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기독교개혁신보컬럼

죽음,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인가? / 김북경 목사(에스라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새벽지기1 2020. 12. 20. 07:37

2005년 1월 12일

 

나는 최근에 태국에 갔었다. 해변에서 여름을 즐기다 왔다. 인도양의 참사가 일어나기 며칠 전에 빠져 나왔다. 영국에 도착한 후에야 해일이 할퀴고 간 참혹한 광경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다.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며칠 전에 거기 있었는데 나는 지금 시공간을 넘어 조용한 시골집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파도의 위력에 휩쓸려 갔다. 엄마가 없어 졌다. 아빠가 떠내려갔다. 아들이 없어졌고 사랑하는 딸이 안 보인다. 푸켓트, 아체, 스리랑카의 해변은 해전을 치른 쓰레기장이 되었다. 그들은 죽어서 쓰레기가 되었다. 나는 살아서 쓰레기를 본다. 내 허파에는 바람이 들락거리고 내 손가락은 살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유가족들은 울고 있다. 나는 웃고 있다. 시체는 울지도 웃지도 못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은 우는가보다.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한 책임 느껴

 

인생은 웃음과 울음의 교차이다. 울음과 웃음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는데 나는 왜 살아있는가? 하나님만 아시는 비밀이다. 시공간적으로 죽음에 가까이 갔다온 기분이다. 죽음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삶에 대한 애착과 연장된 생명에 대한 책임을 더욱 느낀다.


죽음은 산 사람 안에 묘한 심리를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죽음의 고통을 외면하고 동시에 죽음을 미화시킨다. 아픈 마음을 달래고 싶어서일 게다. 영국의 교회 앞뒤 뜰에는 성도들의 묘와 비석이 즐비하게 서있다. 교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교회는 죽음을 미화시키지도 않는다.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런데 죽음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죽음이다. 이 패러독스를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실천하셨다. 그래서 교회는 죽음을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다.

 

교회만이 죽음에 도전할 수 있어

 

어느 꽃가게에서 꽃 배달 주문 두 개를 받았다. 하나는 회사이전을 축하하는 화환이고 또 하나는 초상집에 보낼 조화였다. 그런데 배달이 잘못되어 회사이전을 축하하는 화환이 초상집에 배달되었다. 상주가 카드를 열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이번에 이사하게 됨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정말 그렇다. 예수 믿고 죽는 사람은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서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이사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교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미화하지도 않는다.


어떤 한인교회가 주일에 빌려 쓸 예배당 건물을 찾고 있었다. 아담한 교회를 찾았는데 한가지 흠이 있었다. 교회 앞마당에 묘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성도들이 매주 무덤을 지나서 교회에 들어가야 하는데 교인들이 무덤 때문에 기분이 상할 것이고 그래서 교회 성장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고 한다. 한번 곰곰이 생각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