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막 1:18)
우리의 현실적인 신앙에서 “버림”이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니까, 이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유와 같은 복음찬송에서 볼 수 있듯이 무언가를 크게 버린 것처럼 생각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버렸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 딱히 내세울게 없을 겁니다. 물론 여기에도 개인 차이가 큽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것을 포기했을 것이며, 어떤 사람은 그런 게 전혀 없기도 하겠지요.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어느 정도나 버렸을까요?
그냥 쉽게 생각해봅시다.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살아가는데 가장 우선적으로 다가오는 어려움은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일과 헌금을 드리는 일, 그리고 나름으로 교회 조직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 이외에 신앙의 이름으로 참여하는 사회봉사도 있긴 하지만 이건 그렇게 본질적인 요소는 아닙니다. 일주일에 최소한 한번, 아니면 두세 번을 교회에 나온다는 것은 시간을 포기해야만 가능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매일 새벽 시간과 정기적인 특별 기도회와 모임을 위해서 시간을 내야합니다. 웬만한 정성이 아니면 이런 신앙생활을 유지하기 힘듭니다. 헌금도 역시 마찬가지이겠지요. 웬만큼 신앙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은 소위 십일조 헌금을 합니다. 돈을 포기한다는 건 오늘과 같이 자본이 절대적인 힘을 행사하는 이런 시대에서는 웬만한 결기가 아니고 가능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무언가를 조금 더 포기한 사람들은 목사가 되거나 선교사가 되고, 그것도 아니라면 장로가 되겠지요. 그들은 거의 모든 세속의 삶을 포기할 정도로 교회생활에 묶여서 지닙니다. 이런 게 모두 시몬 형제처럼 그물을 버리는 태도와 비슷하다고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과연 그런가요?
이런 “버림”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결정적이거나 본질적인 게 아닙니다. 만약 이런 버림이라고 한다면 개신교 목사들보다는 천주교의 신부들이, 더 나아가서 세속과 완전히 결별한 수도사들이 한 수 윗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일상적인 삶을 포기하는 일은 그렇게 불가능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체면 때문에, 또는 종교적 명예심 때문에도 가능합니다. 이런 버림은 율법의 차원에 불과합니다. 도덕적인 가치로서는 그런대로 괜찮지만 신앙의 본질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버림”은 무엇일까요?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를 버리는 게 핵심입니다. 이 말은 곧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게 가장 힘들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왜 이게 가장 힘든지에 대해서 제가 여기서 일일이 언급할 필요가 없겠지요. 아마 저를 포함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포기하지 못할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합니다. 돈이나 시간이나, 심지어 명예까지 포기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자아를 포기하지는 못합니다. 저는 아직 그런 분을 못 보았습니다. 그런 장로도, 목사도 못 보았습니다. 물론 저도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은 아예 불가능한 건지 모르겠군요. 이런 불가능한 일은 베드로 같은 사도 정도의 영적 경지에 들어간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걸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지 이것만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버릴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버리지 못한 채 돈 몇 푼, 시간 몇 조각을 바쳤다는 이유로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받겠다는 심보는 놀부와 같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포기한 게 없습니다.” 하고 고백하는 게 정직한 게 아닐는지요.
조금 강하게 말씀드리는 걸 용서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억지로 헌금하거나 시간을 내지 마십시오. 교회 중직이라는 체면 때문에 그런 일들을 하지 마십시오. 그런 행위는 우리의 영성을 파괴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들이 우리를 바리새인들처럼 자기의 업적에 의존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자기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한 세리처럼 주님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그의 영혼에 훨씬 바람직합니다.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무언가를 버린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버리지 않은 사람이 있고, 겉으로는 아무 것도 버린 것이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자기가 무엇을 버린 것 같은 생각과 그런 말들은 아예 꺼내지 맙시다. 그 판단은 마지막 심판 때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이런 기도를 드립시다.
키리에 엘레이송!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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