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성화를 위한 몸부림입니다.
목사의 소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목사의 삶의 자세를 논하고자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부름 받은 목사는 그 가는 길이 참으로 복되지만 쉽지 않습니다. 일반 성도보다 더 많은 시험을 받습니다. 목사 역시 동일한 인간으로 살아갑니다. 단지 목사로 소명을 받았다는 것 밖에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감당해야 할 책임은 분명 그 무게가 다릅니다. 그러기에 더욱 힘써 자신의 삶을 거룩하게 만드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기대치가 높기 때문입니다. 또한 설교가 삶으로 나타나지 않을 때 돌아오는 후폭풍은 참으로 거대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똑같은 사람이지 하는 말은 듣기에는 좋지만 목사의 권위가 빈약하게 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목사로 부름 받았다면 끊임없이 거룩을 위하여 힘을 써야 합니다.
우선 온유한 성품으로 단련되어야 합니다. 목사의 외적이 모습에 있어서 중요하게 나타나야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성을 주셨습니다. 누구나 다 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천성은 다듬게 되어 있습니다. 천성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천성이 더욱 빛을 낼 수 있도록 다듬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더욱이 죄는 우리의 성품을 아름답게 보이지 않게 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힘써야 할 것은 바로 성품입니다. 그 가운데 더욱 힘써야 할 것은 온유함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위대한 종이었던 모세를 향하여 땅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민12:3] 불평과 불만이 죽 끓듯 일어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였던 모세의 힘은 바로 그의 온유함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온유함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였습니다.[마 5:5] 그런 후에 에수님은 자신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온유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주님을 따르는 목사들이 세상 끝날까지 가꿔야 할 것은 바로 온유함입니다. 이 온유함은 줏대가 없는 자세가 아닙니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행동하는 성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목사는 설교한 대로 살려고 발버둥 쳐야 합니다. 특별히 물질에 대하여 더더욱 그렇게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목사의 아킬레스건과 같습니다. 그래서 외적소명을 말할 때 항상 걸리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피하여 갈 수 없습니다. 목사는 말씀을 대언하는 직분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존귀한 직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직분이 열매를 맺으려면 무엇보다도 설교자의 삶이 함께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설교가 자칫 공허한 메아리가 될 수 있습니다.
목사를 비판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고개가 끄덕입니다. 설교 가운데 돈에 대하여 자유하라고 가르치거나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하면서 막상 은퇴나 교회를 옮길 때 퇴직금에 대하여 과도한 욕심을 보이는 것을 보면 설교가 전부 거짓이었거나 아니면 사기였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물론 당사자의 말을 들으면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만 그러나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목사가 설교한 대로 살지 않으면 성도들을 영적 난민으로 내몰 수 있습니다. 어디를 가도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면 긴 시간 동안 난민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각종 이단과 사이비에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목사의 설교와 삶이 영적 난민을 막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목사의 공부는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습니다. 목회자는 신학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목회자는 계속하여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신학교는 목회자가 되기 위한 기본 과정입니다. 졸업 후부터 진정한 공부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종종 이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고시를 통과하여 안수를 받으면 공부도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 없습니다. 목사의 공부는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습니다. 설교자로서 목사는 신학과 실천을 위한 공부에 매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공부하지 않으면 특별히 신학공부를 지속적으로 하지 않으면 엉뚱한 소리를 하거나 테이프 돌아가듯이 똑 같은 말을 반복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설교를 표절하는 경유도 생깁니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목사의 공부는 교회를 바르게 세우고 성도를 올바르게 인도하는 길이 됩니다. 그래서 힘들어도 신학 책을 읽고 연구하는 자세를 충실하게 가져야 합니다.
성도들이 교회를 등지고 방황 할 때 목사의 게으름이 작용하고 있음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목사가 게으르면 성도도 자연스럽게 따라갑니다. 그러나 목사들이 배우기에 최선을 다하면 성도 역시 부지런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 설려고 합니다.
심판과 부활의 신앙을 가르치고 살아야 합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내세에 대한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현실에 만족하면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 땅을 살아가는 이들을 힘들게 하는 설교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직 편안한 설교만 합니다. 브루스 셀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소비자 지향이 되라는 커다란 압박을 받고 아십니다. 교회는 요구보다 호소가 필요함을 느낍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이 부담스러워 하는 지옥에 관한 설교를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편할 수 있으나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킵니다. 이에 대하여 코르 넬리스 프롱크의 지적입니다. “많은 사람이 지옥 설교를 내팽개친 까닭에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거의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들은 천국에 매력을 느끼지도, 지옥을 무서워하지도 않습니다. 이들은 지금 여기만을 생각하는 듯 보입니다”
지옥에 대한 설교가 없다면 천국을 소망하지 않을 것이며 부활에 대한 소망도 미미해질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떠나 갈 것입니다. 목사의 설교에서 사라져서는 안 되는 것이 심판과 부활의 신앙입니다. 담대하게 전할 때 지옥이 아니라 천국을 소망하고 천국 백성으로 살아갑니다. 많은 부분 설교자들의 담대한 선포가 빈약해질 때 성도의 교만과 방랑은 가속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지옥과 심판에 대한 성경이 말하는 것을 정직하게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도 동일하게 전해야 합니다. 지옥 설교가 천국을 소망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 신앙으로 무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살아갈 수 있도록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으로 진리를 전하는 일에 무엇보다도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 난민을 막는 일입니다.
교회를 찾는 이들이 소망하는 것은 성경적인 교회, 건강한 교회를 찾습니다. 그러나 지상의 어떤 교회도 미완성이기에 찾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교회를 실망하여 떠난 사람들이 찾고 있는 교회의 기대치는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만큼 교회가 실망을 많이 주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목사가 교회에 대하여 바른 자세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성도들은 작은 시험에도 흔들리고 맙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어떠한지를 정확하게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관성 있게 교회를 세워 간다면 성도들은 자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목사가 교회에 대한 사심이 없이 목회를 즐기고, 나누고 섬긴다면 아름답고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사역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깨끗하게 마무리를 해야 합니다. 모든 목사는 한 몸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부패함은 전체의 부패로 인식됩니다. 그러기에 순결하고 정직한 자리에서 사역하고 깔끔하고 아름답게 마무리를 진다면 영적 난민들은 제 고향을 다시 찾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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