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컬럼3

버려진 태호가 밝게 사는 이유?

새벽지기1 2019. 9. 20. 08:01


요즈음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는 아이가 있습니다.
이름은 태호.
11살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양팔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버려졌습니다.
버려진 태호를 불교 승가원에서 키웠습니다.
얼마나 밝고 씩씩한 지, 어둔 구석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습니다.
두 발로 못하는 것이 없는 태호는 3살 어린 성일이를 동생처럼 돌봅니다.
태호보다 서너 배는 더 큰 성일이는 지적장애아로 그 역시 버려진 아이입니다.
그러나 둘이 깔깔대며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은 세상의 모든 시름을 잊게 합니다.

태호와 성일이를 보면서 문뜩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저 아이들이 저토록 밝은 이유는 부모의 손을 떠났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부모의 손에 의해서 키워졌다면 저토록 밝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 제 생각이 맞을 것입니다.

부모들은 그 아이들을 버렸습니다.
실망과 절망감 때문일 것입니다.
경험하지 못한 우리들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훨씬 더 복잡한 마음으로 버렸을 것입니다.
설사 키운다고 하더라도 그 복잡한 감정을 감출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감정은 부모이기 때문에 생긴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실망감이나 절망감으로는 자녀들을 제대로 밝고 씩씩하게 키울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부모의 눈치를 살핍니까?
부모의 긴 한숨은 아이들의 숨소리마저 죽이고,
언뜻 들은 부모의 탐욕스런 대화는 자녀들을 깊은 실망 속으로 빠뜨립니다.

훨씬 조건이 좋은 우리 부모들, 그리고 우리 자녀들이 태호나 성일이보다 어두운 이유,
그렇게 열심히 키웠는데도 아직도 철들지 않고,
또 뭘 해야 할 지 모르는 이유가 부모로서 나의 온전치 못한 사랑,
병든 사랑으로 키웠기 때문이 아닐까요?

승가원의 보모들은 아기 태호를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격려로,
불쌍한 마음으로 키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돌봐도 부모의 관심만큼은 못합니다.
그러니까 1시간의 제대로 된 사랑이, 100시간의 올바르지 못한 관심보다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태호는 보는 사람 모두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그런데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까?

태호를 통해서 우리들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전히 내가 옳다고, 내가 잘한다고 믿고 있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들, 깊게 병든 나를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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