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격성의 실체
우리는 인간을 가리켜 ‘인격적 존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인격’이란 사람에게만 있는 어떤 ‘격’, 다른 동물이나 식물에게서는 발견되지 않고 오직 사람에게서만 발견되는 어떤 ‘격’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서만 발견되는 ‘어떤 격’이 무엇일까요? 저는 ‘의문’(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17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인격의 실체를 ‘생각’이라고 본 겁니다. 조각가 로댕이 만든 작품에도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앉아서 팔을 턱에 괴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그 조각상은 인간이 어떤 격을 가진 존재인지를 말해주는 최고의 작품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예부터 인격의 실체를 ‘생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보다 ‘의문’이 더 인격의 실체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인간은 끝없이 의문하며 삽니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왜 여기 있는 걸까?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있을까? 이 세상은 누가 만들었을까? 이 세상은 어떤 곳일까? 왜 모든 생명이 고통당할까? 왜 모든 생명이 죽을까? 죽음 후에는 어떻게 될까? 광활한 우주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우주에는 관연 지향점 같은 것이 있을까? 우리 삶에는 목적이 있을까? 신은 존재할까?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고통과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뭘 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행복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행복할까?] 등등 인간은 끝없이 의문하며 삽니다. 그냥 사는 사람은 없어요. 반드시 의문을 하며 삽니다. 인간은 그저 묻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묻고, 본능적으로 묻습니다. 바다의 물결이 쉼 없이 출렁이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에는 의문의 물결이 쉼 없이 출렁입니다.
솔직히 저는 침팬지에게 이런 의문이 있는지 잘 모릅니다. 꽃에게 이런 의문이 있는지 잘 모릅니다. 고래에게 이런 의문이 있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이런 의문이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압니다. 사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영혼 속에 의문의 물결이 출렁이고 있기 때문에 인간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인격의 실체는 의문이라 할 만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동안 의문을 정죄하고 억압해왔습니다. 의문을 사탄의 앞잡이라도 되는 양 불온시 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왜 의문하며 살까?
인간은 자고로 묻습니다. 그저 묻고, 자기도 모르게 묻고, 본능적으로 묻습니다. 인간의 영혼에는 항상 의문의 물결이 출렁입니다. 그렇다면 물읍시다. 인간은 왜 이렇게 끝없이 의문하며 사는 걸까요? 그 이유는 이 세상이 물샐 틈 없이 완전한 세상이 아니고 틈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틈이 있고, 나와 너 사이에 틈이 있고, 우리가 꿈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 틈이 있고, 결정적으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틈이 있기 때문에 끝없이 의문하며 사는 것입니다.
저만 해도 저는 제가 원하는 제가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저와 현재의 저 사이에는 틈이 있습니다. 제 삶도 제가 원하는 삶과 현재의 삶 사이에 틈이 있습니다. 제가 발 딛고 사는 이 세상도 제가 꿈꾸는 세상과 현재의 세상 사이에 틈이 있습니다. 바로 이 틈이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틈도 없다면, 제 안에 틈이 없고, 이 세상에 틈이 없고, 이상과 현실 사이에 틈이 없고, 하나님과 저 사이에 틈이 없다면 아마 의문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틈이 있으니까, 제 안에도 틈이 있고, 세상에도 틈이 있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도 틈이 있으니까 자꾸 의문이 생기는 것이고, 의문이 생기니까 자꾸 묻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탄식하는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시편 6편에는 자기 몸이 쇠약해져 뼈들이 떨고 있고, 영혼도 떨고 있고, 탄식으로 기진하여 밤마다 울음으로 잠자리를 적시고, 시름이 너무 깊어 눈이 어두워졌다는 탄식이 나옵니다. 시편 42편에는 밤낮으로 눈물을 먹고 살고, 자기 영혼이 녹아내리며, 자기 안에 신음이 그치지 않으며, 온종일 사람들에게 모욕을 받는다는 탄식이 나옵니다. 시편 기자들은 왜 이토록 깊은 탄식을 쏟아냈을까요? 그들의 삶에도 틈이 있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도 틈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3. 왜 틈이 있는가?
사실 수많은 천체는 질서정연하게 움직입니다. 몇 가지 방정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정밀하게 움직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틈이 있습니다. 이 틈 때문에 모든 생명이 의문하며 살고 탄식하며 삽니다. 왜 이렇게 틈이 있는 것일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틈이 생겼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틈도 없는 완전한 세상, 한없이 아름답고 조화로운 복된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틈이 생겼다. 아담 한 사람 때문에 온 세상이 죄에 물들었고, 아담 한 사람 때문에 세상의 질서와 조화가 무너져 틈이 생겼다.’라고. 교회도 지난 이천년 동안 성경이 말하는 바를 그대로 반복했습니다. 아담 한 사람 때문에 완전했던 세상이 엉망진창이 된 것이라고 쉼 없이 말했습니다. 당연히 저도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설명으로 충분할까요? 정말로 아담 한 사람 때문에 세상의 모든 틈이 생긴 것일까요?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순간 아름답고 조화로웠던 세상이 찌지직하면서 균열이 생기고 없던 틈이 생긴 것일까요? 저는 이 세상이 그렇게 쉽게 마술적으로 변할 거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서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가 매우 중요한 설명임에는 틀림없지만 한 순간에 마술적으로 없던 틈이 생겼다고 보는 것도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잘 아는 대로 세상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거든요. 한 순간에 틈이 벌어질 만큼 그렇게 엉성하지 않아요. 그러면 곧바로 물음이 튀어나옵니다. ‘그럼 아담 이야기는 뭐요?’라는 물음이 튀어나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창조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라고 믿었고 지금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이 세상을 깊이 관찰하며 탐구해왔습니다. 지금은 눈부시게 발달한 과학 덕분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세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습니다. 오늘의 과학은 세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천체물리학에서부터 화석학, 고생물학, 양자물리학, 분자생물학, 심리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학은 이 세상이 완제품으로 출발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자동차가 자동차 공장에서 완제품으로 만들어져 나오듯이 하나님 품안에서 세상이라는 완제품이 만들어져 나온 게 아니고, 145억 년 전에 빅뱅으로부터 시작해서 아주 느리게 점진적으로 형성되어왔다고 말합니다. 145억 년이라는 실로 오랜 세월에 걸쳐서 아주 더디게 그러나 놀랍게 발전해왔다고 말합니다. 찰스 다윈은 150년 전에 ‘진화’라는 단어로 이것을 개념화했습니다. 다윈은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 제도의 생태계를 조사하면서 종의 변화가 자연선택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통찰을 얻고 20여년 이상을 계속 탐구한 후에 드디어 1959년 생물학의 혁명을 불러일으킨 [종의 기원]을 출판했습니다. 그는 책의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유추를 통해 다음과 같은 점을 생각하게 되었다. … 나는 유추를 통해 아마도 지구에서 살았던 모든 유기체는 처음으로 생명력을 가지게 된 어떤 하나의 원시 형태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론을 하지 않을 수 없다.”(종의 기원. 사이언스 북스. 643쪽). 다행히도 이 추론은 추론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에 의해서 다윈의 추론이 옳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오늘날 대다수 자연과학자들은 진화가 이 세상의 실재를 말해주는 최고의 설명이라고 극찬합니다.
과학자들만 그러는 게 아닙니다. 신학자들도 대부분 진화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완제품으로 출발한 게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해왔다고 인정합니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진화를 인정하는 신학자는 소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진화를 인정하는 신학자가 훨씬 많습니다. 극단적인 문자주의자들 외에는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진화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도 지금은 ‘일회적 창조’로 보지 않습니다. ‘계속적 창조’로 봅니다. 저는 ‘열린 창조’라는 말을 즐겨 씁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미래를 향해 ‘열린 창조’요 완전을 향해 ‘열린 창조’라고 즐겨 말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창조를 ‘열린 창조’라고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 작업이 열린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공장에서 완제품을 생산해내듯 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금 나와라 뚝딱” 하면 금이 나오는 도깨비 방식도 아닙니다. 모든 생명을 종별로 한꺼번에 와장창 만들어내는 마술적인 방식도 아닙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독불장군 방식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의 씨앗을 심는 것과 같은 방식,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단계를 밟아가는 방식, 세상을 통해 세상을 만들어가는 방식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닫힌 방식이 아니라 열린 방식, 미래를 향해, 완전을 향해 진화해가는 열린 방식으로 창조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놀라운 특징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은 창조 이야기로 시작해서 새창조 이야기로 끝납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한다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이것은 창조가 창세기 1장과 2장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주님 재림하시는 날까지 계속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작업은 한 순간에 끝나는 마술적 작업이 아니라 완성의 날까지 더디게 한 걸음씩 진행되는 진화적 방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 ‘진화’라는 말은 없지만 성경의 전체 구조를 보면 하나님의 창조가 진화적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이 강하게 암시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성경에 암시되어 있는 이 사실이 오늘날 과학에 의해서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학을 좀 공부한 사람은 무신론자든 유신론자든 다 진화를 인정합니다. 저도 이 문제로 20년 이상을 고민했습니다. 과학 공부가 너무 얕아서 고민만 했지 진화를 받아들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와서야 진화를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굉장히 많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국 진화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물론 한국교회 안에는 진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500년 전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했을 때 교회가 지동설을 부정한 것처럼 지금도 많은 교회가 진화론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진화’라는 말을 꺼내기만 해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지동설을 부정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저는 진화론도 50년쯤 후에는 부정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완제품 창조가 아니었다. 미래를 향해 무한히 열린 창조였다. 하나의 씨앗을 심어 가꾸는 것과 같은 창조였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창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더 간단하게 줄이면 [이 세상은 ‘공사중’(진화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 인간을 포함해 우주만물은 ‘공사중’입니다. 그리고 온 세상이 ‘공사중’이기 때문에 온 세상에 틈이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틈이 생겼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온 세상이 아직 ‘공사중’이기 때문에, 인간도 ‘공사중’이고, 동물도 ‘공사중’이고, 지구도 ‘공사중’이고, 우주만물도 ‘공사중’이기 때문에,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창조 작업 자체가 아직 최종적 단계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틈이 있는 것입니다. 제 안에 틈이 있고, 분열이 있는 것도 제가 아직 ‘공사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너무 탓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을 너무 몰아세우지도 마시고, 너무 학대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맘에 안 들더라도 너무 미워하지 마시고, 이 세상이 공정하지 않더라도 너무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아직 ‘공사중’이고, 이 세상 또한 아직 ‘공사중’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걸 인정하고 힘들지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4. 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 세상에 틈이 있는 것은 이 세상이 공사중(진화의 과정중)이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을 들으면 한 편으로는 납득이 되면서도 한 편으로는 뭔가가 꺼림칙할 겁니다. ‘아니,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6일 동안에 창조를 다 마치시고 일곱째 날 안식하셨다고 했는데 세상이 진화의 과정을 거쳤다고 하면 도대체 어느 게 맞는 거냐? 진화가 사실이라면 성경이 엉터리라는 말인데 그렇게 되면 기독교 신앙체계는 무너지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에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꺼림칙함이 있을 겁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진화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어쩌면 그런 꺼림칙함이 있어서일 겁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이 얼마나 광대하고 복잡하고 다양하고 정교합니까? 이런 세상을 창조한다는 게 그렇게 간단하겠습니까? ‘우주만물 나와라 뚝딱’ 한다고 해서 우주만물이 나올 만큼 간단하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할 사람은 아마 극소수일 겁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 역시도 그렇게 간단치 않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깊이 들여다보면 참으로 묘합니다.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이 세상은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 중에 가장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보았는데, 저는 이 세상이 불완전하다고 하기에는 완전한 구석이 있고, 완전한 세상이라고 하기에는 불완전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 세상은 완전의 씨앗, 완전의 잠재성은 살아있는데 아직 완전하지는 않은, 그렇다고 불완전하다고도 할 없는 아주 묘한 세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인간을 보면 세상의 이러함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인간은 참으로 기막힌 존재입니다. 인간에게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상상력과 잠재력이 숨어 있습니다. 또 모든 인간은 완전을 꿈꿉니다. 완전한 인간을 꿈꾸고, 완전한 사랑을 꿈꾸고, 완전한 만남을 꿈꾸고, 완전한 삶을 꿈꾸고, 완전한 세상을 꿈꿉니다. 우리는 이 꿈을 가리켜 이상(理想)이라고 합니다. 국어사전에서 ‘이상’(理想)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생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가장 완전하다고 여겨지는 상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상태’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모든 인간은 이런 이상(理想)을 꿈꿉니다.
솔직히 이상이 밥 먹여주지 않잖아요. 이상을 추구할수록 오히려 밥 먹고 살기 힘들잖아요. 그런데 왜 이상을 꿈꾸는 걸까요? 도대체 왜 인간 안에는 이상이 꿈틀거리는 걸까요? 이상과 현실 사이의 틈 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하면서도 왜 이상을 내려놓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 속에 완전의 씨앗, 완전의 유전자를 심어놓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인간 속에 완전의 씨앗, 완전의 유전자를 심어놓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완전한 인간이라는 이상을 꿈꾸는 것이고, 완전한 사랑이라는 이상, 완전한 만남이라는 이상, 완전한 삶이라는 이상, 완전한 세상이라는 이상을 꿈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 속에 완전의 씨앗을 심어놓았기 때문에 힘들고 더딤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인간, 완전한 사랑, 완전한 만남, 완전한 삶, 완전한 세상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고, 또 하나님이 인간 속에 완전의 씨앗을 심어놓았기 때문에 이상과 현실 사이의 틈에서 이토록 고민하며 탄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담 이후로 지금까지 모든 인간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완전의 씨앗은 가졌으나 아직 완전에 이르지는 못한 존재, 달리 말하면 이상과 현실 사이에 틈이 있는 존재로 살았습니다. 우주만물도 그렇습니다. 우주만물도 인간처럼 완전의 씨앗은 가졌으나 아직 완전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주만물에 틈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때가 되면 이 틈이 메워질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빅뱅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이 틈을 메워가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우주만물 속에 심어놓은 완전의 씨앗, 완전의 유전자를 통해 틈을 메워가고 있고, 더욱이 틈을 통해 계속적 창조를 하고 계시니까, 때가 되면 틈이 없는 날이 올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화입니다. 하나님은 진화의 방식으로 세상을 구성하시고 진화의 방식으로 세상을 형성해 오셨습니다. 진화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총동원된 최고의 창조 방식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진화의 방식으로 세상을 창조해 오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 진화의 흔적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진화의 흔적을 발견하고 추론한 다윈은 하나님의 사도입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다윈을 가리켜 하나님의 이름을 능멸한 신성 모독자요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반역자라고 비난하는데 다윈은 신성 모독자도 아니고 반역자도 아닙니다. 다윈은 하나님의 창조의 비밀을 드러낸 하나님의 사도요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고생물학자이자 신학자인 떼이야르 드 샤르댕은 다윈의 손을 잡고 하나님의 창조 속으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신학자 존 호트를 비롯해서 몰트만, 판넨베르크, 마크 해리스, 알리스터 맥그래스, 존 폴킹 혼, 미하엘 벨커 등 수많은 신학자들도 다윈의 손을 잡고 성경 속으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저 또한 지금 다윈의 손을 잡고 성경 속으로, 하나님 안으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쳐야겠습니다. 이 세상에 틈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죄가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자들이 더러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틈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완제품 생산 방식이 아니라 진화적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가 진화적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마지막 완성의 날이 오기 전까지는 이런저런 틈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틈은 내가 발버둥 친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무장한다고 해서 극복되지 않습니다. 오직 마지막 완성의 날이 와야 비로소 극복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는 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내 앞에 있는 틈이 너무 커서 때로 고통스럽기도 하고 절망스럽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살 수 있고,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살 수 있고, 부모를 원망하지 않고 살 수 있고, 남편이나 아내를 원망하지 않고 살 수 있고, 나를 원망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틈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을 수 있고, 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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