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절 전혀 예기치 않은 상태에서 로이드존스 박사에게 큰 힘을 준 또 다른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인도 마드리스의 『가디언』지의 편집장보였던 마크 순다라오라는 인도 사람이 쓴 글이었다. 같은 해 『브리티쉬 위클리』지가 '강단의 거장들'이라는 시리즈 - 거기에 로이드존스의 이름이 빠져 있는 것이 두드러졌다 - 를 연재하고 있을 때, 그는 영국에 머물면서 그 잡지에 임시직으로 고용되어 있었다.
1949년 9월 15일호 『브리티쉬 위클리』지에 순다라오는 '한 인도인이 런던에서 한 위대한 설교자의 말씀을 듣다' 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하였다. 그는 먼저, 자기 나라에까지 복음이 이르게 하는 책임을 맡았던 교회를 알아보기 위해서 여러 다양한 교회들을 찾아다녔다고 전제한 다음, 이어서 웨스트민스터 체플에서, 그리고 로이드존스 박사의 사역에서, 해외 선교의 진정한 근원을 찾았노라고 선언했다.
그 인도 언론인은 말하기를, 강단에 서 있는 로이드존스의 모습은 언젠가 윌리엄 윌버포스에 대해서 들은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고 햇다. 그는 체구는 작았으나 '그가 말씀을 하면서부터는 그 시들어 버린 작은 난쟁이가 부풀어오르더니 장대한 거인이 되어 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계속했다.
'물론 그 유명한 설교자의 면모에서도 적지 않은 감동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결국 나를 감동시킨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주제를 전개해 나가는 동안, 그는 마치 자기보다 훨씬 위대하신 그 분에게 - 그 안에서 살고 기동하고 존재하는 바로 그 분에게 - 사로잡힌 것 같고, 혹시 좀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그 분의 힘을 받아서 말씀을 전하는 것 같았고, 바로 이 점이 나를 감동시켰다. 위대한 설교 가운데서, 또한 그런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는 징후나 암시가 드러날 때에, 그 설교는 하나의 성례가 되며, 아니, 하나의 이적이 된다.
그러므로, 몇 주간 동안 다녀본 다른 교회와는 달리, 그 체플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는 그저 나이 많은 노인들 몇 명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세대들이 골고루 섞여 있고, 특히 젊은 세대들이 드문드문 끼어 있는(나는 그들이 마치 불꽃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고 까지 표현하고 싶었다!) 그런 경건한 사람들의 활기 있는 교제가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그럴까? 바로 이 것이 중요한 점이다. 이 전형적으로 비국교적인 체플에서 필자는 16세기의 종교개혁과 18세기의 부흥의 의미를 - 곧, 복음이 회중들 사이에 선포되고 땅 끝까지 전파되는 바로 그 곳에 교회가 있다는 것을 - 곧바로 느끼게 되었다. 예배 의식과 교회의 질서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들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역동적이며 활기 있게 움직이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복음 그 자체다. 하나님의 임재의 사실이요, 그가 우리의 삶에 관여하신다는 사실이요, 현세에서나 내세에서 그 어떠한 것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의 충족하심이다. 이런 것들이 마틴 로이드존스 박사의 설교의 요점이다.'
그 설교자가 이 말씀들을 읽는 동안, 나는 그가 여러 가지 작은 일들로 고통을 받았으나 그런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그 말로 다할 수 없는 특권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로이 느꼈을 것으로 확신한다.
(마틴 로이드존스 중기 / 323쪽)
'좋은 말씀 > 로이드 존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교자 로이드존스 2 (0) | 2016.03.02 |
---|---|
설교자 로이드존스 1 (0) | 2016.03.01 |
로이드존스 설교의 요점 2 / 송삼용 목사 (0) | 2016.02.28 |
로이드존스의 설교의 요점 / 이안 머레이 (0) | 2016.02.27 |
강단의 영성 - 로이드존스 / 송삼용 목사 (0) | 2016.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