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동식목사

보다 더 나은 교회를 위하여(5) - 시대의 사상 분별

새벽지기1 2020. 12. 4. 06:08

보다 더 나은 교회를 위하여(5) - 시대의 사상 분별

시대가 어수선할수록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곤고한 교회의 현실은 우리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말을 합니다. 교회는 안팎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교회 처방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하나가 소중한 이야기입니다. 모두가 교회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간절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더 생각하고 분별하여야 합니다.


보다 더 나은 교회를 향하는 마음은 미래의 교회를 생각하는 일입니다. 미래에도 교회가 온전하게 세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래는 오늘이 없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을 바로 살 때 내일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오늘이라는 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참으로 중요한 시대가 되이었습니다.


오스 기니스는 “우리 손주들 가운데 기독교인을 볼 수 있을까?”[오스기니스, 오늘을 사는 이유, 167]라고 질문합니다. 그만큼 현시대가 성경이 말하는 것과 다른 시대를 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진보를 추구하면서 성경은 골동품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진화론적 무신론자들인 진보주의자들은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이들은 유전공학과 급진적 형태의 사회 구성주의 철학에 결합 되었습니다.

“사회 구성주의는 다양한 사회 속에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 공유한 믿음과 사상에 의해 우리가 형성되는 방식을 분석하고자 하는 이론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자신이 속한 사회가 공유하는 실제를 구성하는 데 참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실제는 천성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오스 기니스, 저항, 176]”.

이들의 견해로 볼 때 그 누구도 진리를 말할 수 없다. 진리는 단지 사회적 구성의 문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객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일권은 『질투 사회』에서 “급진사회구성주의와 반 실재 주의 남녀의 구분 차이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고 실재하지 않는다[정일권, 질투사회,288]”.고 하였습니다.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라 사회가 구성한 명제라는 것입니다. 진보주의자들의 주공격은 성경의 진리를 폭파하는 일입니다. “십계명을 비롯한 유대 기독교의 모든 모럴을 참을 수 없는 폭력이라고 추정하고, 이런 계명을 완전히 없애는 것을 제일 목표로 삼는다[정일권, 295]”. 오스 기니스 역시 사회 구성주의가 함의하고 있는 사상에 대하여 아주 엄격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회 구성주의는 첫째 인간의 삶에는 자명한 진리가 없다. 그리고 신적인 창조 질서나 자연적 도덕적 질서도 당연히 없다) 따라서 참과 거짓, 선과 악, 남성과 여성 같은 범주들은 상대적이고 전적으로 개인의 시각에 따라 결정된다. 모든 것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모든 것이 허용된다. 둘째 인간관계 법칙은 없다. 따라서 십계명 황금률이나 자연 법은 없다. 모든 것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셋째 인간 노력의 한계는 없다. 충분한 시간과 함께 독창성이 발휘된다면 인간은 모든 것을 사회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 이들에 의하면 미래예측이 아니라 미래의 발명이 도전과제라고 한다. 사회 구성주의는 반유대적, 반기독교적. 반 서구적 사고방식이자 궁극적으로 반인류적 사고방식이다[오스 기니스, 저항,185]”.

르네 지라르는 현재의 진보주의자들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진보주의는 기독교로부터 나왔지만 기독교를 배신하고 있다 [정일권,348]”. 진보를 추구하는 이들이 기독교의 가치를 버리고 있음을 봅니다. 그 가운데 정치적 올바름이 주는 협박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성경적인 분별도 정치적인 용도 바꾸고 있습니다. 노베르트 볼츠는 잘 지적하였습니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언어 정치는 언어통계로서의 검열에 대한 루소의 긍정적인 개념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정치적 올바름의 가장 중요한 과제들 중에는 문명들의 충돌과 문화들의 전쟁 들에 대한 분석을 차별과 위험한 여론 조작으로 폄하하는 것이다[정일권,383].”

진보가 성경의 가치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진보세속주의는 니체의 선동에 동조해 하나님을 살해하고 서구 사회를 이교도가 득세하던 기독교 이전 세계로 되돌리고자 하는 자들에게 철학적 동력을 제공하고 있습니다[오스기니스, 저항,204].” 그렇다고 정치적 보수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지 진보에 반대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보가 진리를 파괴 시키는 것을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자세는 현실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판단하는 혜안입니다. 자기 생각에 틀리면 무조건 반대하지 않습니다. 모 아니면 도라는 생각이 얼마나 천박한지 모릅니다. 시대를 잘 분석하여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시대의 사상에 저항하는 사람들입니다. 오스 기니스는 이 말은 선지자적 반 시대성이라고 말합니다. 손봉호 교수는 선지자적 비관주의라고 말합니다. 저는 선지자적 현실주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대동소이합니다. 다만 강조하는 부분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정치적 보수주의, 진보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전체주의자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시대의 사상에 저항하는 선지자적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제도에 적용됩니다. 늘 성경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민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 땅의 것이 지나감을 알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영원하지 않지만 영원한 나라를 위하여 오늘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 개혁과 부흥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사명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개혁과 부흥은 철저하게 성경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저항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 시대의 흐름을 잘 이해하지 않으면 교회를 바르게 세울 수 없습니다. 결코, 순응주의자는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보다 더 나은 교회를 위하여 시대를 잘 이해하고 저항해야 합니다. 이 길이 쉽지 않고 많은 대가를 필요하지만, 선지자의 사명은 그렇게 눈물과 고통과 아픔의 대가가 수반됩니다. 하지만 그 씨앗이 개혁과 부흥의 열매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