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하나님의 두 책, 성경과 자연 (시편19:1-10)

새벽지기1 2019. 10. 7. 07:06


1. 창조, 기독교 신앙의 근본 토대

 

여러분, 성경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 많은 이야기가 의지하고 있는 근본 토대는 과연 무엇일까요? 십계명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일까요? 구원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일까요? 하나님의 나라일까요? 하나님의 창조일까요? 여러분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하나님의 창조가 모든 성경 이야기의 근본 토대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성경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창1:1). 여호와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창조하신 ‘창조자’라는 것이 성경의 첫 증언입니다.


흔히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의 중심인물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이 성경의 중심 주제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신학과 신앙의 핵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이라고 말합니다. 옳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빠지면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해석되지 않는다는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축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이 기독교 신앙의 토대요 출발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오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것,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분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전부는 아니지만 기독교 신앙의 근본 토대이자 출발점인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최초의 신학자인 바울의 편지를 보면 금방 확인됩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부터 11장에 걸쳐 실로 장대한 구원의 드라마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12장부터 15장에 걸쳐 구원받은 자들이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할지를 비교적 소상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하나님의 구원과 구별된 삶에 대해 말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근거로 제시한 것이 뭔가 하면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 였습니다(롬11:36). 고린도전서에서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권면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로 제시한 것이 뭔가 하면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주의 것’(고전10:26)이다, 였습니다.

바울의 논리는 아주 간단해요. 하나님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느냐, 이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또 사람이 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느냐, 그것도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예, 바울의 구속 신학과 윤리 신학은 올곧이 ‘하나님의 창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 또한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출발하고, 하나님의 창조에 기초하여 전개되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두 책, 성경과 자연

 

달리 말하면 성경의모든 이야기와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경과 세상이 어떨 것 같습니까? 서로 어긋나고 모순될 것 같습니까, 조화와 일치를 이룰 것 같습니까? 당연히 조화와 일치를 이룰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물리학자 데보라 하스마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녀는 세계의 기원에 관한 책에서 “하나님은 자연과 성경에서 스스로를 모순되는 존재로 드러내지 않으신다. …… 하나님은 자기 모순적인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자연과 성경은 서로 충돌할 수가 없다.”(오리진. IVP. 82,106쪽)라고 말했습니다. 대다수 신학자들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성경과 자연(인간도 포함된 자연)을 일컬어 하나님의 두 책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이고, 자연은 하나님의 일반계시라고 약간의 구별을 하기는 했지만 둘 다 하나님의 계시라고 보았습니다.

 

예,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만 주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자연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책도 주셨습니다. 자연이라는 신묘막측한 책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다윗은 시편 19편에서 이 사실을 말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v1-4)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없는 자연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말없는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연이어 말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v7-10)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시지만 율법(성경)을 통해 더 정밀하게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롬1:20)고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우주만물이 하나님의 책이라는 말입니다. 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3:16)고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라는 말입니다. 다윗과 바울은 이렇게 성경과 우주만물을 하나님이 주신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 신학과 과학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과 자연이라는 두 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인간은 놀랍게도 이 두 책을 읽으며 살아왔습니다. ‘성경’이라는 책과 ‘자연’이라는 책을 열심히 탐독하며 살아왔습니다. 물론 전 인류가 ‘성경’이라는 책을 읽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전 인류가 ‘자연’이라는 책을 읽은 건 사실입니다.

인간은 자연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수많은 물음을 던졌습니다.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엇이 있는지, 우주만물은 어디서 왔는지, 모든 생명은 왜 죽는지, 우리는 왜 여기 있는지, 삶에는 목적이 있는지, 왜 고통이 있는지, 죽음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는지, 창조자는 있는지, 있다면 어떤 분인지, 우주의 천체들은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든 사물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물질은 무엇이고 정신은 무엇인지 등을 물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과학(철학)입니다(과학 혁명 이전까지는 철학과 과학이 분리되지 않았음). 과학은 ‘자연’이라는 책을 읽는 것입니다.

또 인간은 성경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 세상은 왜 존재하는지, 이 세상은 어떤 곳이며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삶의 의미와 목적이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 모든 생명은 왜 죽는지, 왜 고통이 있는지, 세계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죽음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는지,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는 어떤 세계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등을 물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신학입니다. 신학은 ‘성경’이라는 책을 읽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앞에서 나열한 물음들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주만물을 읽으면서 던지는 물음과 성경을 읽으면서 던지는 물음이 비슷한 것 같습니까, 완전히 다른 것 같습니까? 잘 살펴보세요. 사실상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언뜻 보면 신학과 과학이 완전히 다른 학문인 것 같은데 학문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물음을 보면 사실상 비슷합니다.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신학과 과학의 물음이 비슷해져요.

돌멩이 하나만 놓고 생각해봅시다. 돌멩이를 연구하는 것은 신학과 아무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우선 과학자들은 돌멩이를 여러 방식으로 분석할 것입니다. 이 돌에 어떤 성분이 들어있는지, 이 돌이 어떤 과정을 거쳐 생성되었는지를 유심히 살필 것입니다. 그리고 돌멩이를 잘게 바순 다음 아주 작은 돌 알갱이(원자)를 들여다볼 것입니다. 이렇게 원자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물질이 덩어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고, 물질과 물질이 아닌 것의 경계가 희미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물질이 무엇인지를 묻게 될 것이고, 물질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창조자는 과연 있는지를 묻게 될 것입니다.

분명히 처음에는 신학과 아무 상관없는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돌멩이를 연구하면 할수록 점점 물음이 철학적인 물음, 신학적인 물음으로 바뀝니다. 물질은 무엇인가, 물질은 어디에서 왔는가, 우연인가 조물주가 있는 것인가, 이런 물음들은 과학적인 물음이기도 하지만 신학적인 물음이기도 한데 돌멩이를 연구하다 보면 결국 이런 신학적 물음을 묻게 됩니다. 과학과 신학은 이렇게 만나요. 전혀 안 만날 것 같은데 어느 시점이 되면 만납니다.

왜 그럴까요? 과학과 신학이 공히 세계의 근원 진실을 묻고 탐색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신학이 모두 인간의 궁극적 관심사, 세계의 궁극적 진실을 파고드는 작업이기 때문에 과학의 끝에 가면 신학적 질문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얼치기 과학자는 신학적 질문과 만나지 않습니다. 얼치기 과학자는 과학적 질문만 붙잡고 씨름할 뿐이지 신학적 질문까지 파고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진짜 과학자는 반드시 신학적 질문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에 신학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와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 깊은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게 되어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진정한 신학자는 과학적 질문과 만나게 되어 있다, 그 말입니다. 물론 얼치기 신학자는 과학적 질문과 만나지 않습니다. 얼치기 신학자는 성경이라는 하나의 책만 붙잡고 씨름할 뿐이지 과학적 질문과 대면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진짜 신학자는 반드시 과학적 질문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몇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신학과 과학의 대화에 적극적이었던 독일의 신학자 판넨베르크는 신학 작업을 하는데 있어 과학 작업의 도움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일 신학자들이 하나님을 실재 세계의 창조주로 인식하고자 원한다면 과학이 기술하고 있는 세계를 우회할 수 없다.”(자연신학. 한국신학연구소. 62쪽)

같은 취지의 이야기를 물리학자인 데보라 하스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와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연구를 우리는 결코 분리할 수 없다. 두 영역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같은 하나님을 향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느 한 쪽을 더 중시해 다른 한 쪽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일부를 무시하는 처사다.”(오리진. ivp. 30,40쪽)라고 말했고, 영국의 종교철학자 키스 워드는 “그렇기에 과학이 우리가 사는 우주의 아름다움과 광대함, 우주의 이성적인 구조를 점점 더 발견해낼수록 신에 대한 깨달음도 더 깊어지고 예배 또한 더 진중해질 수 있습니다.”(신, 우주와 인류의 궁극적 의미. 비아. 49쪽)라고 말했습니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도 한 마디 보탰습니다.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이고,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다.”

 

4. 신학과 과학의 대결

 

진실로 그렇습니다. 신학과 과학, 과학과 신학은 동행할 수 있고, 동행해야 합니다. 둘이 동행할 때 비로소 신학이 신학의 우물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과학이 과학의 우물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나온 역사를 보면 신학과 과학은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웠습니다. 완전히 돌아서서 각자의 길을 가기도 했지만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운 적이 많았습니다. 과학은 우주 어디에도 신은 없으며 성경은 신의 말씀이 아니라고 으르렁거렸고, 신학은 과학이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이론(가설)에 불과하다고 으르렁거린 적이 많았습니다.


몇 사람의 이야기만 들어보겠습니다. 이 시대에 무신론 전도자를 자처하는 리처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종교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고 애드벌룬을 띄운 후, 종교가 없으면 자살 폭파범도, 911테러도, 십자군도, 마녀사냥도, 인도 분할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서 벌어진 대량학살도, 북아일랜드 분쟁도, 신성 모독자에 대한 공개 처형도, 속살을 살짝 보였다는 죄로 여성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행위도 없었을 것이라고 암시합니다. 또 화학과 철학을 공부한 미국의 로버트 퍼시그가 한 말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하고,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를 인용하며 ‘신은 거대한 착각이요 망상’이라는 자기 신념을 드러냅니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1927년 영국 비종교인협회 초청으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주제로 강연했는데, 러셀은 그 강연에서 전통적인 신 존재 증명을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반박해가다가 ‘종교란 두려움에서 생겨난 질병’이라고 혹평했습니다. 그리고 강연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가상의 후원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말고, 하늘에 있는 후원자를 만들어내지 말고, 여기 땅에서 우리 자신의 힘에 의지해, 이 세상을, 지난날 오랜 세월 교회가 만들어온 그런 곳이 아니라 우리가 살기 적합한 곳으로 만들자.”(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사회평론. 40쪽).

“신은 죽었다”고 선포한 니체는 기독교는 나약하고 천박하고 실패한 자들의 종교이고, 인류의 단 하나의 영원한 오점이라고 일갈했습니다(안티 크리스트).

 

과학만 신을 부정한 것 아닙니다. 신학도 과학을 부정하고 멀리했습니다. 500년 전인 16세기에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 대신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교회와 많은 신학자들이 지동설을 부정했습니다. 성경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가톨릭뿐 아니라 종교개혁자 루터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부정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여호수아가 지구를 정지하라고 명령한 게 아니라 태양을 정지하라고 명령했다(수10:12)고 했으니까 자기는 지동설을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인 칼 바르트도 [교회 교의학]에서 창조론을 서술하며 ‘신학적 창조론은 원칙적으로 과학적 기술들과 결과들에 관여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창조과학자들은 오늘도 여전히 진화론과 열심히 싸우고 있습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진화의 흔적들을 발견하고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실험을 통해 검증되고 확인된 이론이 아니라며 싸늘하게 외면하고 있습니다.

 

5. 신학과 과학의 대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신학과 과학은 본래 서로 대화하고 협조하며 동행해야 마땅한데 그러기는커녕 서로 으르렁거리며 대결하고 있습니다. 신학은 신학만이 진리라고 고집하고 과학은 과학만이 진리라고 고집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여당과 야당이 날이면 날마다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것처럼 신학과 과학도 기회만 되면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웠습니다. 이제는 제발 그런 싸움을 중단해야 하겠습니다. 신학은 과학에 귀 기울이고 과학은 신학에 귀 기울이면서 함께 동행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의 신앙이 훨씬 풍성해지고 깊어지고 균형 잡히는 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욥을 보겠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욥은 알 수 없는 고난에 파묻혀 고생했습니다. 욥은 고난 중에 있을 때 친구들과 치열하게 신학적 논쟁을 하기도 했지만 온 몸으로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탄원하기도 했습니다. 왜 이런 고난이 닥친 거냐고, 소리 높여 부르짖어도 왜 아무런 대답이 없느냐고, 복을 바랐는데 왜 재앙이 왔느냐고, 광명을 기다렸는데 왜 흑암이 왔느냐고 울부짖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심한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답하기는커녕 오히려 욥에게 묻기만 했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있었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느냐, 어느 것이 광명의 길로 가는 길이고 어느 것이 흑암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인지 아느냐, 비에게 아비가 있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얼음은 누구의 태에서 났느냐, 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 매가 날개를 펼쳐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네 지혜로 말미암은 것이냐,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느냐는 등 수많은 물음을 퍼붓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 물음을 들은 욥이 어떻게 됐습니까? 놀랍게도 욥의 입에서 새로운 신앙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무슨 말입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이전에 하나님을 알았던 것보다 더 깊어지고 선명해졌다는 말입니다. 욥은 분명히 하나님의 물음을 들었을 뿐인데 욥 안에서 놀라운 변화가 있어났습니다. 욥의 하나님 인식이 이전보다 깊어졌습니다.

 

여러분, 이 변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이 변화를 제대로 해석하려면 먼저 욥과 하나님이 던진 질문이 어떤 질문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던진 질문을 하나하나 뜯어보십시오. 모두가 신학적 질문이라는 게 눈에 띌 것입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욥에게 던진 질문을 하나하나 뜯어보십시오. 놀랍게도 대부분이 과학적 질문이라는 게 눈에 띌 것입니다. 맞습니다. 욥의 질문은 몽땅 신학적 물음이었고, 하나님의 질문은 거의 과학적 물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우주만물을 가리키며 이런저런 과학적 물음을 쉼 없이 던졌습니다.

이 때 욥이 물음을 듣기만 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물음은 사람을 생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물음은 놀랍게도 생각의 문을 두드립니다. 이것이 물음의 놀라운 작용이에요. 욥도 하나님의 물음을 들었을 때 분명히 생각했을 겁니다. 하나님의 물음이 이끄는 대로 우주만물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하나하나의 물음을 골똘히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면서 점점 하나님과 자기가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가 깨달아졌을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범접할 수 없는 광대하신 분이라는 것, 자기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 것도 행할 수 없는 티끌에 불과하다는 것이 너무도 자명하게 다가왔을 겁니다. 아니, 실제로 그랬습니다. 욥이 실토했어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일이 없는 줄 아오니”(욥42:2)라고 고백했고, 자기에 대해서는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42:3)라고 자백했습니다.

 

결국 욥의 변화는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우주만물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열림으로써 일어났다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쉼 없이 과학적 질문을 퍼부은 것도 욥으로 하여금 우주만물을 바라보게 하고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우주만물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최고의 지름길이니까 우주만물을 바라보게 하고 생각하게 하려고 과학적 질문을 퍼부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것이 과학입니다. 과학은 다른 게 아니에요. 우주만물을 깊이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과학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과학적 질문을 통해서 욥을 일깨웠습니다. 욥은 수많은 과학적 물음 앞에서 변화됐습니다. 욥의 신앙이 더 온전해지고 풍성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학을 멀리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과학을 신앙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은데 그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과학은 신앙의 적이 아닙니다. 과학은 신앙의 친구입니다. 신앙을 온전케 세우는 조력자입니다. 신학의 세계와 과학의 세계가 통합되는 그 자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자로 믿는 참 신앙의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