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기독교개혁신보컬럼 671

‘계시’는 항구적 가치의 기준이다 / 김영규 목사(뉴욕학술원 ·남포교회 협동목사)

2005년 1월 26일 지금 한국은 국민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해서 내수 부진을 타개하고 일자리 창출과 높은 고용의 질의 개선을 위해서 머리를 맞대고 있다. 그러나 그 문제는 단순히 한국의 문제가 아니고 인류 미래사회 발전의 한계와 전반적 위기 내용과 분리될 수 없는 문제라면, 전혀 다른 접근이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가정파괴의 조건으로 여성과 자녀들이 가정으로부터 해방되어 고부가 가치형 인적 자원으로 탈바꿈하려고 할 때, 잠정적으로 늘어나는 비정규직을 모두 정규직으로 바꾸기를 원한다면, 그 대안은 미래사회의 기업발전에 있어서 핵심인 노동시장이나 인적자원의 기능적 유연성을 신장하는 데 방해가 될 것이다. 그때는 역으로 모든 정규직을 비정규적으로 바꾸어 국가 전체 인적자원의 통합적 관리체제로 바꾸어..

바뀌어야 할 장례예식 문화 / 김북경 목사(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총장)

2005년 1월 26일 교회는 세 가지 임무를 띠고 있다고 한다. 즉 유아세례와 혼인식을 올리는 일과 죽으면 묻는 일이다. 교인을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책임져 준다는 말일 게다. 영국교회에서는 예배당에 관을 모셔놓고 장례예배를 드린다. 고인의 주검을 앞에 놓고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며 동시에 일생을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부활의 소망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공간이다. 관이 앞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은 기분 상 차이가 크다. 장지에 가서는 마지막으로 한 줌의 흙을 관 위에 뿌린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이다. 고인의 시체는 구약에서 말하듯 부정한 것이 아니고 영혼이 떠난 몸이 썩어갈 뿐이다. 시체는 영혼이 떠난 몸일 뿐 요새는 묻을 땅이 없어 화장..

죽음,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인가? / 김북경 목사(에스라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2005년 1월 12일 나는 최근에 태국에 갔었다. 해변에서 여름을 즐기다 왔다. 인도양의 참사가 일어나기 며칠 전에 빠져 나왔다. 영국에 도착한 후에야 해일이 할퀴고 간 참혹한 광경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다.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며칠 전에 거기 있었는데 나는 지금 시공간을 넘어 조용한 시골집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파도의 위력에 휩쓸려 갔다. 엄마가 없어 졌다. 아빠가 떠내려갔다. 아들이 없어졌고 사랑하는 딸이 안 보인다. 푸켓트, 아체, 스리랑카의 해변은 해전을 치른 쓰레기장이 되었다. 그들은 죽어서 쓰레기가 되었다. 나는 살아서 쓰레기를 본다. 내 허파에는 바람이 들락거리고 내 손가락은 살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유가족들은 울고 있다. 나는 웃고 있다. 시체는 울지도 웃지도..

과거사 청산과 새 역사 / 김북경(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총장)

2004년 12월 30일 남아공에서 아파테이트가 종식되고 흑인정부가 수립된 후 과거사 청산이 문제되었었다. 백인들의 잔학한 손에 고문당하고 죽어간 수많은 순국자들의 피가 원성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처와 아픔을 치유할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Peace and Reconciliation Committe(평화와 화해 위원)였다. 이 위원회에(어느 기간까지) 자진 신고하여 자기 범죄를 솔직히 고백하는 자는 용서를 받거니와 자진신고하지 않고 숨어 있다가 고발되면 가차없이 처벌받게 되어 있다. 현명한 해결책이라고 생각된다. 덮어놓은 문화 우리는 덮어놓기를 잘한다. 믿어도 덮어놓고(성경을?) 믿고 사건이 터지면 뚜껑 덮기에 바쁘고 누가 앞에 걸리면 쉬~쉬~하는 분위기다. 고 한경직 목사는 ..

이미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는 ‘인간’ / 김영규 목사( 뉴욕학술원, 남포교회 협동목사)

2004년 12월 30일 인간이 자신이 만든 장난감이나 로봇에게 자신을 줄려고 한다면, 어떻게 줄 수 있을까? 우선 인간처럼 같은 형상이나 기능을 가져야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손을 내밀어 받을 것이다. 받을 능력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그것은 선물일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그의 은혜와 선물을 받을 그릇으로 창조되었다. 무로부터 그의 은혜를 주기 위해서 교통하는 자로 창조된 인간 앞에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 자신이 어떻게 주어질 수 있을까? 하나님 자신을 아무리 축약해서 줄 수 있더라도 우주 안에 인간에게 지각될 수 있는 형태로 축약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그의 속성들에 있어서 첨가도 없고 잉여도 없다면 그런 축약이란 불가능하고 축약을 대신하는 자연이나 섭리 안에서의 계속적 은..

라운드어바웃(일명 로터리)의 인생 철학 / 김북경 목사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총장)

2004년 12월 16일 우리 학교에 가까이 있는 용미리 공동 묘지 가는 길에 고양동 삼거리라는 곳이 있다(실제로는 사거리다). 이 사거리야말로 럭비시합을 방불케 한다.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차들이 머리를 들이밀며 쳐들어간다. 좋아하는 소올(장애인이 음식을 나르는 식당)에 갈 때마다 통과해야하는 전장이다. 그러나 아직 한 번도 전사자를 본 적이 없다. 기적이다. 그런데 이 사거리를 빠져나가는 데는 전략이 필요하다. 운전하는 사람의 얼굴에는 적진으로 돌진하는 병사의 장엄함이 엿 보인다. 나도 옆에서 덩달아 오른발에 힘을 주고 손잡이를 꽉 잡는다. 사거리에 도달하면 눈치작전이 시작된다. 우선권을 알려주는 신호등이 없기 때문이다. 먼저 끼여들 틈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전진!’이라는 명령에 따라 차머리를 들 이민..

성경의 역사적 진실성은 하나님께 의존된다 / 김영규(뉴욕학술원, 남포교회 협동목사)

2004년 11월 5일 성경의 역사적 기술들이 실제적으로 고고학에 의해 구성된 역사지도와 어떤 정도로 만날 수 있는가는 아주 어려운 주제이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고대 세계지도는 고대 애굽이나 고대 바빌로니아 수학 책처럼 그림이 아닌 서술체로 된 창세기 10장에서 만난다. 그러나 그 내용이 고고학적으로 고증되는 정도는 악카드(셈족) 언어로 브라트(현 유프라테스)강과 힛디글(현 티그리스) 강줄기를 따라 악카드, 우륵, 니느웨, 쿠아라, 키쉬 등이 증명되고 야완이 고증되는 정도이다. 성경 외에 가장 오래된 도시목록(주전 3000년 전)은 우륵에서 발굴된 것들로서 얼마나 넓은 지역인지 더 연구되어야 한다. 에블라(Ebla) 토판 중에서 이태리 학자 G. Pettinato에 의해서 처음 공개된 그렇게 넓은 범위의..

목회자를 기쁘게 하는 것들 / 이은상 목사(동락교회)

2004년 10월 20일 ‘슛 골인!’ 주인공은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로 세레머니를 합니다. 자랑스럽고 행복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동료선수들과 기뻐 뜁니다. 득점의 주인공은 국가대표 선수가 아닙니다. 축구경기도 국제경기가 아닌 동네 조기축구의 친선경기였습니다. 그런데 관중도 상급도 없는 별 볼일 없는 운동장에서 주인공은 마치 월드컵경기에서 골인을 넣은 것처럼 기뻐하고 열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누구이며 왜 이렇게 열광하고 있을까요? 주인공은 목사입니다. 개척교회, 성도 수가 아주 작은 교회의 담임목사입니다. 필자는 주인공을 보면서 문득 목회자를 기쁘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도대체 목회자들은 무슨 재미로 살며 또한 어떤 일로 기뻐할까?’ 여기에 대한 모범 답안은, 목회자는 먼..

계시의 역사는 하나님의 진실성에 의존해 있다 / 김영규 목사(뉴욕학술회원, 남포교회 협동목사)

2004년 10월 7일 미래에 대한 인간 세계의 발전 속도에는 당연히 인간 수명의 속도, 인간 세포들의 활동 속도, 인식의 속도, 감정의 속도, 유행 전환의 속도, 오류의 속도를 계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속도를 결정하는 수많은 인간인자들 중에 인간의 근원적 오류로서 지향성 자체의 오류와 판명성 오류는 언어 사용이나 표상 활동 이전에 인간 의식과 함께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그 오류로부터 자유로운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인간의식의 근원적 오류 벗어날 수 없어 성경에서 죽음에 이르는 형벌의 전 단계로서 인간의 근원적 죄가 지적될 때, 지향성 자체의 오류가 근원적 오류로서 지적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숨고 피하며 두려움과 핑계 행위 이전에 죄의 근원적 상태(창 3:7)는 인식론적인 그 두 오류..

동물에 비유한 세상 / 이은상 목사 (동락교회)

2004년 9월 23일 1970년대 ‘행복의 나라’라는 노래로 통기타와 자유의 청년문화를 구가하던 한 젊은 가수가 오십을 넘긴 나이에 쓴 자서전의 제목이 재미있어서 불러봅니다. ‘사는 것도 제기랄, 죽는 것도 제기랄.’ 물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의미가 통하지 않는 말이지만 요즈음 같이 여러모로 꼬인 세상에서 앞의 운율만이라도 불러보고 싶은 충동이 일 때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바꾸어 불러보면 어떨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사는 것은 제기랄, 죽는 것은 지화자.’ 짜증이 나거나 스트레스가 도에 지나치거나 누군가에게 욕을 퍼붓고 싶을 때 한 번쯤 불러보면 죄가 되는 건지요? 요즈음 국민들 겉으로는 ‘대-한민국’ 그래도 속으로는 다 ‘—‘할 것 같은데요(?). 정신나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