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은 교회 개혁이다.
종교개혁은 교회 내부의 개혁을 통하여 사회를 개혁하는 운동이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타락이 곧 사회의 타락을 가져왔음을 인식하였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면죄부 판매는 사회적 타락을 부추기는 중요 요인이 되었습니다. 죄를 지어도 돈만 있으면 용서 받을 수 있다는 유전무죄무전유죄의 정신이 바로 면죄부에서 공식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야 하는 곳이지만 그러하지 못하였습니다. 교회의 타락은 여기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교황권의 세습 그리고 신부들의 성적인 타락이 만연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자연스럽게 사회적 불의로 자연스럽게 나타났습니다. 더 이상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 더러운 매음굴과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렇듯 교회는 비참할 정도로 타락하였습니다. 그러자 구원의 방주로서의 역할도 상실하였습니다. 탐욕의 시장이 되어버린 교회를 통하여 무슨 구원의 기쁨 소식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는 이러한 치부를 숨기고자 교회당 건물을 크게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성당들은 한결같이 크고 높아졌습니다. 바티칸의 베드로성당은 그야말로 거대한 성과 같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각 나라마다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로마 카톨릭이 증거 된 지역마다 화려하고 엄청난 규모의 성당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치부를 숨기고자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으로 위장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순진하지만 무지한 성도들은 외적인 화려함과 웅장함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장엄함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외적인 화려함은 통하여 성도들을 통제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온갖 죄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교회를 볼 때 세상은 더 이상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를 원래의 자리로 회복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일을 위하여 교회 내부로부터 개혁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마틴 루터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누구보다도 교회의 내부를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박식하였습니다. 그래서 95개조의 반박문을 통하여 교회와 교황에게 질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교회의 개혁이 아름답게 진행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세력들은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는 나는 것을 용납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틴 루터를 면직하고 그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틴 루터를 보호하실 뿐 아니라 교회의 타락에 가슴아파하였던 수 많은 개혁자들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타락한 교회를 원상복귀 시키기 위하여 개혁자들은 순교의 자리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개신교회는 모두다 개혁교회의 열매입니다. 로마 카톨릭을 제외한 모든 교회는 개혁교회의의 후예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후예들의 모습에서 다시 로마 카톨릭의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1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한국 교회는 철저한 내부 반성과 회복이 필요한 때입니다. 500년전의 역사를 잘 반추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개혁을 일으키신 원인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금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긴급히 없애야 할 것은 교회의 권력 세습입니다. 현대에 와서 교회의 세습은 이단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이단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대를 이어서 누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가 세습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혹자는 목회권의 이양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장난이 지금 교회를 잔인하게 부패하게 하고 있음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목회 세습은 목회의 이양이 아니라 권력과 부의 세습입니다. 세습한 목사가 독립적으로 목회하지 못합니다. 권력과 부를 이어 받았기에 독립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가 이러한 탐욕의 장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이단들의 세습 뉴스와 같은 취급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에도 성도들의 무지로 인하여 여전히 세습이 정당화 되고 있습니다. 세습의 개혁이 일어나지 않으면 교회는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또한 세습은 아니더라도 세습에 걸 맞는 부패가 있습니다. 바로 목사들의 은퇴 시에 발생하는 맘몬전쟁입니다. 한 푼이라도 더 받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목사와 한 뿐이라도 주지 않으려는 장로들의 싸움에서 참으로 추악한 시궁창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일평생 동안 복음을 전한 목사의 노후 때문에 벌어지는 꼴불견은 세습과 차이가 없는 권력싸움입니다. 조금 받으려하고 좀 더 주려고 하는 모습은 기대할 수 없는 모습일까? 교회는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이 오직 자신의 부만을 챙기려고 하는 행태들을 봅니다. 그런데 이것은 목회의 현장만이 아니라 선교의 현장에도 비일비재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허무는 자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진노가 전혀 두렵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알곡과 쭉정이는 추수 때 구별됩니다.
세 번째는 목사들의 성적인 죄에 대한 정당한 징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라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누구를 지적하는 것이 합당하냐고 말을 합니다. 그럴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죄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권징은 서로 살기 위함입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죄에 대한 합당한 권징과 해벌의 과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상습범에 대한 권징이 노회와 총회가 공의롭게 시행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의 앞에 정치적으로 재판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로서의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노회가 하나님 앞에 공의롭지 못하면 교회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입니다. 노회가 죄고백과 해벌의 과정을 성경대로 갖지 못하면 더 이상 빛과 소금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설교의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설교자들의 설교 한 마디 한 마디는 생명과도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그 귀중한 단상에서 자기 자랑과 농담과 윽박지름과 거짓이 있다면 얼마나 끔직한 일을 하는 것입니까? 특별히 일부 정치하는 목사들이 돈 내고 설교하는 구걸행위를 멈춰야 합니다. 또한 돈 받기 위하여 설교자를 세우는 일부 연합회들의 부끄러운 행위들도 사라져야 합니다. 목사를 망치는 일을 성도들이 방치하면 안 됩니다. 어떠한 이유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핑계가 되지 않습니다. 건강하게 서로 돕고 후원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단체의 사명에 합당한 설교자를 세우고 합당한 강사비를 지출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서로 망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설교 구걸을 하는 목사와 성도들의 자세가 개혁되지 않으면 강단이 소망이 없고 교회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다섯째 성도의 무지가 용납되지 않습니다. 더욱더 성경의 가르침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에 근거하여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교회는 함께 세우는 것이지 목사와 장로가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를 위한 기도만큼 장로를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장로직과 집사직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사의 설교에 대하여 바른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더 말씀을 읽고 공부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성숙이 있을 때 설교가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합니다. 그것이 교회를 개혁하는 일입니다.
여섯째 삶의 현장에서 성도답게 살고 있는지 자기반성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의 이원론적 신앙이 교회를 부패하게 만드는 요인 가운데 하나임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자신을 부패하게 살면서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는 논리는 다 쓰레기에 불과한 잡소리입니다. 교회는 함께 세워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무너지는 교회를 세울 때 사회가 소망이 있습니다. 지금 이 사회가 울부짖고 있습니다. 교회가 그 소리를 듣지 못하면 하나님의 채찍과 막대기가 어떻게 작동할지 모릅니다.
교회 개혁을 위한 우리의 눈물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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