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기독교개혁신보컬럼

관인(官認)과 창의성 / 김북경 총장(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새벽지기1 2021. 1. 14. 05:50

2005년 8월 30일

 

아직도 길거리에 내다붙인 학원광고 플래카드에는 “관인”이라는 단어가 앞에 붙어 있다. 국가기관이나 공공단체에서 인정받은 학원이라는 뜻일 게다. 그런데 ‘관청’, ‘관가’ 하면 우선 경직되고 피해야만 할 귀찮은 존재로 떠오르는데 아직도 우리는 ‘관’을 믿는가 보다. 국가의 역할은 사회의 악을 최대한 억제하는 필요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관의 역할은 소극적이고 국민의 창의성을 유발하는 데는 부정적이다. 그래서 규제를 휘두르는 ‘관’은 창의성과 반비례의 함수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사회에 규제가 많을수록 국민의 창의성은 줄어든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의 교육문제는 모든 공립학교를 사립학원화시키면 해결될 것이라고 본다. 한 예로 최근 공산국가들이 저절로 폭삭 주저앉은 이유가
‘관’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규제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관’과 자율을 통한 창의성을 교회에 적용할 수 있을까? 위험한 착상이기는 하지만 ‘창의성’의 이름으로 모험을 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어떤 교단이든 뚜렷한 신학을 가지고 있다. 그 교단(‘관’이라고 생각해 보자)에 속하려면 그 교단의 신학에 동의해야 한다. 그런데 그 신학은 성경해석의 집약이다. 성경은 변함없는 진리지만 성경은 또한 해석되어야 하는 책이다. 성경해석은 각 시대와 문화속에서 변천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라고 생각된다(구원론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성경해석사와 역사 신학이 이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필자는 갈릴레오의 지동설에 대한 종교재판을 생각해 본다. 그런데 이런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이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교회와 신학교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신학은 원래 교회에서 가르쳤는데 신학교육이 학문화, 그리고 전문화가 되면서 교회와 신학교와의 갈등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 갈등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신학교에서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한 것을 교회에 적용하고 목회현장에서 실천하고 검증된 신앙의 열매를 신학교에 돌려준다. 신학자들은 성경을 끊임없이 연구하되 교회에서 검증된 신앙과 질문들을 신중하게 경청한다. 이렇게 해서 교단신학은 발전한다.

 

그렇지 않고 교단이 신학자들의 학문활동을 제한내지는 제어한다면 교단신학은 화석화되어 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이라는 학문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성경은 변하지 않는 진리이지만, 성경해석은 변한다는 것을 교회사는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절대적인 진리(예, 구원의 방법)를 제외하고는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경계는 하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다만 교단과 신학교가 마음 문을 열어놓고 대화를 통해서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겸손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교단이 신학교를 감시하되 갈릴레오(법정밖에 나와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한 이중성을 나타낸) 같은 신학자가 생겨
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면에서 교단은 ‘관’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역할이 커질수록 신학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신학교의 발전은 큰 건물과 많은 학생만을 뜻하지 않을진대 성경을 신앙의 양심안에서 창의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자를 배출하는 것이 진정한 신학교의 발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