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1973

회개와 복음 (3)(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오늘 본문의 구조를 그대로 따른다면 회개는 복음을 믿는 것의 전제 조건입니다. 혹은 회개가 복음의 선행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바꾼다는 의미의 회개 경험이 없다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논리를 따라오지 못할 것 같은 노파심이 들어, 이 대목에서 아무래도 한 번 더 짚어야겠군요. 사람들은 회개를 지나간 일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어렸을 때 주인 허락을 얻지 않고 남의 과수원에 몰래 들어가서 과일 따먹은 것을 놓고..

회개와 복음 (2)(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회개는 이 땅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하늘로 관심의 축을 옮기는 신앙적 태도이며 결단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우주 공간의 어느 한 지역을 복음서가 말하는 그런 하늘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하늘은 곧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곧 하늘이 가까이 왔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까이 온 그 하늘은 우주 물리학적인 차원에서의 하늘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또한 우리가 관심의 방향을 바꾸어야 할 그 목표도 역시 우주 공간의 하늘이 아니라 게 분명합니다. 이미 답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 같습니다. 회개는 우리에게 가까이 온 하나님의 나라, 즉 하..

회개와 복음 (1)(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를 뜻한 ‘메타노이아’라는 말은 세례요한이 선포한 설교의 핵심이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서 이 회개라는 사상을 배웠다는 의미일까요? 우리는 그런 내막을 정확하게 풀어낼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먼저 출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세례 요한에게서 나름대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세례 요한과 다를 뿐만 아니라 복음서는 거의 일방적으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사상적 교류에 관한 정보를 복음서에서 찾아내..

하나님의 나라 (10)(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하나님의 나라’를 주제로 한 이 성서묵상은 오늘로 일단락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초석이며 목표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훨씬 많은 논의가 필요하긴 합니다. 어제 언급한 부활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도 여전히 보충 발언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타종교의 문제나 하나님 나라의 속성인 평화와 오늘의 폭력 문제도 다루어야 하겠지요. 하나님의 나라와 윤리 문제도 할 말은 많겠지요.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역시 인간의 성이 필요할까요? 하나님의 나라와 외계인의 관계는 어떨까요? 하나님 나라와 심판, 하나님 나라와 구원의 문제도 다루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마가복음의 진도를 위해서 여기서 접고, ..

하나님의 나라 (9) (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이 땅의 나라에서 경험하는 생명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되어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면서 사는 게 곧 그리스도교 신앙의 토대라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 무엇인가를 질문해야 할 차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 있는 게 아니라는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일단 정의, 평화, 기쁨, 자유 같은 정신적인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그런 속성들은 이미 이 땅에서 경험하는 것들입니다. 정의로운 세계, 평화로운 삶은 이 땅에서도 우리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근사하게 경험할 수 있을 뿐만 아..

하나님의 나라 (8) (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우리에게 가까이 온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혹은 이 땅의 나라와 일단 구별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 밖에 없다면, 또는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의 나라가 동일하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무의미하니까요. 예.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나라와 구별되며, 구별되어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하다고 말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은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스도교 교리의 차원에서 본다면 이 세상은 파라다이스인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의 후손들이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방..

하나님의 나라 (7) (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하나님의 나라는 왔습니까? 마가복음이 ‘가까이’ 왔다고 말하지 이미 왔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무시해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표현은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을 가리키는 것인지 시간의 실제적인 차이를 가리키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이 전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개인적인 삶이나 인류 역사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는 흔적이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 이전이나 이후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으며, 더구나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는데도 실제로 달라진 것은 별로..

하나님의 나라 (6) (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오늘의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 존재의 근거로 삼지 않는다는 것은 비극이며 불행입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도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간혹 하나님의 나라(바실레이아 투 데우)를 언급하지만 실제로 그 하나님의 나라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고 그 의미를 되돌아보고 해석하고 선포하는 설교자들이 있나요? 하나님의 나라와 생명이 어떤 관계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설교자들이 있나요?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교회 안에서 중심 주제로, 소위 아젠다로 부각되지 않기 때문에 일반 평신도들도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하려는 ..

하나님의 나라 (5) (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고, 따라서 하나님을 아직 명료하게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를 그런 차원에서 알 수는 없습니다. 이 문제는 앞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가 일치한다는 사실을 짚었을 때 이미 드러난 사실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직접적으로, 전체적으로, 명료하게 알 수 없다면 결국 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무의미한 게 아닌가, 하는 주장이 가능합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아직 완전하게 모른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와 무관한 건 결코 아닙니다. 예컨대 어린아이들이 부모의 생각을 충분하게 헤아리지 못한다고 해서 부모가 그들의 삶과 무관하거나 ..

하나님의 나라 (4) (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우리는 점점 신학적인 사유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나라는 곧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했다는 말이 됩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이 선포한 그 하나님의 나라와 그 통치를 예수님과 일치시켰습니다. 어느 신학자의 표현처럼 선포자가 선포된 자와 아이덴티파이 되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대상으로 선포했는데, 초기 그리스도교에 의해서 그 대상이 주체와 하나가 된 겁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일치입니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