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교리강좌(3)

1 장 교 회

새벽지기1 2016. 6. 20. 13:17
 
 

2. 교회론

 

교회론은 대단히 논란이 많은 주제이다. 역사만 살펴보더라도, 교회론이야말로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주제였다. 가능하면 열린 마음으로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보려 애써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가 쉽게 빠져드는 편견들로부터 건져 주시길 기도하면서.

 

1) 교회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이 두 주제에 대해 상당히 혼란을 느낀다. 이는 데체로 로마 카톨릭교회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로마가톨릭의 가르침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또한 교회가 모든 면에서 삶 전체를 지배하고 통치할 권리가 있다고 일관성 있게 주장한다. 중세시대 때 로마 교회는 자신이 하나님 나라이며 최상의 존재라는 주장을 근거로 왕과 군주와 방백과 나라들을 통치했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가? 가장 훌륭한 정의는 하나님의 통치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 어디에나 존재한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11:20),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11:20)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통치로 간주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주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을 때 여기 있었다. 그 나라는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으로 인정되는 곳 어디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그 나라는 모든 사람과 만물이 우리 주님의 주 되심을 인정해야만 하는 그 때 더욱 충만하게 임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왔으며,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있고, 또한 하나님 나라가 장차 오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표현이지만 그 둘이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보다 더 넓고 더 크다. 참된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주 되심이 인정되고 인식되며 주님은 거기에 거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순간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일부분이지만 단지 부분일 뿐이다. 하나님은 교회 바깥,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곳에서도 통치하신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동일하지 않다.  

 

2) 교회의 의미

 

“교회”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에클레시아이며, 이것은 “불러 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함께 부르심”을 받았다. 에클레시아는 ‘집회’라는 말로 번역할 수도 있다. 7장에서 스데반은 모세가 광야교회”(38)에 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교회, 모임, 집회였다. 그들은 에클레시아, 즉 구약의 교회였다. 그것이 “교회”라는 말의 근본적 의미이다.

 

“교회”라는 단어는 ‘주인’을 의미하는 헬라어 퀴리오스에서 유래했으며 ‘카이저’나 ‘시저’도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그 두 가지 의미를 결합시켜야 한다. , 교회는 주님께 속했으며, 함께 모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역적 모임으로서의 교회

 

성경에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용되었을 때는 일반적으로 지역적인 모임을 지칭한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거의 언제나 이런 지역적 의미로 사용된다. “저의 교회”(16:5),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집에 모였으며, 사도 바울은 그러한 지역 모임을 주저 없이 교회라 부른다. 그는 교회를 거대한 것으로 보는 에큐레니칼적 이상에 따라 생각하고 있지 않다. 바울은 그의 편지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보낸다.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교회” 아닌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1;2)을 향해 기록했다.

바울은 교회를 여러 개의 지부로 나누어진 하나의 단일체로 보지 않고, 여러 교회들, 즉 수많은 단일체가 갈라디아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의미 있고 중요한 점이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살펴 보면, 이것이 사도가 교회라는 주제를 다루는 일반적인 방법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교회들”이라는 말 대신 “교회”라는 말이 사용된 두 세 번 정도 있는데, 그중 한 경우는 다소 흥미롭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9;31). 이 구절은 “교회들”과는 구분되는 “유일한 교회”의 개념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기보다는 여러 장소로 흩어져 평안 가운데 있는 하나의 교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고전 12:28에도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교회들 중에”가 아니라 “교회중에” 세우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늘에 있는 교회

 

“교회”라는 용어는 또다른 식으로 사용된다. 에베소서의 저 위대한 구절들과 같은 몇몇 본문에서 바울은 분명 교회가 지상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는 사람들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족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니라”(1p:22-23). "이는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3:10).

 

보다 큰 의미로서의 교회

 

몇몇 경우에는 “유일한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더 광범위한 개념을 보여 주기도 한다.

 

3) 교회를 설명하기 위한 성경의 예화들

 

그리스도의 몸

 

몇몇 신약 서신서에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나온다. 고전적인 예는 고전 12장이지만 롬 12, 4장 및 다른 곳들에서도 그런 개념을 찾아볼 수 있다.

 

성전 혹은 건물

 

바울은 자신을 지혜로운 건축자에 비교한다.(고전3:10) 2:20에서는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신부

 

5장에서 그렇고 그 이미지는 계시록에 다시 등장한다.

 

제국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2:19). 로마 제국의 각 부분이 널리 흩어져 있으면서도 중앙의 단일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교회와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전투하는 교회 혹은 승리하는 교회

 

지상의 교회는 자신의 생명과 교리와 그 모든 것을 위해 싸우고 있다. 휘장을 지난 교회는 기뻐하며 승리를 누리고 있다. 이것을 장엄하게 표현한 것이 히 12:22-24이다.

 

4) 결론과 요약 - 교회란 무엇인가

 

분명 교회는 영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 교회라는 단어가 단수로 사용된 모든 예는 교회가 보이지는 않지만 영적 실재로 존재함을 알려 준다. 하지만 동시에 교회는 가시적이어서 외부에서 바라볼 수 있고, 고린도나 로마, 혹은 다른 특정한 장소에 존재한다고 묘사할 수도 있다. 그 두 가지를 염두에 두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가 지역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중요한 유추는 영혼의 유추이다. 사람의 영혼은 볼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각 사람이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그 사실이 몸을 통해, 행동과 삶을 통해 표현된다는 것을 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지역의 교회들과는 별도로 유일한 교회가 존재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실체이며, 참으로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영적이고 보이지 않는 유일한 교회의 일원이 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다. 당신은 눈에 보이는 교회의 일원이 되어야 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교회의 일원이 될 수는 있다. 눈에 보이는 외적으로 나타난 교회의 일원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교회의 일원은 아닌 경우도 마찬가지로 가능하다. 그러므로 성경이 그리스도의 몸인 우주적 교회와 그것의 눈에 보이는 지역적 나타남을 구분한다는 사실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요약하면,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교회”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의 임재와 주권이 인정되는 성도들의 지역별 모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에 더하여, 지역 교회에 있는 참으로 거듭나고 신령한 사람들은 동시에 보이지 않는 영적 교회, 즉 그리스도의 참된 몸의 일원이다.

 

5) 교회의 연합

 

교회의 연합은 영적 연합이며 생명의 연합이다

 

성경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연합은 영적인 연합이라는 사실에 즉각 동의해야 한다. 17장이 잘못 인용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 사람들은 문맥을 무시하고 한 구절만 떼어 낸다. 21절을 인용해 ‘그들도 하나가 되어“라고 말하고는 그걸로 끝이다. 그들은 교회의 분열은 가장 큰 죄라고 주장한다. 분열이 유감스러운 일이며 분파주의가 분명 죄라는 사실에는 물론 동의한다. 하지만 이것을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과는 그가 어떤 형태의 그리스도인인지에 상관 없이 무조건 모든 면에서 완전하게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요 17장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이다.

 

17장은 이 연합의 특성이 어떠한지 아주 명백하게 밝혀 주고 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21-22). 그것은 모두 영적인 연합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8), 그러므로 연합에 대한 우리 주님의 말씀은 특정한 교리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예수님은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저는 그런 사람들과는 하나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속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것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연합의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 연합은 영적인 연합이다.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 고전 12

 

몸의 유추가 옳은 것이 되려면, 본질적이고, 유기적이고, 영적인 연합이 있어야 한다. 각 지체들이 서로에게 속해 있지 않고 같은 생명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면, 그들에게 같은 피가 흐르고 있지 않다면 그들은 조화롭게 일할  수 없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2:18). 그러므로 첫째로 강조해야 할 것은 성령이다. 연합은 영적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기관들의 합병이나 서류상의 합의가 아니다. 공동의 목표를 위해 연합한 것도 아니다. 성경에는 그런 개념이 나오지 않는다. 이 연합은 신비하고, 영적인 연합이다. 지극히 중대한 생명의 공동체이다.

 

교회 연합은 교리적 연합이다

 

두 번 째 원리, 그것은 연합은 반드시 교리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합은 교리적이어야 한다.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17:17-18). 그 “말씀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 성육신,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8:58). 동정녀 탄생, 주님의 기적들, 초자연적인 것들, 자신의 죽음의 목적-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는 것- 그리고 성령의 위격에 대해 자신이 하신 말씀 등을 말한다. 이 말씀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하고 연합할 수는 없다. 그들은 이 풍성한 교리들을 부인한다. 그들은 대리적 속죄나 성령의 위격을 믿지 않고, 기적은 불가능하며 전설일 뿐이라고 한다. “저희가 다 하나가 되어” 라는 구절만 뽑아낼 뿐이다. 그런 사람들과 연합하는 것은 요 17장을 부인하는 것이다.  

 

 

오순절 직후에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doctrine)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 성경은 축자적으로 영감된 책이다. 한 단어 한 단어가 중요하며, 한 구절 내에서 단어의 위치는 엄청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교제가 있기 전에 교리적 공통성이 있어야 한다. 교제는 같은 믿음, 같은 진리, 같은 이해에 기초한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것의 의미가 같지 않고서는 진정한 교제를 나눌 수 없다. 믿음의 공통성이 있어야 한다. 2:42에서는 사도들의 가르침이 먼저 나온 후에 교제가 나온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교제가 먼저이다. 사람들은 “자, 모두 같이 모입시다. 모이고 나면 믿음의 문제에 대해 결정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교리의 하나 됨이 없이는 교제를 나눌 수 없다.

 

요한이서에는 더욱 강력한 진술이 나온다. “누구든지 이 교훈(doctrine)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10-11). 요한일서에서도 그는 “우리에게서 나간” 적그리스도들과 그 추종자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을 우리와 함께 있었지만 나갔다. 그들은 분명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다(요일2:19). 그것이 교리에 대한 문제임을 기억하라. 교리는 참된 교제를 위해 본질적이고 중대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교회 연합의 문제를 논의할 때, 언제나 연합의 영적 교리적 특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특별하게 믿는 것이 없는 사람들과 연합하는 것은 전혀 어려울 것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연합이 아니다. 연합이란 적극적인 것이다. 연합은 무엇을 말하는지, 무엇을 믿는지는 신경 쓰지 않고 모여드는 것이 아니다. 연합은 생명이며, 능력이며, 열정이다. 연합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해 결합하는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교회의 연합은 그런 연합이다.

 

교회의 긴 역사를 되돌아보면, 하나님이 영적으로 그리고 교리적으로 마음을 같이한 소수의 사람을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 크게 사용하신 사건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붙잡아 사용하셔서 큰 일을 행하셨다. 하지만 서유럽 전체에 단 하나의 교회만 존재했을 때, 그 교회가 사람들을 어디로 인도했는가? 암흑 시대이다. 제가 보기에는 이 역사의 위대한 교훈이 현재  완전히 잊혀지고 무시되고 있는 듯하다. 저는 성경에서 발견한 진리에 대한 열심 때문에, 그리고 참된 연합이 아닌 연합에 관심을 가진 나머지 성경이 왜곡되고 곡해되는 것이 비극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드리는 것이다.  

 

6) 교회와 국가의 관계

 

로마 카톨릭의 개념은 교회가 국가이며 국가의 모든 일을 주관한다는 것이었다. 반대의 극단은 소위 “에라스투스주의적” 관점이다. 에라스투스는 교회가 국가의 한 부분이라는 창안한 사람이었다. 에라스투스주의는 교회가 국가의 한 조직이며 국가에 의해 통치되고 지배된다는 믿음이다. 영국국교회는 에라스투스주의를 신봉하며 대부분의 루터파 교회들도 같은 견해를 채택한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두 영역 주의’라고 묘사할 수 있는 제 삼의 견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소유하셨다. 하나님은 교회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우주의 주인이시다. 국가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바울은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한 바라”(13:1). 권세 잡은 자들과 모든 다스리는 자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명하신 것이다. 하지만 교회라고 하는 다른 영역이 존재한다. 이 두 영역은 나란히 존재한다. 전자가 후자를 주관하지 않는다. 그 둘은 서로 분리되어 있으며 둘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 이것이 신약 성경이 묘사하는 교회의 모습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다. 신약에는 국가가 관장하는 교회를 암시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 초대 신자들은 정부와 독립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임재 안에서 모였다. 모임의 바깥에는 그들이 속한 큰 국가가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그 국가의 시민이었지만, 어떤 의미로는 국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영역에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그것이 지난 수 세기 동안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개혁주의적 견해였다.

 

성경은 민족교회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와 정 반대이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3:11). 교회는 뭔가 다르다. 그것은 거듭나고 영적 생명을 가진 사람들,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의 지체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지역적으로 함께 모이는 것- 그것을 교회라고 부를 수도 있고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다-이다. 사회적 인종적 구분이나 국적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으며, 교회에서는 그런 것들을 절대 언급하면 안 된다. 그런 자격 조건들을 덧붙이는 것은 분명 성경적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이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똑같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그런 교회였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한 논증이 아니다. 그때는 그러했지만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은”(21:43) 시대이다. 베드로가 벧전 2장에서 입증하듯이 남은 것은 교회이다. 베드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말씀을 교회에 적용시킨다.  교회는 이제 초국가적이다. 모든 민족 안에 교회의 백성이 있다. 교회는 이 땅의 다양한 나라에 살면서, 동시에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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