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대든지 교회가 방향을 잃어버리는 까닭은 <사도행전>에서 그 방향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는 조직체가 아니라 유기체입니다. 그들은 소수의 사람이었습니다. 사회적 지위도 없었고, 풍부한 재물도 없었습니다. 마땅히 그들을 소개할 도구도 없었던 미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6절에서 그 소수의 미약한 사람들이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들은 불과 200년 만에 로마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그들은 어떤 공동체로 존재했기에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영향력이 미미했던 소수의 사람이 역사상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을까요? 바로 그것을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세력을 이야기한 게 아닙니다. 어떤 선한 사업을 행함으로 영향력이 확대된 것도 아닙니다. 물론 초대교회 역사에서 로마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헌신적으로 봉사해서 선한 영향력을 끼쳤고, 그것이 복음 전파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선행만으로 영향력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그들이 살아 움직이게 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기적 공동체로 만든 게 단 한 가지 이유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계신 사실을 전했고, 예수님을 통해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과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이야기를 얼마나 충실하게 전하는 가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가 어떤 선한 행동을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과 연관되어야 합니다.
교회, 예수와 하나님 나라의 증인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의 증인들이라는 정체성에서 결코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 고난당하신 후에 자신이 살아계심을 여러 가지 확실한 증거로 사도들에게 직접 보여 주셨고 40일 동안 그들에게 나타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을 말씀하셨습니다”(3절).
부활하신 이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집중적인 교훈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말씀하신 내용도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 1:15).
교회의 존재 목적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 온전히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관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느 나라에 파송 받은 대사가 정책을 만들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보낸 본국의 정책과 의견을 전달할 뿐입니다. 자신을 위해 보냄을 받은 게 아니라 보냄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이라는 제국에 보냄을 받은 대사관입니다.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연결하는 것입니다. 땅에 속한 세상과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나라를 연결하는 것입니다. 유한한 세상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연결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보냄을 받은 이 시대 제국은 어떤 모습입니까? ‘포스트모던’, ‘탈근대주의’라고 불리는 사상이 지배하는 새로운 제국입니다. 이 사상과 문화가 복음적인 신앙을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진보와 해방’, 심지어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세상을 세속화하는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을 포스트 모더니즘이 휩쓸 때 절대 진리를 말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말하는 성경을 부정하며,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게 당연한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반면 아직도 신앙의 자유가 없고, 우상을 섬기는 이교 지역, 핍박이 있는 지역,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지역에서는 교회가 성장하고 있습니다. 역설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풍족한 서구 사회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나라에 절망하고, 세상의 제국에 의해서 핍박받는 영역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실제가 체험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시대가 로마 제국에 있었던 변화와 동일한 유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핍박이 있었던 로마 제국 시대의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강력하게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의 역사가 바로 그 역사입니다. 교회가 핍박과 고난 속에 있을 때 하나님 나라의 실제가 나타났습니다. 주후 3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인이 너무 많이 증가하자 그것을 무시할 수 없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국교화되면서 사람들이 세상의 제국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항상 역사에서 일어나는 역설입니다. 아이러니입니다. 자유롭고 풍족할수록 하나님의 나라를 열망하지 않게 되고, 세상의 제국이 어떤 우상을 섬기든지 휩쓸리고, 세상에서 결핍과 고난, 아픔과 상처, 시련과 핍박 속에 있을 때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게 됩니다. A.D. 303년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사람들이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메시아가 다시 온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인 줄 착각했습니다.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두 도성>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로마 제국이 하나님의 도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나라는 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로마 제국이 법적으로 교회를 보호하고 있는 때가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예견했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존재 목적은 이 세상 나라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대사관으로 존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한다. 그 나라가 온전히 임할 것이다. 그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곧 예수 그리스도다. 그분이 진리이며 생명”이라는 사실을 교회가 명확하고, 분명하고, 담대하게 증거할 때 생명력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의 증인들이라는 정체성에서 결코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 고난당하신 후에 자신이 살아계심을 여러 가지 확실한 증거로 사도들에게 직접 보여 주셨고 40일 동안 그들에게 나타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을 말씀하셨습니다”(3절).
부활하신 이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집중적인 교훈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말씀하신 내용도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 1:15).
교회의 존재 목적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 온전히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관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느 나라에 파송 받은 대사가 정책을 만들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보낸 본국의 정책과 의견을 전달할 뿐입니다. 자신을 위해 보냄을 받은 게 아니라 보냄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이라는 제국에 보냄을 받은 대사관입니다.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연결하는 것입니다. 땅에 속한 세상과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나라를 연결하는 것입니다. 유한한 세상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연결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보냄을 받은 이 시대 제국은 어떤 모습입니까? ‘포스트모던’, ‘탈근대주의’라고 불리는 사상이 지배하는 새로운 제국입니다. 이 사상과 문화가 복음적인 신앙을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진보와 해방’, 심지어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세상을 세속화하는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을 포스트 모더니즘이 휩쓸 때 절대 진리를 말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말하는 성경을 부정하며,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게 당연한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반면 아직도 신앙의 자유가 없고, 우상을 섬기는 이교 지역, 핍박이 있는 지역,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지역에서는 교회가 성장하고 있습니다. 역설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풍족한 서구 사회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나라에 절망하고, 세상의 제국에 의해서 핍박받는 영역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실제가 체험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시대가 로마 제국에 있었던 변화와 동일한 유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핍박이 있었던 로마 제국 시대의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강력하게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의 역사가 바로 그 역사입니다. 교회가 핍박과 고난 속에 있을 때 하나님 나라의 실제가 나타났습니다. 주후 3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인이 너무 많이 증가하자 그것을 무시할 수 없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국교화되면서 사람들이 세상의 제국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항상 역사에서 일어나는 역설입니다. 아이러니입니다. 자유롭고 풍족할수록 하나님의 나라를 열망하지 않게 되고, 세상의 제국이 어떤 우상을 섬기든지 휩쓸리고, 세상에서 결핍과 고난, 아픔과 상처, 시련과 핍박 속에 있을 때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게 됩니다. A.D. 303년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사람들이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메시아가 다시 온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인 줄 착각했습니다.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두 도성>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로마 제국이 하나님의 도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나라는 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로마 제국이 법적으로 교회를 보호하고 있는 때가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예견했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존재 목적은 이 세상 나라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대사관으로 존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한다. 그 나라가 온전히 임할 것이다. 그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곧 예수 그리스도다. 그분이 진리이며 생명”이라는 사실을 교회가 명확하고, 분명하고, 담대하게 증거할 때 생명력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교회, 성령의 능력으로 땅끝까지 나아가는 증인들
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땅끝까지 나아가는 증인들입니다.
“그들과 함께 모였을 때 예수께서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너희가 내게 들은 대로 내 아버지가 약속하신 선물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며칠 안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4~5절).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인 이유는 유월절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을 때 예수님이 불의한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넘겨지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고, 제자들이 그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과 만남을 기다리며 40여 일 동안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승천 하셨으니 제자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기에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며칠 안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며칠은 10일 정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40일 동안 나타나셨고,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오순절은 ‘50일째 되는 날’이라는 뜻이기에 이때부터 10일 후에 성령님이 임하신 것입니다. 또 “약속의 선물을 기다리라”고 하셨는데, 그 약속의 선물이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구약의 역사 속에 예언되어 오셨습니다. 예수님만 예언을 따라오신 분이 아니라 성령님도 약속하신 예언을 따라오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하나님 나라의 계획에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의 오심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구속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단계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시고, 성령님이 오실 것을 오랜 교훈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까지가 그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내게 들은 대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례받을 때 물에 잠기듯 성령 안에 잠겨서 능력을 덧입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증인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일이 성령으로 세례받는 일입니다. 성령 세례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그러나 확신의 조건입니다. 성령 세례가 교회의 일원이 되는 조건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적 교회, 증인된 삶의 조건입니다. 성령의 약속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는 게 아닙니다. 모든 이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기다리고 사모하는 이에게 임합니다. 그러므로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될 거라는 말씀은 명령이 아닙니다.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내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고, “내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증인이 될 거라는 것입니다.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뛰어넘는 특권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제자들이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일리가 있는 질문입니다. 구약 역사에서 성령의 임재, 오심, 부어주심과 세상의 마지막에 있을 이스라엘 회복과 연관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 같이 모여 있을 때 예수께 물었습니다. ‘주여,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회복시켜 주시려는 것이 지금입니까?’”(6절).
종교개혁자 장 칼벵은 제자들의 질문이 다 잘못되었다고 했습니다. ‘회복하다’는 것은 정치적인 회복을 의미했고, ‘지금입니까?’는 당장 이루어질 것을 기대했고,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여전히 편협한 선민의식, 잘못된 민족주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예수님이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은 민족적인 이스라엘의 나라, 정치적인 나라의 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온 열방에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 나라 임재를 말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8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8절).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은 순차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모든 방향입니다. 모든 방향, 다방향, 다중심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는 사람이 있고, 유대로 가는 사람이 있고, 사마리아에 가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다. ‘땅끝’은 모든 세계의 지명을 모두 쓸 수 없기에 사용한 표현입니다. 지리적, 지역적인 의미가 아니라 복음을 들어야 할 모든 사람이 있는 곳이 땅끝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이 땅끝이고, 어떤 사람은 알지도 못하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 가는 것이 땅끝입니다. 성령 받은 증인들은 온 세계에 있는 땅끝을 향해 나아갑니다. 참된 교회인가 아닌가는 땅끝을 향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보면 압니다. 땅끝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가득한가를 보면 됩니다.
제가 뉴저지 초대교회 위임목사가 되었을 때 하용조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해 주셨습니다. 그때 메시지 중에 잊히지 않는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의 크기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앉을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땅끝으로 보낼 수 있느냐에 달렸다”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그 말씀이 잊히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앉는 좌석을 가진 교회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땅끝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교회가 되는지가 중요합니다. 온누리교회에서 사역 하다가 다른 교회로 가신 어느 목사님 교회의 요청을 받아서 부흥회를 간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이 식사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이 사역을 시작할 때 그 교회에서 가장 오래된 성도가 찾아와 부탁하더랍니다. “목사님, 담임으로 오시는 분마다 이 세 가지를 강조하는데 저는 이 세 가지가 너무 싫습니다. 첫째, ‘땅끝’입니다. 가보지도 않은 땅끝을 반복해서 듣기가 싫습니다. 둘째, ‘차세대’입니다. 우리 같은 올드(old) 세대가 얼마나 헌신했는데 맨날 차세대에만 예산을 더 주는 건 싫습니다. 셋째, 새가족입니다. 담임목사님들은 새가족만 오면 맨발로 뛰어가는데 우리 같은 헌신자들은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섭섭함을 토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 말씀이 진짜냐?”고 물었더니 진짜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땅끝이라는 단어가 거부감이 들고, 차세대가 거부감이 들고, 새신자가 거부감이 드는 교회를 꿈꾼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저도 미국에서 한국으로 복귀할 때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래된 집사님 한 분이 오시더니 “목사님, 저는 새가족 많이 오는 게 싫습니다. 주차도 불편하고, 앉을 데도 없습니다. 그러니 너무 전도를 강조하지 마십시오.” 제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럼 도대체 무슨 찬송을 부르고 있고, 무슨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무슨 마음으로 신앙생활 하는 걸까요? ‘땅끝’이라는 단어가 거부감이 드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다음세대도 또 하나의 땅끝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타민족에게 가는 것이 수평적 미션이라면, 다음세대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수직적 선교입니다. 우리 다음세대는 완전히 타문화권입니다. 다음세대들은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해서 어렸을 때부터 스마트기기를 썼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하지 않고 집에서도 문자메시지로 이야기합니다. 타문화권이자 땅끝입니다. 땅끝을 향해 나아가는 증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과 함께 모였을 때 예수께서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너희가 내게 들은 대로 내 아버지가 약속하신 선물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며칠 안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4~5절).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인 이유는 유월절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을 때 예수님이 불의한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넘겨지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고, 제자들이 그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과 만남을 기다리며 40여 일 동안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승천 하셨으니 제자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기에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며칠 안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며칠은 10일 정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40일 동안 나타나셨고,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오순절은 ‘50일째 되는 날’이라는 뜻이기에 이때부터 10일 후에 성령님이 임하신 것입니다. 또 “약속의 선물을 기다리라”고 하셨는데, 그 약속의 선물이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구약의 역사 속에 예언되어 오셨습니다. 예수님만 예언을 따라오신 분이 아니라 성령님도 약속하신 예언을 따라오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하나님 나라의 계획에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의 오심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구속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단계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시고, 성령님이 오실 것을 오랜 교훈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까지가 그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내게 들은 대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례받을 때 물에 잠기듯 성령 안에 잠겨서 능력을 덧입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증인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일이 성령으로 세례받는 일입니다. 성령 세례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그러나 확신의 조건입니다. 성령 세례가 교회의 일원이 되는 조건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적 교회, 증인된 삶의 조건입니다. 성령의 약속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는 게 아닙니다. 모든 이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기다리고 사모하는 이에게 임합니다. 그러므로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될 거라는 말씀은 명령이 아닙니다.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내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고, “내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증인이 될 거라는 것입니다.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뛰어넘는 특권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제자들이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일리가 있는 질문입니다. 구약 역사에서 성령의 임재, 오심, 부어주심과 세상의 마지막에 있을 이스라엘 회복과 연관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 같이 모여 있을 때 예수께 물었습니다. ‘주여,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회복시켜 주시려는 것이 지금입니까?’”(6절).
종교개혁자 장 칼벵은 제자들의 질문이 다 잘못되었다고 했습니다. ‘회복하다’는 것은 정치적인 회복을 의미했고, ‘지금입니까?’는 당장 이루어질 것을 기대했고,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여전히 편협한 선민의식, 잘못된 민족주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예수님이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은 민족적인 이스라엘의 나라, 정치적인 나라의 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온 열방에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 나라 임재를 말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8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8절).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은 순차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모든 방향입니다. 모든 방향, 다방향, 다중심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는 사람이 있고, 유대로 가는 사람이 있고, 사마리아에 가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다. ‘땅끝’은 모든 세계의 지명을 모두 쓸 수 없기에 사용한 표현입니다. 지리적, 지역적인 의미가 아니라 복음을 들어야 할 모든 사람이 있는 곳이 땅끝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이 땅끝이고, 어떤 사람은 알지도 못하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 가는 것이 땅끝입니다. 성령 받은 증인들은 온 세계에 있는 땅끝을 향해 나아갑니다. 참된 교회인가 아닌가는 땅끝을 향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보면 압니다. 땅끝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가득한가를 보면 됩니다.
제가 뉴저지 초대교회 위임목사가 되었을 때 하용조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해 주셨습니다. 그때 메시지 중에 잊히지 않는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의 크기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앉을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땅끝으로 보낼 수 있느냐에 달렸다”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그 말씀이 잊히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앉는 좌석을 가진 교회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땅끝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교회가 되는지가 중요합니다. 온누리교회에서 사역 하다가 다른 교회로 가신 어느 목사님 교회의 요청을 받아서 부흥회를 간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이 식사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이 사역을 시작할 때 그 교회에서 가장 오래된 성도가 찾아와 부탁하더랍니다. “목사님, 담임으로 오시는 분마다 이 세 가지를 강조하는데 저는 이 세 가지가 너무 싫습니다. 첫째, ‘땅끝’입니다. 가보지도 않은 땅끝을 반복해서 듣기가 싫습니다. 둘째, ‘차세대’입니다. 우리 같은 올드(old) 세대가 얼마나 헌신했는데 맨날 차세대에만 예산을 더 주는 건 싫습니다. 셋째, 새가족입니다. 담임목사님들은 새가족만 오면 맨발로 뛰어가는데 우리 같은 헌신자들은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섭섭함을 토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 말씀이 진짜냐?”고 물었더니 진짜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땅끝이라는 단어가 거부감이 들고, 차세대가 거부감이 들고, 새신자가 거부감이 드는 교회를 꿈꾼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저도 미국에서 한국으로 복귀할 때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래된 집사님 한 분이 오시더니 “목사님, 저는 새가족 많이 오는 게 싫습니다. 주차도 불편하고, 앉을 데도 없습니다. 그러니 너무 전도를 강조하지 마십시오.” 제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럼 도대체 무슨 찬송을 부르고 있고, 무슨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무슨 마음으로 신앙생활 하는 걸까요? ‘땅끝’이라는 단어가 거부감이 드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다음세대도 또 하나의 땅끝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타민족에게 가는 것이 수평적 미션이라면, 다음세대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수직적 선교입니다. 우리 다음세대는 완전히 타문화권입니다. 다음세대들은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해서 어렸을 때부터 스마트기기를 썼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하지 않고 집에서도 문자메시지로 이야기합니다. 타문화권이자 땅끝입니다. 땅끝을 향해 나아가는 증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 예수님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증인들
교회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증인들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면서 세상을 종말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시고,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라는 두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집니다.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성령님을 보내셔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 모두 성령을 받도록 하심으로써 구원받게 하시고,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도록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왜 여기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 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11절).
예수님은 승천하셨지만, 여전히 존재하십니다. 우리 안에 임재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존재하는 성도들 가운데 여전히 임재하십니다. 예수님은 전쟁터를 버리고 떠나신 게 아닙니다. 여전히 전쟁을 지휘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전쟁에서 군사령관이 용감하게 최전방에 나가야 할 때도 있지만, 항상 그래야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최후방으로 물러서서 전쟁 전체를 지휘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승리입니다. 군사령관이 앞에 있느냐, 뒤에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가장 앞에 있어도 패배할 수 있고, 가장 뒤에 있어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심으로써, 떠나가심으로써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살아계시고,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우리 모두를 작은 예수로 변화시켜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이 기간이 은혜받을 만한 때요, 선교의 기간입니다. 이 기간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끝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 이후에는 전도와 선교가 끝납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면 할 수 없습니다. 예배는 영원토록 드립니다. 영원한 나라가 임하면 영원토록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자체가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니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나라에 가면 할 수 없는 게 있습니다. 전도와 선교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영원한 나라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이 시대, 이 기간에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증인이 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의 의무 이상의 특권이자 축복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땅끝까지, 세상 끝까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생명력입니다. 어떤 세상에서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교회를 위해 세상에 선교를 두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교를 위해 교회를 두셨다. 선교가 교회를 위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시작된 것이다.”
“‘갈릴리 사람들아, 왜 여기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 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11절).
예수님은 승천하셨지만, 여전히 존재하십니다. 우리 안에 임재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존재하는 성도들 가운데 여전히 임재하십니다. 예수님은 전쟁터를 버리고 떠나신 게 아닙니다. 여전히 전쟁을 지휘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전쟁에서 군사령관이 용감하게 최전방에 나가야 할 때도 있지만, 항상 그래야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최후방으로 물러서서 전쟁 전체를 지휘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승리입니다. 군사령관이 앞에 있느냐, 뒤에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가장 앞에 있어도 패배할 수 있고, 가장 뒤에 있어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심으로써, 떠나가심으로써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살아계시고,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우리 모두를 작은 예수로 변화시켜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이 기간이 은혜받을 만한 때요, 선교의 기간입니다. 이 기간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끝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 이후에는 전도와 선교가 끝납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면 할 수 없습니다. 예배는 영원토록 드립니다. 영원한 나라가 임하면 영원토록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자체가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니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나라에 가면 할 수 없는 게 있습니다. 전도와 선교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영원한 나라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이 시대, 이 기간에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증인이 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의 의무 이상의 특권이자 축복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땅끝까지, 세상 끝까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생명력입니다. 어떤 세상에서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교회를 위해 세상에 선교를 두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교를 위해 교회를 두셨다. 선교가 교회를 위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시작된 것이다.”
'좋은 말씀 > 이재훈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로워지는 때가 올 것이라 (사도행전 3:11~26) (1) | 2024.02.17 |
---|---|
한 마음으로 성령을 기다리다 (사도행전 1:12~26) (1) | 2024.02.01 |
세월을 아끼십시오 (엡 5:15~18) (0) | 2024.01.27 |
임마누엘 (마태복음 1:18~25) (0) | 2024.01.25 |
용서, 악을 선으로 바꾸다 (창세기 45:1-8, 50:15-21) (1) | 2024.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