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17~29 :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 모독을 받는 도다.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 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 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 니라.
11 장
사도는 지금 율법의 지식만을 의지하는 것이 유대인들에게 전혀 쓸모가 없음을 말하고 있으며 또한 율법의 지식이 자기들에게 주어졌다는 단순한 사실만을 의뢰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유대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 스스로가 자랑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였고 그 일련의 긴 질문들을 그들에게 던져 봄으로서 그 문제의 근본과 핵심을 알게 하였는데, 그 시대의 유대인들의 무서운 외식을 폭로하면서, 보편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외식에 대하여 경고하시고 있는데, 그 외식은 우리를 괴롭힐 수 있는 가장 교활하고 끔찍한 죄 가운데 하나입니다.
① 외식 자는 진리에 대해 보편적이고, 이론적이며, 이지적인 관심만을 보이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형태나 형식에만 신경을 쓰고, 진리 자체의 지성적인 국면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흥미롭고 매력적인 것, 그리고 이론적이고 순전히 객관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② 외식 자는 자신의 부족을 의식하지 못하고 자만심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겸비함이 전혀 없고 언제나 자기 만족감에 빠져서 자신에 대하여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에 대해 종교적이고, 경건하고, 선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외식 자는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차고, 자기 신뢰감으로 가득 찬 사람으로서 스스로 자신은 어느 부분에서는 완벽하다고 생각합니다.
③ 외식 자는 일종의 확신과 뽐내는 모습을 드러내 노출 시킵니다.
자신이 경건한 사람이라는 것을 내세우고,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합니다.
가령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니 매우 행복하다는 인상을 끼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자랑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나타내지만 실상의 삶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것을 쇼맨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은 결코 쇼맨이 아니라 삶 속에 베어 있는 것들이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드러나 보이고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비추어 지는 그런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본문에서 사도 바울로부터 책망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❶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다른 사람에게 설교하지만 자신에 대하여는 전혀 설교하지 않는다고 하며, 자신에게 먼저 설교하고 가르치고 책망합니다.
❷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고 한 그 일을 자신이 실제로 행하고 있다고 책망합니다.
❸ 율법과 율법에 대한 지식을 그처럼 자랑하면서도 그 율법을 어김으로서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 지식을 많이 알아서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할 수 없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뽐내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진리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하며, 그 진리를 통해서 겸비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론적으로 그런 일들에 대해서 말하면서도 우리 자신의 인격적인 삶 속에는 적용시키려는 수고를 전혀 하지 않는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모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배하고 있고, 섬기고 싶다고 하는 바로 그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④ 이러한 결과 때문에 외식에 대해서 사도가 우리에게 말하는 24절의 메시지는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내세우고 있지만 그들의 잘못된 모습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분명히 적용해야 할 요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 중 어느 누구든지 유대인들이 행한 것처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이름을 사람들 가운데서 욕되게 하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⑤ 이제 24절에서 생각해야 할 것은 자연인들은 우리 속에서 보는 바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24절에서 이사야 52장 5절을 인용하면서 말합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받는 자들이었는데 갑자기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들은 갈대아 군대에 패배 당했고 아주 힘없이 되어 그들의 도성은 함락당하고 무너졌으며 그들은 자기 나라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이방인들이 그 모습을 보고 “그대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다른 신들은 전혀 신이 아니라고 늘 말해왔던.......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다른 신들이 이스라엘 하나님보다 더 능력이 있어 보인다. 만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이 주장하던 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었다면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원수들이 그들을 이기도록 내버려 두었겠는가?.......”라고 말합니다.
에스겔 선지서 36:20~33에서도 똑 같은 원리에 대한 매우 상세한 진술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께서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해서 말씀하신 36절에서 하신 말씀을 이방인들이 이해하고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⑥ 25절에서 바울은 할례가 가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할례 자체에는 고유한 가치나 어떤 본질적인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에 속해 있는 조건에서만 할례는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거룩한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백성들도 거룩하기 때문에 할례는 거룩한 자라야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표증의 역할을 할 수 있으므로 거룩하지 못하다면 그 할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6절과 27절에서 계속 말해 갑니다.
할례는 어떤 내면적인 것에 대한 외면적인 표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어떤 내면적 은혜의 외면적 표이며, 하나의 내면적 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 니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유대인들은 외면적인 것들을 자랑하고 그것들을 대단히 칭찬하며, 그런 사람들을 대단히 존경하며 높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미움을 받는 것이라고(눅16:15) 말씀하십니다.
⑦ 이 모든 것들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킵시다.
우리가 어디에 속해 있고, 어떠한 위치에 있으며,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 그러한 조건들을 의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새로운 성품을 받았느냐? 우리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얻었느냐?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덕적일 수도 있고, 성경에 능통할 수도 있고 모든 것을 유대인들이 했던 것보다 더 잘한다고 할지라도 정죄 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마음의 상태로서 우리가 새로운 성품, 새로운 마음, 성령이 거하시는 마음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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