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 26일
교회는 세 가지 임무를 띠고 있다고 한다. 즉 유아세례와 혼인식을 올리는 일과 죽으면 묻는 일이다. 교인을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책임져 준다는 말일 게다. 영국교회에서는 예배당에 관을 모셔놓고 장례예배를 드린다. 고인의 주검을 앞에 놓고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며 동시에 일생을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부활의 소망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공간이다. 관이 앞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은 기분 상 차이가 크다. 장지에 가서는 마지막으로 한 줌의 흙을 관 위에 뿌린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이다. 고인의 시체는 구약에서 말하듯 부정한 것이 아니고 영혼이 떠난 몸이 썩어갈 뿐이다.
시체는 영혼이 떠난 몸일 뿐
요새는 묻을 땅이 없어 화장을 장려한다. 그런데 화장을 꺼려하는 마음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해가 간다. 사랑하는 이를 불로 괴롭힐 수 있겠는가? 그 귀한 몸을 한줌의 재로 만든다? 심지어 예수 믿는 이들도 화장을 꺼려한다. 재로 존재하면 부활할 때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뼈라도 남은 게 있어야 하나님이 살을 부쳐서 부활시킬 수 있지 않을까? 영국의 어떤 교단에서는 시체를 곧바로 세워서 묻었다고 한다. 주님이 오실 때 서서 기다리고 있어야 무덤에서 나오기가 쉽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나는 몇 년 전에 누님을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을 했던 적이 있다. 그 후로 벽제 화장터에는 심심찮게 다닌다. 내가 일하고 있는 학교에서 가깝고 또 상당한 분들이 화장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관이 화로에 들어가기 전에 상주와 조객들은 유리창 너머로 관을 바라보며 마지막 작별인사를 한다. 관을 관망하는 방은 수 십 개가 일렬로 서 있다. 이 때 상주의 종교에 따라서 예배를 드린다. 우리는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방에서는 목탁소리가 들려오더니 또 다른 방에서는 아이고, 아이고 하는 통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가 했더니 또 한편에서는 경 읽는 소리가 들렸다. 한 순간에 여
러 소리가 비빔밥이 되어 나왔다.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찬양을 잘 듣지 못하실 것 같아 목소리를 더욱 높였고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종교다원주의가 잘 나타난 광경이었다.
다양한 형태의 장례예식
누님의 재가 담긴 항아리를 장지에 가서 묻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벽제 화장터에 마련된 영안실에 모시기로 했다. 이 영안실은 한약재 설합같은 것이 수 백 개가 진열되어 있다. 도서관을 방불케 한다. 설합에는 고인의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작고한 날자가 써있다. 여기서는 젯밥도 드릴 수 없고 예배도 드릴 수 없다. 다만 설합 앞에 서서 묵도할 수밖에 없다. 재 앞에서 기도하는 것이 무슨 뜻이 있으랴. 살아있는 사람의 외로움을 달래는 것밖에는.
우리 학교에서 조금 더 가면 용미리 묘지가 있다. 최근에 서울시에서 용미리에 공원을 조성하고 공원 안에서 자유롭게 고인의 재를 뿌리게 한다. 공원 한 가운데에는 기념비가 있는데 여기에는 누구나 와서 고인을 기리는 그야말로 공동 기념비이다. 선거 때마다 명당을 찾아 조상의 묘를 옮기는 습관과는 대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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