신과 자신들의 영적 삶을 성장시키기 위해 모이는 이 교제는 서로를 돕지만 자유롭고 자발적인 방법으로 돕는다. 어떤 교회도 자신의 견해나 심지어 양심에 반하는 일은 하라고 강요 받지 않는다.

이 문제들은 제게 대단히 중요하다. “교회정치는 나와 상관 없어요. 나는 영적인 사람이니까요.”라고 말한다면, 대단히 비성경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눈에 보이는 교회가 어느 모로나 우리 주님 자신의 교리, 주님이 우리로 보관하고 지키게 하신 그 교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여러분의 일이자 임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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