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삶을 좌우하는 진짜 요인
한 사람의 삶은 수많은 요인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됩니다. 기후의 영향도 받고, 기질의 영향도 받고, 주변 사람들의 영향도 받고, 친구의 영향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 주변 환경과 종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 - 금수저 물고 태어나느냐 흙수저 물고 태어나느냐, 어떤 나라에 태어나느냐 – 미국에서 태어나느냐 한국에서 태어나느냐 아프리카 오지에서 태어나느냐가 삶에 영향을 미치고, 또 어떤 신을 믿느냐 - 알라를 믿느냐, 여호와를 믿느냐, 바알을 믿느냐, 부처를 믿느냐, 아무 신도 믿지 않느냐, 온갖 신을 믿느냐가 삶의 내용과 형식을 결정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 그리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저는 주변 환경이나 종교보다 더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세계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세계관이 앞에서 말한 것들보다 훨씬 깊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만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을 선하다고 보느냐 악하다고 보느냐’ 하고, ‘부처를 믿느냐 예수를 믿느냐’ 하고 어느 것이 더 삶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되십니까? 또 ‘이 세상이 스스로 존재한다고 보느냐 신의 창조물이라고 보느냐’ 하고, ‘미국에서 태어나느냐 한국에서 태어나느냐’ 하고 어느 것이 더 삶의 깊이와 방향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되십니까? 또 ‘이 세상이 영원하다고 보느냐 영원하지 않다고 보느냐’ 하고, ‘금수저 물고 태어나느냐 흙수저 물고 태어나느냐’ 하고 어느 것이 더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되십니까?
언뜻 생각하면 세계관보다는 주변 환경이나 종교가 훨씬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곰곰이 따져보면 환경이나 종교보다는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세계관이 훨씬 깊고 심대한 영향을 미칠 거라는 쪽으로 생각이 바뀔 것입니다. 왜냐면 삶의 모양을 결정하는 것은 세계관이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삶은 결국 세계관을 쫓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세계관이 노르스름하면 삶도 노랗게 물듭니다. 세계관이 불그스레하면 삶도 불그스레하게 물듭니다. 사실 사람들이 주변 환경이나 종교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주변 환경이나 종교가 세계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가장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세계관입니다.
2. 세상을 보는 두 관점
그렇다면 사람들은 보통 어떤 세계관을 갖고 살까요? 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세계관(흔히 ‘개똥철학’이라고 함)을 갖고 사는데 대충 어떤 세계관을 갖고 살까요? 사람마다 천태만상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크게 분류하면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세상은 초월적인 존재들(신령한 존재들)에게서 나왔다는 초자연적 세계관과 이 세상은 원자들의 우연한 조합일 뿐이라는 유물론적 세계관, 이렇게 둘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3. 초자연적 세계관
그러면 두 세계관 속으로 한 걸음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우주만물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령한 존재들, 신들이나 신화적 존재들이 창조했거나 그런 것들에서 나왔다고 보았습니다. 지구 곳곳에 흩어져 있는 여러 창조신화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창조신화들을 보면 대부분 신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수메르 신화를 비롯해서 바벨론 신화, 그리스 로마 신화, 인도의 [리그베다]에 나오는 신화, 중국의 반고신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화에는 여러 잡다한 신들이 등장하고, 그 신들이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싸우는 과정에서 우주만물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흔히 신화는 우스꽝스럽고 허무맹랑한 옛날의 케케묵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신화는 우주만물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세상만사는 왜 이렇게 복잡하게 돌아가는가에 대한 고대인들의 고민과 해석이 담긴 위대한 이야기입니다. 고대인들의 지혜와 지성이 빚어낸 최고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화들이 어떤 이야기로 가득합니까? ‘신화’(神話)라는 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태양이나 달이나 지구의 지층이나 바다나 산이나 인간이나 삶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고 신들의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어요.
왜 그럴까요? 그것은 고대인들이 우주만물을 단지 물질이라고 보지 않고 초월적인 존재들과 관련돼 있다고 봤기 때문이고, 수많은 세상사와 인간사 역시도 초월적인 존재들과 관련돼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비를 내리는 것이 하늘이고, 복과 화를 주는 것도 하늘이라고 보았지 않습니까? 자식을 낳는 것도 삼신할머니가 점지해주어서 낳는 것이고, 부부의 인연도 하늘이 정해주는 것이라고 보았지 않습니까? 고대인들은 이렇게 우주만물과 인생만사를 하늘의 조화로 보았습니다. 오늘도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자연적 세계관입니다.
4. 유물론적 세계관
하지만 모든 사람이 초자연적 세계관으로 우주만물을 보는 건 아닙니다. 기원전 5세기에 새로운 세계관이 등장했습니다. 기원전 6세기 사람인 탈레스와 그의 제자 아낙시만 드로스, 헤카타이오스가 세상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는데, 역사는 이들을 ‘밀레토스 학파’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우주만물을 이전 사람들처럼 신화나 종교적 방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이전 사람들이 우주만물을 신들과의 관계에서 봤다면 이들은 그냥 순수하게 우주만물 자체를 관찰했습니다. 이성을 면밀하게 사용하여 세계 자체를 비판적으로 관찰했습니다.
그 결과 밀레토스 학파의 창시자인 탈레스는 기하학, 천문학에 통달하여 기원전 585년의 일식을 예언하고, 1년을 365일로 나누고, 한 달을 30일로 정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지구가 아무런 받침대 없이 하늘에 떠 있다고 보았고, 지상의 물이 증발해서 비가 내린다는 걸 알았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초월적인 신들의 작품이 아니라 아페이론이라는 근원 물질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후에 데모크리토스는 우주 전체가 끝없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고, 원자들이 그 공간을 떠돌아다닌다고 보았습니다. 원자들이 공간 속을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며 서로 부딪치기도 하고, 서로 뭉치고 밀어내기도 하다가 이런저런 조합을 이룬 것이 바로 사물이라고 보았습니다. 더욱이 원자들이 여러 조합을 이루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나 목적이 없고 우연히 그렇게 된 것 뿐이라고 보았습니다. 한 마디로 물질이 단지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물론적 세계관입니다.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 유물론적 세계관을 따릅니다.
물론 초자연적 세계관에도 여러 유파가 있고, 유물론적 세계관에도 여러 유파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관은 문화마다 다르고, 나라마다 다르고, 종교마다 다르고, 인종마다 다르고, 사람마다 조금씩 다 다릅니다. 하지만 모든 세계관을 초자연적 세계관과 유물론적 세계관이라는 두 범주 안에 넣어도 무리는 없겠다 싶습니다. 실제로 봐도 사람은 우주만물을 하늘의 조화라고 보며 살거나(초자연적 세계관), 원자들의 조화라고 보며 살거나(유물론적 세계관), 어느 한 쪽 세계관에 기대어 살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5. 성경이 말하는 세계의 모습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둘 중 어느 하나에 기대어 살아왔을 가능성이 많은데 어느 세계관에 기대어 살아오신 것 같습니까? 초자연적 세계관에 기대어 살아오셨나요, 유물론적 세계관에 기대어 살아오셨나요? 또 어느 세계관이 옳다고 보십니까? 인간은 오랜 세월 이 문제를 놓고 논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결판이 나지 않았습니다. 과학 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한 지금도 이 논쟁은 계속되고 있고,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세계관 논쟁이 끝없이 계속될까요? 그것은 두 세계관이 다 옳고 다 틀렸기 때문입니다. 초자연적 세계관도 옳지만 틀렸고, 유물론적 세계관도 옳지만 틀렸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알고 그렇게 단언하느냐고요? 하나님이 주신 두 책, 성경이라는 책과 자연이라는 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성경을 보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신다고 말합니다. 몇 구절만 보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하시니라”(창1:1)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함으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40:26)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사45:18)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골1:16)
이 말씀 외에도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다섯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이 세상은 선하고 지혜로우신 하나님, 특히 사랑이 많으시고 원대한 뜻을 품으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둘째, 특별히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릴 존재로 창조하셨다.
셋째, 사랑이신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사랑으로 다스릴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서로를 정의롭게 대하며 사랑하기를 소망하신다.
넷째, 이 세상이 비록 악으로 물들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매우 선한 세계로 창조되었다.
다섯째, 이 세상은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은총을 누릴 것이고, 사랑과 선이 승리하는 종말론적 새 세계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릴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주만물을 바라보는 성경의 세계관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보존하시는 세상으로 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다고 봅니다. 좀 보편적인 언어로 말하면 우주만물을 하늘의 조화로 봅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적 세계관의 전부일까요? 성경은 과연 초자연적 세계관으로만 세상을 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안에는 놀랍게도 또 다른 세계관, 즉 유물론적 세계관의 가능성도 숨 쉬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봅시다. 창세기 1장에는 놀라운 이야기가 나오는데,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는 이야기를 죽 늘어놓다가 갑자기 땅과 물에게 명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땅에게 푸른 잎이 돋게 하라, 씨 맺는 채소와 각종 과일 나무를 돋게 하라(창1:11), 온갖 짐승을 내라(창1:24)고 명하시는 장면이 나오고, 또 물에게도 온갖 수중 생물들을 내라(창1:20)고 명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렇게 됐다고 선언합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만 창조한 게 아니고 땅과 물을 사용해 창조하셨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땅과 물을 하나님의 창조 작업에 참여시켰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이 세상은 단지 물질 덩어리가 아니고 온갖 생명을 잉태하는 ‘생명의 자궁’이라는 말이지 않습니까? 이 세상은 하나의 기계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유에 참여하는 ‘자율의 세계’라는 말이지 않습니까?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도 이 구절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땅에서 모든 동식물이 탄생한다면 그것은 무기물에서 생명이 생긴다는 말이다.”(신, 인간 그리고 과학. 시유시. 119쪽)라고 해석했습니다. 이 해석은 다분히 유물론적 해석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해석에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판넨베르크처럼 저도 동식물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땅이라는 무기물, 물이라는 무기물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한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생명을 창조했다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창2:7). 또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도 했습니다(창3:19). 이 말은 진짜 찰흙덩어리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흙을 구성하고 있는 입자와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입자가 같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성경이 말하는 대로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면 동물은 더 말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이것은 오늘의 과학이 말하는 바입니다. 오늘의 과학은 우주의 별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이 인간의 몸을 구성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별들과 인간의 몸이 원재료가 같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유물론입니다. 그런데 성경 안에 이런 유물론적 세계관이 담겨 있습니다.
6. 자연이 말하는 세계의 모습
자연이라는 책은 어떨까요? 우리 앞에 펼쳐져있는 우주만물을 보노라면 비록 폭력과 죽음과 재해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것들이 기막힌 조화를 이루며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태양계만 해도 항성인 태양을 중심으로 8개의 행성이 질서 있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도 지금 시속 1667㎞의 속도로 자전을 하고 있고, 초속 30㎞라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공전을 하고 있습니다. 길가에 핀 코스모스는 어떻습니까? 수많은 코스모스가 다 같은 색깔과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장미는 장미대로,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고유한 향과 모양과 색깔을 하고 있고, 고양이는 고양이대로, 소는 소대로, 돼지는 돼지대로의 일정한 모양과 성격과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예, 우주만물은 무한히 다채로운데 무한히 다채로운 우주만물이 몇 개의 운동 방정식, 몇 개의 에너지 방정식으로 설명될 만큼 단순한 원리로 작동하고 있고, 몇몇 원자들의 결합으로 모든 물질과 생명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통일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이렇게 우주만물이 조화롭게 움직이고 통일성을 이룰까요? 어떤 분이 우주만물을 창조했기에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분이 우주만물을 다스리고 계시기에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우주만물을 깊이 들여다보면 저절로 이런 생각이 스칩니다. 이것이 바로 초자연적 세계관입니다. 자연 안에는 이렇게 초자연적 세계관의 일면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일면이 있습니다. 모든 생명을 보십시오. 모든 생명은 놀랍도록 자율적입니다. 아름다운 질서 속에 은혜로운 자율이 숨 쉬고 있습니다. 고양이를 봅시다. 고양이 10마리가 있다면 이놈들이 기계처럼 동일하게 움직이나요? 절대 그러지 않습니다. 제각각 다르게 움직입니다. 어떤 놈은 누워 있고, 어떤 놈은 먹고 있고, 어떤 놈은 걷고 있고, 어떤 놈은 다른 고양이하고 장난치고 제각각입니다. 또 제가 잡으려고 하면 날쌔게 도망갑니다. 쥐를 보면 잡으려고 달려들고, 먹이가 있으면 조심스레 다가가 먹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직접 조종하지 않습니다. 고양이 스스로 반응하고 움직입니다. 상황에 따라 우발적으로 행동합니다.
식물도 빛에 반응하고 기온에 반응합니다. 물이 없으면 살기 위해서 물이 있는 곳까지 깊숙이 뿌리를 내립니다. 또 씨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 식물마다 기발한 방식을 사용합니다. 바람에 날려 보내는 방법을 쓰기도 하고, 동물이 따먹고 씨앗을 퍼트리라고 열매를 맺기도 하고, 꿀을 생산해 벌이나 나비를 부르기도 하는 등 기발한 방식을 사용합니다. 이 모든 것도 하나님이 직접 조종하지 않습니다. 유전자가 그런 기능을 하도록 진화한 것입니다. 심지어 원자까지도 필요에 따라 끌어당기기도 하고 밀쳐내기도 하고, 어떤 원자하고는 뭉치고 어떤 원자하고는 뭉치지 않기도 합니다. 원자핵을 도는 전자도 사람이 볼 때하고 보지 않을 때하고 다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 기계와 같이 고정된 세계가 아니고 자율성이 있는 세계라는 걸 암시합니다. 우주만물이 외부 요인에 의해서만 작동하는 게 아니고 내부 요인에 의해서도 작동하고, 우연의 방식으로 번성해갈 수 있는 잠재력을 품은 세계라는 걸 암시합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부속품이나 장난감이 아니고 스스로 뭔가를 행하는 주체라는 걸 암시합니다. 세상이 이런 곳이라는 것이 바로 유물론입니다. 자연 안에는 이렇게 유물론적 세계관의 일면이 담겨 있습니다.
7. 참으로 부질없는 세계관 논쟁
이처럼 성경이라는 책과 자연이라는 책 안에는 초자연적 세계관과 유물론적 세계관이 담겨 있습니다. 성경과 자연 모두 이 세계는 초자연적 세계관과 유물론적 세계관이 공존하는 세계라고 말합니다. 옳습니다. 이 세계는 초물리적인 세계만도 아니고 물리적인 세계만도 아닙니다. 이 세계는 초물리적인 세계와 물리적인 세계가 공존합니다. 동전에 양면이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 물질과 정신이라는 양면이 있는 것처럼 이 세계 또한 양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리적인 면과 초물리적인 면,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 이렇게 양면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고생물학자이자 신학자인 떼이야르 드 샤르댕은 “우주 바탕의 구조는 두 얼굴이다. 곧 사물의 바깥이 있는 만큼 안도 있다.”, “우주에 대한 해석이 만족스러우려면 사물을 겉뿐만 아니라 속도 짚어야 한다. 물질 뿐만 아니라 얼도 살펴야 한다.”고 했습니다(인간 현상. 한길사. 65,46쪽). 사실입니다. 모든 사물에는 안과 밖이 있습니다. 돌에도 안과 밖이 있고, 지구에도 안과 밖이 있고, 나무에도, 고양이에도, 사람에도 안과 밖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하늘’과 ‘땅’이라고 언어로 표현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여기서 ‘하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초물리적인 세계를 뜻하고 ‘땅’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는 하늘과 땅이 있는 세계인데, 하늘과 땅이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세계, 하늘과 땅이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인 참으로 묘한 세계라는 말입니다. 안과 밖이 있는 세계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두 세계관이 싸우면 뭐하겠습니까? 이 세계관이 옳다, 아냐 저 세계관이 옳아, 라고 우기며 피터지게 싸운다 한들 결판이 나겠습니까? 승패 없는 싸움만 계속될 뿐입니다. 신학과 과학의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각기 자기가 옳다고 큰소리치지만 다 부질 없는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한 쪽 세계관에 코 박지 마시기 바랍니다. 초자연적 세계관에 코 박지도 마시고, 유물론적 세계관에 코 박지도 마시고, 오직 두 세계관을 다 품으시기 바랍니다. 두 눈으로 세상을 보듯이 두 세계관으로 우주만물을 보고 세상만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이것만이 진정으로 성경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사실 적잖은 그리스도인이 성경 말씀을 문자대로 믿는 것이 좋은 믿음이고, 초자연적 세계관을 갖는 것이 순전한 믿음이라고들 생각합니다. 심히 왜곡된 생각입니다. 거기에 속으면 안 됩니다. 순전한 믿음이란 오직 성경이 세상을 보는 것처럼 보는 것, 즉 초자연적 세계관과 유물론적 세계관 이 두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는 것이 진정으로 성경 말씀을 믿는 참 믿음입니다. 정말입니다. 믿음의 관건은 세계관에 달려 있습니다. 세계관이 회심하지 않은 믿음은 참 믿음에서 거리가 멉니다. 성경 말씀과 아무 상관없는 믿음이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세계관이 달라지는 것만이 진짜 회심이고, 세계관이 구원받는 것만이 진짜 구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두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볼 때 비로소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편협하고 왜곡된 신앙에서 해방되어 우주만물을 품는 신앙으로 거듭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세상을 품고,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경험하는 참 신앙의 사람이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만이 바르고 풍성한 신앙의 세계에 참여하는 복을 향유합니다. 여러분, 모두 이 복을 향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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