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30일
인간이 자신이 만든 장난감이나 로봇에게 자신을 줄려고 한다면, 어떻게 줄 수 있을까? 우선 인간처럼 같은 형상이나 기능을 가져야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손을 내밀어 받을 것이다. 받을 능력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그것은 선물일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그의 은혜와 선물을 받을 그릇으로 창조되었다. 무로부터 그의 은혜를 주기 위해서 교통하는 자로 창조된 인간 앞에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 자신이 어떻게 주어질 수 있을까? 하나님 자신을 아무리 축약해서 줄 수 있더라도 우주 안에 인간에게 지각될 수 있는 형태로 축약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그의 속성들에 있어서 첨가도 없고 잉여도 없다면 그런 축약이란 불가능하고 축약을 대신하는 자연이나 섭리 안에서의 계속적 은택들일 것이다.
즉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창조자로서 머물면서 피조물에게 자신을 줄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은 피조물 존재 자체와 그 활동을 모두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마 하나님으로서 피조물에게 자신을 주시는 유일한 방식일 것이다. 문제는 주시는 형식이다. 피조물이 안에서 밖을 보는 자로, 하나님과 독립적인 방식으로 객관적인 자로, 그 모든 것들을 받는 자로 있다는 것 자체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주는 가장 은혜로우신 형식일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우리 인간이 남에게 주는 방식은 ‘아시모’나 ‘휴보’에서 사용된 모터운동의 어색함과 비슷하다. 인간의 세포윤리학이나 신경윤리학에서 다루는 생명의 신비에 대한 기준은 황우석 교수가 이룩한 인간체세포 복제의 기준과 다른 것과 같다. 결코 과학자들의 연구결과를 과소평가하자는 것이 아니다. 좀 더 양심이 있는 과학자들이 기초과학 분야의 세계적 경쟁환경을 객관적으로 알리고 좀 더 자연생명이나 인간생명에 대해서 겸손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미 이 칼럼에서 지적하였듯이 인간 체세포 복제의 실패의 경우에도 외국의 연구결과물들의 일반적인 수준처럼 인간체세포복제의 실패 인자들을 발견하는데 어떤 중요한 초점이 맞추어 있듯이 황우석 교수 성공의 예도 인간체세포복제 성공의 근원적 인자들을 발견하는데 초점이 맞추어 발표되었다면 더 좋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의 논문에서 이 점이 보충되었다면, 노벨상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생명체에 대한 근원적 인자 찾기 어려워
문제는 그 인자들이나 동인자들의 발견이 그렇게 용이하지 않다는데 있다. 인간과 인공로봇 사이의 차이는 인자들의 무한 수와 그런 인자들이 숨어 있는 차원들의 다양성에 있다. 1950년대부터 인간 뇌의 시상피질에 있어서 시각정보들이 재생되는 뇌 화면의 구조들이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즉 궁극적으로 우리의 시상에 참여하는 수 천억 개의 뇌 세포들 중에서 2 개 뇌 세포 단위로 200여 개의 시상 피질 뇌 세포들의 활동에 대한 연구결과에 의해서도 그 복잡한 화면이 3 차원 화면이라는 것이 밝혀져 있다. 물론 우리는 거기에 숨어있는 차원들에 대해서 알 수 없다. 의식적 자아를 주도하는 시상에 대한 그 구조가 그렇게 복잡한데, 림프계 자아나 면역체계상 자아, 모든 세포 상 자아 등 의식세계와 독립된 인간의 많은 자아들이 결합되어 있는 복합계는 더 신비로울 수밖에 없다.
생명체의 신비에 대한 경이로움 표해야
그러나 그런 세포들의 활동을 넘어 인간의 감성은 더 신비로운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꿈의 세계도 마취제나 니코틴이 기억들을 유발하는 정보전달물질들을 분자결합에 의해서 신경세포들 사이에 정보전달을 차단하듯이 단순한 물질적 역학구조로 이해해서는 아니 된다. 우리 몸의 작은 세포들 사이에 드나드는 항생체도 외부 인자들과 싸울 때 수천의 변형구조들을 가지는 것처럼 우리 생명을 유지하는 세포들 내에 단백질들은 펨토초 단위로 변형을 이루며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우리는 그 변화의 생명활동의 지도가 MRI나 PET 상의 지도처럼 밝혀질 때까지 그 생명을 존중하고 그 생명체를 다룰 때 조심해야 한다. 단순한 호기심이나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못 담근다’는 식으로 자연의 신비를 개인 소유화하는 것은 이웃을 해하는 핵무기처럼 큰 죄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신비한 형태로 이미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는 인간은 받는 것이 없다고 아우성 치기 전에 지금 있는 존재 자체로서 감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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