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을 이루는 수단을 어떻게 생각합니까?-비전일까? 욕망일까?(2)
두 번째 표지는 “어떻게”에 따라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비전과 욕망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그래서 오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비전과 욕망을 분별하는 두 번째 표지는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그 실체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목적을 위하여 수단을 가볍게 여긴다면 그것은 “욕망”입니다. 욕망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만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의 정체성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일을 성취하기만 하면 됩니다.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시험을 잘 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점수와 등수라는 목적이 중요하여서 다른 사람의 시험문제를 훔쳐본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는 이러한 부정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한때 컨닝하지 말자는 캠페인이 있었습니다. 무감독제도를 시행하는 학교가 유명세를 탈 정도였습니다. 욕망은 수단과 방법이 중요하지 않고 목적만 이루면 됩니다.
한국의 부모들이 자식들에 대한 욕망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치맛바람이라는 신조어가 있을 정도입니다. 모두가 치맛바람에 한번씩으로 가담하였을 것입니다. 이 바람이 너무 거세어서 촌지라는 B급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김영란법이라 불리는 청탁금지법이 만들어지면서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김영란 법이 있다는 자체가 인간이 가진 욕망의 추구가 얼마나 거대한지를 보여줍니다. 법이 아니면 멈출 수 없는 것이 욕망입니다. 그러나 내면의 욕망은 법도 막을 수 없습니다.
물론 직접적으로 부정을 통하여 목적을 성취하지 않더라도 수단을 가볍게 여긴다면, 욕망하는 것입니다. 대수롭지 않을 때 욕망은 삶을 지배합니다. 여기에 늘 사용되는 말이 있습니다. 나 혼자쯤은 괜찮지 않을까? 그게 얼마나 대단하다고 그러냐? 한번 눈 찔끔 감으면 되지 않을까? 다른 사람에게 크게 피해도 주지 않는 것인데 너무 빡빡하게 행동하는 것 아닐까? 수단에 대한 가벼움은 반드시 욕망의 노예가 됩니다.
비전은 목적을 수단에 대하여 깊은 고뇌가 있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고귀한 존재로 산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홀로 산속에 들어가서 살 수 없다면 타락한 세상에서 부딪혀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고 어렵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떠나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과 혼합되어 살지 않습니다. 이것이 힘든 부분입니다. 의미는 분명한데 실천은 정말 어렵습니다. 하지만 피하여 살 수 없습니다.
비전을 가진 사람은 수단과 과정에 대하여 최선의 방법을 찾아냅니다. 정직한 것의 열매는 결코 후회가 없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서 정직한 땀을 흘리고, 이웃을 위한 섬김이 무엇인지 찾아냅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비전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다르게 바라봅니다. 자기 중심으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때론 실패가 있고,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고, 광야와 같은 힘든 시간을 보낼 수 있지만, 포기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인내하면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분투합니다. 이러한 자세가 있다면 그는 비전의 사람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표지판입니다.
삶에 대한 자족함이 있습니까?
세 번째는 “만족”에 따라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욕망과 비전은 다 만족을 추구합니다. 만족을 소망하지 않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족은 우리에게 심겨진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면 땅에 충만하고, 번성하고, 다스리라고 하였습니다. 문화명령을 받은 것은 오직 인간뿐입니다. 이 놀라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독특성입니다. 문화명령을 충실하게 달성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희열이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만족의 다른 모습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은 만족에 대한 왜곡된 지식을 가제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욕망과 비전의 경계선이 분명해집니다.
욕망은 개인적인 풍요와 평안 그리고 권력을 세우는 일에 만족함이 없습니다. 멈출 수 없는 풍요를 추구합니다. 부귀와 영광은 정해질 수 없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끊임없이 개인적인 풍요를 추구합니다. 여기에 다른 사람의 동참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가족적입니다. 욕망은 개인적인 평화를 강조합니다. 자신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관심이 없습니다. 앞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관계없습니다. 오직 자신과 자신 가족의 평화만을 유지하면 됩니다. 아파트문화가 확산되는 것에는 개인적인 평화만을 추구하는 인간의 속성이 한 몫하고 있습니다. 오직 자신과 가족의 평화를 지키고자 합니다. 이것이 잘못이냐고 묻는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개인적인 평화가 모두를 위한 평화추구로 진전되지 못할 때의 위기입니다. 사람들이 범죄의 현장을 보아도 신고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경찰서에 증인으로 다녀야 하는 것이 귀찮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평화가 공동체의 평화로 나가지 못하는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욕망은 개인적인 권력을 소유하는데 멈추지 않습니다. 권력이 주는 달콤함은 마약과 같기 때문입니다. 먹어도 먹어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그렇게 권력을 추구하다가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만족함이 없는 것이 욕망입니다. 멈추지 않는 권력의 추구가 욕망입니다. 여기에 맛 들이면 죽어야 끝납니다.
비전은 자족함의 선을 인정하고, 남는 것을 흘려보내는 것이 행복임을 아는 삶입니다. 어떠한 형편에도 자족할 수 있음이 진정한 행복입니다[빌4:11]. 자족만큼 위대한 능력은 없습니다. 자족은 욕망을 이긴 자만이 누리는 행복입니다. 자족의 여유는 참으로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자족의 삶에는 단순함이 있습니다. 복잡하지 않고 간단하게 살아갑니다. 자족의 삶에는 유행에 따라 살지 않습니다. 유행에 따라 각종 옷을 사고, 물건을 사는 것은 욕망이 보여주는 열매이지 비전을 꿈꾸는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자족이 없으면 이웃을 향하여 자신의 것을 흘려보내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자족은 만족함을 압니다.
아굴의 기도처럼 부하게 말고, 가난하게 말고 일용한 양식으로 감사할 수 있을 때 자신의 것을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자족은 욕망을 이기는 가장 확실한 능력입니다. 불만족과 자족이 욕망과 비전을 만들어 냅니다. 자족은 늘 기도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이 없이는 자족을 누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족은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하지만 욕망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욕망은 성령의 개입을 싫어합니다. 욕망을 누릴 수 있는 길을 막는 장애물이 성령님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체적 자유의지를 사용하고, 철저하게 성령님의 개입을 차단합니다.
비전과 욕망은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족함이 없는 삶과 자족하는 삶입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는 삶과 자신의 자유의지를 의존하는 삶입니다. 이것에 세 번째 표지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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