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세월을 아끼십시오 (엡 5:15~18)

새벽지기1 2024. 1. 27. 06:48
오늘 본문 5장 16절에서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이 어떤 의미일까요? 여러 영어 번역본에서는 ‘시간을 다시 사라’, ‘시간을 최선으로 사용하라’, ‘모든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라’ 등의 의미로 다양하게 번역되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 속에는 분명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주어진 모든 기회를 활용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흔히 ‘시간 관리’라는 측면에서 시간을 분, 초로 쪼개서 관리하며 사는 게 과연 세월을 아낀다는 의미일까요? 분, 초까지 계산하며 살아갈 때 삶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방향을 잃어버리고, 때로 좌우를 살펴볼 겨를 없이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남단에 가면 초원에서 풀을 뜯으며 살아가는 ‘스프링복(springbok)’이라는 영양이 있습니다. 스프링복은 떼를 지어 이동하는데 수백, 수천 마리가 떼를 이룬다고 합니다. 시속 94km나 되는 빠른 발을 가지고 있어서 치타, 호랑이, 사자 같은 들짐승들도 쉽게 잡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프링복이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있어서 학자들이 그 이유를 찾아봤습니다. 그 이유는 식욕이 강한 스프링복이 무리를 지어 풀을 먹는데, 빨리 풀을 먹으려고 뛰다가 경쟁이 붙은 것입니다. 뒤처질까 계속 빨리 뛰어가다가 가속도가 붙어서 나중에는 풀을 뜯는 것을 잊어버리고 달리기만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풀을 뜯기 위해 달려가다가 경쟁심에 가속이 되어서 집단 몰사를 당한 것입니다. 바로 이 모습이 인간의 모습 아닐까요?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지도 모르고, 삶의 속도, 경쟁, 앞서가려는 마음에 자멸하는 모습입니다. 
시간의 관점에 따른 두 가지 문화 
오랫동안 선교사로 사역했던 윌리엄 맥커넬이 시간의 관점에 따라 문화를 크게 두 개로 구분했습니다. 첫째, ‘미래지향적 문화(Future-oriented culture)’입니다. 미래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에 따라 행동하는 문화를 말합니다. ‘시간 관리’는 주어진 시간에 효율적으로 가장 많은 일을 할 수 있느냐는 관점에서 시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둘째, ‘사건지향적 문화(Event-oriented culture)’입니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어떤 사건에 얼마나 충실한지에 관심을 가지는 문화입니다. 영어로 ‘future’는 미래를 가리키는 좋은 단어 같고, ‘event’는 평가절하되는 것 같은데, 이벤트는 ‘어떤 목적이 이루어지는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목적 중심의 문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사회는 우리처럼 1년 365일, 하루 24시간 숫자를 보면서 한 해를 따지지 않고, 그해에 이뤄져야 할 중요한 사건에 따라서 한 해를 마감합니다. 제가 이 시각을 가진 분을 만났습니다. 제가 미국 시카고 트리니티신학교에서 유학을 시작할 때 언어도 제대로 안 되고, 수업도 따라가기 힘들어서 페이퍼를 제대로 낼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때 들었던 과목의 교수님이 유명한 선교학자 폴 히버트입니다. 그분이 정말 인자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간에 맞춰서 페이퍼를 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당신이 이 과목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언제까지 내야 한다는 것은 신경 쓰지 마라. 당신이 학교에 몸담고 있고 내가 살아있는 한 학점을 줄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충실히 무엇을 배웠는가에 초점을 두어서 페이퍼를 내라.”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처음에는 믿기 어려웠지만, 그 말씀대로 해 주셨습니다. 제가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조금 넘었을 때 하용조 목사님이 뉴저지에 가서 담임 목회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공부하다가 어떻게 담임 목회를 합니까?”라고 했더니, 하용조 목사님이 “왔다 갔다 해”라고 하셨습니다. 서울에서 대전도 왔다 갔다 하기가 힘든데 하용조 목사님은 제게 전용기가 있는 줄 아셨나 봅니다. 제가 그 과정을 맞출 수 있었던 것은 그 교수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분명히 “내가 살아있고 당신이 학적에 있는 한 학점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교수님 과목만 들었습니다. 그래서 남들은 1년에서 1년 반에 마치는 과정을 4년에 걸쳐서 시카고와 뉴저지를 왔다 갔다 하면서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직전 폐암에 걸려서 소리도 안 나오는데 통화로 지도해 주셨습니다. 제가 거의 그분의 마지막 제자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분은 영어를 잘하는 네이티브에게는 정확한 시간을 요구하셨지만, 저처럼 유학생으로 영어가 능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시간에 맞춰서 몰아세우듯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선교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당신이 무엇을 배웠는가? 그 목적에 초점을 두는 게 더 중요한 것이지 시간에 맞춰서 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러다 보면 본질을 잃어버린다. 왜 이 공부를 하는지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을 시간에 맞춰서 정확하게 하는 문화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그것을 뛰어넘어서 목적이 무엇인지 되새기는 시각이 중요합니다. 저는 그 교수님의 은혜로운 관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사탄에 의해 
악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헬라어에서 ‘시간’으로 번역할 수 있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입니다. 한 번쯤 들어봤을 것입니다. 이 단어에서 영어의 ‘크로놀로지(chronology, 연대기)가 나온 것처럼, ‘크로노스’는 시계로 측정할 수 있는 흘러가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카이로스’는 어떤 사건을 통해 목적이 이루어지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 5장 16절에서 “세월을 아끼십시오”라고 할 때 ‘세월’은 헬라어 ‘카이로스’의 복수형인 ‘카이론’입니다. 어떤 사건을 통해 목적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왜 ‘세월’이라고 번역했을까요? ‘카이로스’라는 번역에 대응할 한글 단어가 없고, 영어에도 없어서 미래지향적 문화를 따라서 제한된 시간에 많은 것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느냐는 측면에서 “세월을 아끼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의미는 ‘카이로스’입니다. 목적이 이루어지는 사건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라는 것입니다. 단지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에 초점을 두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카이로스에 초점을 두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라는 말씀 뒤에 따라오는 말씀은 “때가 악하기 때문이다”입니다. 여기서 ‘때’라는 단어가 또 사용됐습니다. 앞에 ‘세월’에는 ‘카이로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뒤에 ‘때’는 영어로 ‘더 데이즈(the days)’, ‘날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세월’입니다. 원문에 충실하게 직역하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카이로스들을 다시 찾으십시오. 세월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카이로스’라는 말은 어떤 의미인지 설명했습니다. 그럼 “세월이 악하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 시간이 사탄에 의해 악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탄이 시간을 어떻게 악의 도구로 사용할까요? 종교개혁자 칼뱅은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을 “시간을 사탄으로부터 다시 되찾아오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사탄이 시간을 어떻게 악의 도구로 사용할까요? 제한된 시간을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어떤 질병으로 인해서 “당신은 이제 얼마밖에 살지 못합니다”라고 하면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왜일까요?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앞으로 1년밖에, 2년밖에 아니면 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말을 들으면 왜 두려운 걸까요? 
어떤 분이 병을 앓고 있는데 의사에게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제 당신은 일주일밖에 살 수 없습니다.” 그 주변에 모든 사람이 절망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환하게 웃으며 밝게 빛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평생 오늘 하루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일주일이나 남았다니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시각이 다른 것입니다. 제한된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두려움을 주고 절망하게 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제한이 주어져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카이로스의 삶을 산 사람은 내일이 마지막이라도 두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33세 삶을 사셨습니다. 33살이면 얼마나 짧은 인생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여한이 없다”는 말도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이루어졌다.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보내셨을 때 가지신 계획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의 생애를 만일 오랜 세월, 100세로 하셨다면 100세 이하를 산 사람들은 모두 절망했을 것입니다. 적어도 33세 이상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도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한된 시간 속에 내가 많은 것을 성취했다”가 아닙니다. “주어진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 부르심을 받아도 여한이 없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제한된 시간 속에서 우리를 분주하게 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게 하고, 우선순위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우선순위를 잃어버리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않고, 덜 중요한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영원을 향하고 있지 않다
 
둘째, 시간이 영원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시간은 금이다”라는 말은 정말 잘못된 말입니다. 절대적으로 세월이 악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간이 영원을 향하지 않을 때 사탄은 시간을 악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세월을 아끼는 방법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영원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영원을 바라볼 때 시간을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시간과 영원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영원은 시간이 길어진 게 아닙니다. <고백록>을 보면 시간과 영원을 잘 구분하고, 아주 긴 페이지에 걸쳐서 설명합니다. 그중에서 핵심적인 한 문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간은 항상 머물러 있지 않고 과거, 현재, 미래로 지나가는 것이다. 영원은 항상 머물러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이 동시적으로 현재이다.” 
영원에는 과거와 미래가 없고, 언제나 현재입니다. 시간과 영원은 질적으로 다른 차원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항상 현재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셔서 시간 속에 인간을 머물게 하심으로 영원을 향하게 하셨습니다. <전도서> 3장 11절 말씀이 그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개역개정)”(전 3:11a).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정하신 까닭은 영원을 사모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영원의 그림자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삶을 사후의 삶, ‘애프터 라이프’라고 부르곤 하는데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도리어 이 세상에서의 삶이 ‘비포 라이프’입니다. 진정한 삶은 영원한 삶이고, 우리가 이 시간 속에 살아가는 것은 영원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몇 세의 삶을 살든 시간 속에서만 살도록 창조된 게 아니라 영원 속에서 살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의식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삶으로 세월을 아낄 수 있습니다. 
시간을 아끼는 것은
옳은 일, 주의 뜻대로! 
“그러므로 지각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십시오”(17절).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영원을 준비하기 위해서 지각없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많은 것을 성취하려는 인생이 아니라 주어진 시간 속에서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충실히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을 주어진 시간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했는지 평가하지 않습니다. 주어진 시간 속에 주의 뜻을 잘 분별하고, 충실히 순종했는지를 평가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시간의 의미는 일을 잘하는 것, 많이 하는 게 아닙니다. 옳은 일을 하는 것, 주의 뜻대로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의미이고,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모두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흘러가는 크로노스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카이로스의 삶이 될 때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또한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잘못하면 방탕에 빠지기 쉽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십시오”(18절). 
‘술에 취하지 말라’는 것은 단지 알코올만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주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뜻을 떠나게 하는 모든 것입니다. 그것을 대표하는 대명사가 술입니다. 술에 취하면 가장 먼저 분별력이 떨어지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우리가 주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게 함으로 시간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크로노스의 흘러가는 삶을 사는 인생으로 살게 하는 게 술취함의 모습입니다. 반대로 성령에 충만하면 매 순간 주의 뜻을 분별하고, 카이로스의 삶으로 영원을 바라보고, 시간이 우리에게 주는 어떠한 압박감도 허용하지 않으며, 주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크로노스의 시간만을 세는 게 아니라 지난 한 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목적이 이루어졌는지, 온누리교회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주의 뜻이 이루어졌는지, 그 목적이 이루어졌는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