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동식목사

영적 난민 구히기(6) - 영적 난민은 어떻게 시작 되었을까?

새벽지기1 2020. 7. 8. 06:36

3) 성도의 문제

 

영적 난민으로 떠도는 원인 가운데 마지막으로 성도 자신의 문제를 보고자 합니다. 사실 난민의 위치는 강압적인 것으로 인한 방랑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적절한 비유가 되지 않을 수 있다고 의의를 제기 할 수 있지만 삶의 모든 문제에는 내적인 원인이 존재 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난민이 되는 상황에 자신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또한 문제 해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상황에 있어서 동일하게 자신의 문제를 잘 살펴서 난민이 되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영적 난민이 되게 하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서서 교회의 요인도, 목사의 요인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이 가장 크고 우선 되는 원인이지만 여기에만 머물 수 없습니다. 냉철하게 나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지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볼 때 성도 자신의 문제도 심각함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듯이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있는 티끌만 보는 것처럼 성도 자신의 모습에서 영적 난민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원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자신의 모습을 파악하고 회복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긴 시간 집을 떠나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샤머니즘적 신앙

 

첫째 샤머니즘적 신앙입니다. 영적 난민으로 전락하게 되는 성도의 신앙하는 자세 가운데 가장 한국적이면서 동시에 세계적인 현상이 있습니다. 바로 샤머니즘적 신앙입니다. 샤머니즘 신앙이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이유는 어디에나 존재하다는 의미이지만 특별히 한국 교회에 만연되어 있는 신앙하는 자세라는 의미입니다.

샤머니즘이란 “병든 사람을 고치고 저 세상과 의사소통을 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믿어지는 샤먼(shaman)을 중심으로 하는 원시종교” 이러한 형태의 모습들이 기독교 신앙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신앙에 대한 이해가 이러한 샤머니즘적 행위에 멈춰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 생활이라는 것이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샤머니즘 신앙에서 발아된 것이 바로 기복주의 신앙입니다. 기복주의는 철저하게 이기적 신앙으로 오직 부하게 되는 것이 신앙의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어렵고 힘든 세대에는 아주 강력한 힘이 되었습니다.

 

기복주의는 삼박자 구원이라는 의미에서 잘 드러납니다. 요삼 2절에 기록된 말씀으로 근거로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건강의 복이 바로 삼박자 축복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성도의 삶을 철저하게 현세 중심으로 살게 하였고, 물질 중심의 삶을 지향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한국 교회의 성장기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인격적이고 역사적인 믿음으로 가질 수 없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에 머물고 인격적인 변화를 이끌지 못하고 사회변혁적인 삶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모습이 굳어지면 더 이상 말씀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참된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현세에 집착하고 개인주의적 신앙에 머물게 하고, 물질적 기복주의 신앙에 머물게 하는 것은 성경의 기독교와 다릅니다. 결국 이러한 모습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사회의 많은 기관의 하나로 여기도록 만들었습니다.

 

샤머니즘과 기복주의에 물들어 있는 비인격적인 신앙은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과감하게 교회를 바꿔 버립니다. 그러기를 여러번 하면 아예 차버리고 맙니다. 교회를 이와 같이 여기고 다녔던 신자라면 자신의 기도가 이뤄지지 않았을 때 교회를 떠납니다. 인내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스로를 합리화 시킵니다. 급기야 교회와 목사를 향하여 능력이 없다고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자주 목도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영적 난민의 자리로 기꺼이 나갑니다. 샤머니즘적 신앙은 오래지 않아 교회를 등지게 만듭니다.

 

영적인 무지와 교만

 

둘째 성도의 영적인 무지와 교만의 혼재입니다. 영적인 난민으로 사는 성도들의 모습 가운데 나타나는 독특함이 있습니다. 바로 영적인 무지와 영적 교만의 혼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다르고 이유도 제각각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볼 수 있는 광경은 영적 무지입니다. 신앙을 단지 개인적 평안만을 위하여 선택하였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설교나 혹은 관계를 통하여 나타나는 불편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자신의 평안을 헤치는 일을 보지 않습니다. 특별히 설교에 민감합니다. 자신의 평안을 흔드는 죄에 대한 설교를 싫어합니다. 좀 더 평이하고 편안한 설교를 듣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더욱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심각하거나 교리적인 설교를 힘들어 합니다. 그리고 비판을 합니다. 형식주의라든가? 율법주의라든가? 근본주의라는 말을 붙이기 시작합니다. 적어도 자신의 죄에 대하여 지적 받기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웃고 노래하고 감동을 받아 우는 일에 집중을 합니다.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 받고, 성경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인식하지 못합니다.

 

영적인 깊은 깨달음의 자리에 이르는 것 보다 표피적인 신앙에 만족하고 자신의 평안을 추구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종종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일주일 동안 어떻게 살았는데 설교를 통하여 또 자신의 죄에 대하여 책망을 받아야 합니까? 목사가 경쟁적인 삶을 살아 보았습니까? 너무 모르는 소리를 한다고 말합니다. 매우 일리 있는 이야기 있습니다. 하지만 옳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설교자를 세운 것은 단지 위로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전하게 하고 궁극적으로 영원한 평안을 빼앗아 가는 죄에 대하여 말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죄 죽임의 자리에 이르게 하는 것이 목사의 일이며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영적인 무지가 오래되면 영적 난민의 자리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이리저리 방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자기만족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러기 영적인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 난민의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게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많이 알고 있다는 영적 교만 역시 영적 난민을 만들어 냅니다.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참으로 복 된 일입니다. 진리를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은 진리가 주는 자유를 누라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인 자세가 판단하고 비판하고 비웃는 자리에 이르게 되면 심각한 영적 질병을 앓게 됩니다. 바로 영적 난민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성숙이 아름다운 것은 자신의 존재가 저절로 되어 지지 않았음을 아는 자의식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원하는 부모 밑에서, 원하는 환경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태어남에 있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사랑과 도움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가 인간됨의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영적인 성숙은 자신이 많은 이들의 사랑과 섬김으로 자라났다는 것을 아는 일이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교만이 아니라 겸손합니다.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그러니 어찌 교만하겠습니까?

 

그런데 영적 난민자 가운데 일부는 이러한 영적 교만의 자리에 있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비판하고 판단하고 우습게 여깁니다. 아는 것이 영광이 아니라 멸망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분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구경꾼으로 함께 합니다. 이들은 종종 베뢰아 교인들을 예로 들면서 열을 냅니다.[행 17:10-12] 그런데 베뢰아 교인들처럼 겸손하고 순종하고 헌신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변종 베뢰아 신자가 되어 버립니다. 비판은 있되 순종이 없습니다. 분별을 하되 헌신하지 않습니다. 지적은 하되 겸손이 없습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시인하고 행위로는 부정하는 신앙[딛 1:16]을 보입니다. 안다는 것이 아름다우려면 겸손한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만족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종 없는 비판, 겸손이 없는 분별은 결국 다툼을 일으키고 교회를 등지고 난민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영적인 무지와 영적인 교만은 일란성 쌍둥이와 같이 영적 난민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세번째 빈약한 성경적 세계관입니다. 회심한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특징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태도도 달라집니다. 삶의 목적이 교정됩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적 세계관이 형성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이 보이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보이는 것을 안경이라고 친다면 그 안경에 맞게 세상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더 설명한다면 이 안경이라는 것은 미리 가지고 있는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리 가지고 있는 생각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하여 가지게 되고 그것이 문화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습득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밥을 먹을 때 수저를 사용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젓가락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어른과 친구가 되는 것이 어렵지만 서구는 친구가 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빨간색이 우리에게는 좋은 의미가 아니지만 서구는 그렇게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이러한 전제들이 삶을 판단하고 결정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성경적 세계관이 빈약하면 신앙의 판단들이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세상의 기준에 따라 신앙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그 기준에 따라 판단합니다. 교회가 주는 서비스에 대한 질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미치지 못할 때 여지없이 비판의 칼날을 내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들 안에 기생하고 있는 세속적 세계관을 청소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열매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속화된 세계관의 대표적인 모습을 열거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성공주의 긍정의 힘입니다.

이것은 한국 사람들의 심성과 상황에 잘 맞는 옷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많이 사용되었으며 때로는 효과를 크게 보았습니다. 아마도 이것을 가장 잘 나르는 도구중 하나가 부흥회 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이 땅의 성공에 있고 그것을 긍정의 힘으로 이룰 수 있다면 성경은 가치가 없어집니다. 성경은 땅에 것을 찾지 말고 위엣 것을 찾으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골 3:1-2] 이러한 빈약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나 더 낳은 성공을 주는 세계관 앞에서 혼돈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고지론 신앙입니다.

이것은 성공주의 신앙과 함께하지만 좀 더 선동적입니다. 그래서 청년들을 흥분시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크게 쓰임을 받으려면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을 부추기는 신앙입니다. 고지론 신앙은 여러모로 현대인들에게 도전이 되고 흥분이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 나올 때마다 저 마다 꿈을 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지는 한 곳입니다. 많은 사람이 갈 수 없습니다. 결국 낙오자가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실패한 신앙입니까? 더구나 삶의 현실은 낮은 곳이 더욱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다양하게 사람을 부르시고 다양하게 사용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은사대로 부르셨기에 은사에 합당하게 사는 사람을 존중히 여기십니다. 고지론 신앙은 그렇듯 하지만 사실 매우 빈약한 신앙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고지론 신앙의 왜곡된 피해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합니다. 바로 주일성수를 파괴하게 합니다. 대학을 위하여 주일을 가볍게 여기는 신앙이 그 한 예입니다. 놀라운 것은 고3 시절 교회를 등진 이들이 다시 참된 신앙의 자리로 온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듯 고지론 신앙은 것 보기에는 뜨거움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위험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지론 신앙은 세상이 말하는 스펙 쌓기에 면죄부를 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은사와 달란트가 아니라 고지가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동일한 집단이 모여 있는 곳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계층을 형성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교회로서 합당한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를 통하여 고지를 점령하고 싶은 열망이 교회를 차별하는 신앙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에 맞지 않을 때 언제든지 자신의 고지를 위하여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는 교회를 차아 나섭니다. 이렇게 영적 난민은 발생합니다.

 

세 번째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편리주의 신앙입니다.

이것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딱 들어 맞는 모습입니다. 복잡하고 고민되고 생각하는 신앙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편리가 침해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옳은 대로 신앙하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니 좀 더 편한 것을 찾습니다. 한번에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있으면 좋습니다. 예를 들자면 아이들의 영적인 교육에 있어서 큰 교회가 잘 할 것이라는 무조건적 의존입니다. 물론 큰 교회가 여러 가지로 조건이 좋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신앙교육의 우수성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자녀의 신앙은 부모의 신앙에 달려있습니다. 부모의 빈약한 세계관은 그대로 자녀들에게 전달됩니다. 그런데 그와 상관없이 시설 좋은 곳에 맡기면 다 된다는 생각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모릅니다.

 

편리주의는 무섭게 교회를 파고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두려워 합니다. 소비자들의 편리에 대한 요구가 점점 거세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편리를 찾아 떠다니는 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편리를 찾아 떠난 곳에서 상처를 입었을 때입니다. 갈 곳이 없어집니다. 그 만큼 편리한곳을 찾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떠돌아다닙니다. 참으로 슬픈 현실입니다. 그러나 더 아픈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상처를 피하고 편리를 누리기 위하여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교회에 속하지도 않고 멀어지지도 않고 편리를 누리는 것입니다. 서울의 어떤 교회는 주일에 여러 빌딩에서 동시에 화상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집을 나와서 예배당에 오지만 실상은 인터넷 예배와 큰 차이는 없습니다. 그런데 편합니다. 그리고 교회 다닌다는 자부심도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의 교제가 없습니다. 한 몸의 지체의식도 없습니다. 그러니 서로를 위하여 기도도 없습니다. 함께 성찬에 참여하지도 않습니다. 이미 교회의 모습은 상실되었습니다. 그런데 편리합니다. 간섭도 없습니다. 헌금에 대한 강요도 없습니다. 출석에 대한 요구도 없습니다. 이렇게 편리는 익명의 성도로 살게 하고 미래의 영적 난민을 양산하게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교회의 역사가 알려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없습니다. 이렇게 빈약한 세계관은 현실을 만족하게 하는 세속적 신앙에 머물게 합니다. 그리고 영적 난민의 자리를 예약합니다.

 

네번째 인내의 부족입니다.

인내가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을 견고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성품을 다듬어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할 만한 사람으로 자라게 해 줍니다. 인내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내는 다양한 영역에서 필요합니다. 단지 고난의 현실에서만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교회 생활에 있어서 더욱 필요합니다.

 

영적 난민의 자리에 서있는 분들의 상황을 보면 이러한 아쉬움이 종종 있습니다. 쉽게 말하고 간단하게 결정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고백도 없고 또한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개교회주의가 한 몫하고 있지만 너무나 쉽게 결정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나라가 이혼율이 세계 1위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 너무 쉽게 말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힘들면 힘들어 죽겠다, 배고파 죽겠다는 등의 부정적 단어를 잘 씁니다. 이것이 가정생활에서 나타날 때 위기가 옵니다. 조금만 흥분하면 우리 그만 살고 헤어지자라는 말을 아무 고민 없이 툭 내 뱉습니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된다고 하듯이 내 뱉은 말은 엄청난 상처를 가져옵니다. 이것은 가정생활만 아닙니다. 직장 생활, 동호회 생활 그리고 신앙생활에서 나타납니다. 그만 살자, 나 탈퇴하겠다는 말은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 화를 불러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자세가 신앙생활 가운데 나타날 때 영적 난민으로 가게 됩니다. 교회의 성도가 된다는 것은 결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들지 않고, 불편하다고 교회를 떠나는 것은 참으로 불쌍한 일입니다. 더구나 가야 할 교회를 생각하고 준비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더욱 슬픈 일만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완벽한 교회가 있다면 저도 그 교회를 다니고 싶습니다. 그러나 없습니다. 없기에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는 많은 수고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인내가 요구됩니다. 인내를 통하여 우리의 인격이 성숙되고 모난 부분이 깎여집니다. 그렇게 인내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조금이나마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완벽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사단은 교회가 건강해지는 것을 시기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방법으로 교회를 힘듭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서로 기도하고 배려하면서 세워가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인 난민을 막는 일입니다.

 

다섯번째 동역자 의식과 주인의식 결여입니다.

영적 난민이 발생하는 경우를 보면 동역자 의식과 주인 의식이 결여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우선 교회가 조금만 힘들어 지면 여지없이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편리함이 침해 받는다는 생각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적당히 헌금하고 편리를 누리고 싶은데 헌신을 요구합니다. 고통 분담을 요구합니다. 그러니 귀찮은 것입니다. 여기만 교회냐는 생각이 발동을 합니다. 실상 주변을 돌아보면 교회가 많습니다. 그래서 쉽게 떠납니다. 그러기를 여러번 반복하면 영적 난민의 자리로 떨어집니다. 이렇게 난민이 되면 엄청난 변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어떻고, 저 교회는 어떻다는 식의 무용담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합니다.

 

실제로 교회가 건축을 하거나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 많이들 교회를 떠납니다. 물론 교회가 불의하거나 무리하거나 혹은 성경의 가르침과 동 떨어진 모습 때문에 상처를 깊이 받고 싸우다 지쳐서 교회를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헌신이 부담스러워서 떠나는 이들도 상당합니다. 떠구나 그렇게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상당수 정착하는 곳이 대형교회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 부분 헌신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불의함 때문에 떠난 성도들은 동일하게 작은 교회를 찾아서 헌신을 합니다.

상의 교회를 허락하신 이유는 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서로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서로 짐을 지는 것이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이며 그 실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서로 짐을 지을 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짐을 지기 위하여는 동역자이면서 주인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단지 구경꾼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방문객은 성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방문객에게 교회를 세우는 일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동역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방문객은 결코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한 지체입니다. 동역자입니다. 주인입니다. 우리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접 붙여있는 지체입니다. 이 자세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무너지면 방문객이 되고 영적 난민의 자리로 덜어질 수 있습니다. 동역자와 주인 의식이 교회를 세웁니다. 그리고 서로 배려하고 인내하고 격려하며 교회를 세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자세가 나에게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도로서 우리의 모습을 어떠한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외적인 충격에 쉽게 무너지고 마침내 영적 난민의 자리로 내 몰리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잘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떠한 지진이 몰려와도 흔들리지 않는 영적 내진을 설계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를 살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입니다. 우리 주님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치열한 영적 전투를 잘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 난민의 자리에 떨어지지 않도록 몸부림 쳐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