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1973

야고보와 요한 (막 1: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막 1:19)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도의 대표를 베드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3명의 수제자에는 베드로를 포함해서 야고보와 요한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산위에서 신비한 모습으로 변화하던 그 순간에 함께 했으며, 공생애 마지막에 잡히시던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스럽게 기도하실 때도 함께 했습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가 먼저 부름을 받았고, 그 뒤로 야고보와 요한이 부름을 받았습니다. 또한 누가 뭐래도 베드로는 사도 중에서 수장입니다. 그렇다면 수제자에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가 포함되는 게 순리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야고보와 요한이 포함되었습니다. 여기에 무슨 내막이 있는지 ..

버림과 따름 (3) (막 1: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막 1:18) 우리의 현실적인 신앙에서 “버림”이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니까, 이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유와 같은 복음찬송에서 볼 수 있듯이 무언가를 크게 버린 것처럼 생각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버렸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 딱히 내세울게 없을 겁니다. 물론 여기에도 개인 차이가 큽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것을 포기했을 것이며, 어떤 사람은 그런 게 전혀 없기도 하겠지요.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어느 정도나 버렸을까요? 그냥 쉽게 생각해봅시다.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살아가는데 가장 우선적으로 다가오는 어려움은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버림과 따름 (2)(막 1: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막 1:18) 막 1:18절 말씀에서 “따름”이 핵심이긴 하지만 “버림”과 변증법적인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어제 스쳐지나가듯이 지적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서 자기 영혼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그 이외의 것을 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버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선 본문의 묘사를 그대로 따른다면, 시몬 형제는 그물을 버렸다고 합니다. 그물은 그들의 삶을 지탱시켜주는 도구였습니다. 매일 그물을 챙겨 들고 배를 타고 고기를 잡던 그들이 그물을 버렸다는 건 이 땅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기본적인 방식을 근본적으로 포기했다는 의미이겠지요. 여기서 우리는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아무리 예수님에게서 비범한 카리스마가 풍긴다고 ..

버림과 따름 (1)(막 1: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막 1:18) “나를 따라오라.”는 말씀을 들은 시몬 형제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시몬 형제의 그물을 왜 언급했을까요? 사실 어떤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는 긴박한 순간에 그물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닐 텐데 말입니다. 여기에 마가의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 아닌지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그것의 명확한 실체를 잡아내기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물론 신앙적인 차원에서 이렇게 설명할 수는 있겠지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것 마저 포기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성서를 읽을 때가 많습니다. 이런 시각은 잘 알려진, 무난한 해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성서 전체의 관점에서 조금 다른 시각으로 해..

“나를 따라오라!” (3)(막 1: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막 1:17) 예수님은 왜 시몬 형제들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본문은 그 대답을 정확하게 제시합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사람을 낚는다는 표현이 우리에게 썩 유쾌하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고기를 낚는 것처럼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 들인다는 의미일 텐데, 번역자들이 그걸 우리말로 아름답게 표현할 길이 없었나 봅니다. 이미 우리에게 잘 적용된 용어니까 우리가 굳이 다른 단어를 찾아 나설 필요는 없겠지만, 자칫 그리스도교의 복음과 선교와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제반의 문제들이 이런 용어로 인해 방향을 잃을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말에는 그 대상을 도..

“나를 따라오라!” (2)(막 1: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막 1:17) “나를 따라오라!”는 문장을 구성하고 있는 두 번째 단어는 “따라오라”입니다. 예수님은 “네 속의 부처를 찾으라!”라거나 “네 내면의 평화를 확보하라!”고, 또는 “네 사랑의 능력을 키워라!”가 아니라 아주 명백하게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두 번째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일까요? 어제의 말씀묵상에서도 한번 짚었지만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의 특징을 너무 종교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이나 고통스러운 삶에서의 회복이나 심리적인 위로를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간다는 분들도 많습니다. 심지어는 담배와 도박을 끊기 위해..

“나를 따라오라!” (1)(막 1: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막 1:17)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뿌리째 흔들었습니다. 이 말씀에 의지해서 세속에서 이루고 싶었던 모든 삶을 포기하고 수도원으로, 오지로 떠난 이들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인류 역사에 등장한 수많은 위인들의 어록에서 바로 이 예수님의 말씀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말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 명령문은 두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라’로 구성되어 있는 아주 짧은 문장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바로 ‘나’를 가리키는 예수에 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절대적인 중심입니다. 이 예수는 2천 년 전 목수의 아들로 살았던 역사적인 인물..

말의 힘 (막 1:1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막 1:16) 예수님은 그물을 던지고 있던 시몬 형제들을 보시고 이렇게 말을 거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예수님이 구체적인 사람을 보고 말씀하신 첫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군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소리를 내어 말씀하셨답니다. 인간은 언제부터 말을 하게 되었을까요? 이를 위해서는 고고학의 도움을 받아야하겠지만, 우리는 정확한 시대를 알 필요가 없으니까 대신 신생아를 보면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를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어머니의 몸에서 처음 떨어져 나왔을 때 신생아에게 가장 중요한 생명 현상은 숨 쉬는 것과 우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모든 생명의 조건을 탯줄을 통해서 공급받았기 때문에 ..

일상의 힘 (막 1: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막 1:16)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님과 시몬 형제와의 만남을 아주 간단하게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고기를 잡고 있던 그 형제를 보았다고 합니다. 본문이 정확하게 보도하지 않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상식적으로 봐도 예수님은 매일 새벽마다 그 해변을 산책하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시몬 형제를 한 두 번 본 게 아닐 겁니다. 어쩌면 그들과 여러 번 대화를 나누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일상적으로 해변을 산책하셨고, 시몬 형제는 일상적으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을 잘 보십시오. 어쩌면 매우 건조하게 보입니다. 동사만 보시죠. ..

회개와 복음 (4)(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어제 묵상의 마지막은 신앙적인 업무를 대폭적으로 축소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관심을 쏟는 것이 회개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대목에서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습니다. 모이기에 힘써야 하고,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해야 할 마당에 그런 일들을 줄이라는 게 말이 될까요? 그리고 더 본질적으로, 그런 축소가 왜 회개인가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오해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일을 대신한다는 생각입니다. 그건 착각입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가중 중요한 일인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