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동식목사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새벽지기1 2018. 12. 20. 07:21
 


어디서 왔으며,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는가? 폴 고갱이 그린 그림의 제목이지만 모든 삶의 모습을 표현해주는 물음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다면 삶은 건강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없으면 삶은 참으로 불안정할 것입니다. 물론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질문조차 없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잘 살고 있다고 생각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무력감이 밀려오는 시간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무력감을 약물을 통해 해결하려고 할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약물의 투입으로 자신의 삶을 마지못해 이어 나갈 것입니다. 

 

정신분석학의 이론적 토대를 놓았던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마지막 삶은 안락사였습니다. 프로이드는 죽음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을 날짜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치의에게 자기 생이 다하는 때를 알려달라고 고집했습니다. 그는 죽기 전 발자크의 “파멸의 가죽”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자신이 원하는 욕구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통제할 수 없는 공포 상태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프로이드는 이 책을 읽고 난 뒤 자신의 주치의에게 “자네는 전에 내 시간이 다할 때 나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네, 이제 남은 시간은 단지 고문 일뿐 더 이상 의미가 없네” 라고 말하고 안락사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런데 이런 프로이드가 가장 좋아한 시가 바로 하이네가 지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나사로”였습니다. 프로이드가 어떠한 사람인지 정확히 다 알 수 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의 세계관이 견고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의 정신적 고통을 덜어주는 일을 했던 프로이드는 자신의 고통과 두려움을 해소할 길이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살아야 할 삶의 목적을 알고 있다면 그 삶은 비록 험난한 길을 걷는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평탄한 길을 간다 할지라도 교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주어진 삶의 지형이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사람은 약물에 의지하여 살지 않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바로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또한 빈약한 세계관인 개인적 만족과 풍요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몸부림칩니다. 정치의 변화만 있으면 삶이 맑아 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의 평등이 이루어지면 행복이 찾아 올 거라는 환상이 있습니다. 경제적 정의가 세워지면 사회에는 웃음꽃이 피어 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이러한 웃음을 찾고자 투쟁해왔습니다. 저마다의 생각으로 웃음꽃을 피우기 위해 애써왔습니다. 하지만 너무 다른 세계관들의 충돌로 인해 결국 웃음꽃을 피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절망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는 무관심으로 일관하여 살아갑니다. 자신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옆에서 무엇을 하든 관심이 없습니다.

무관심한 세대는 참으로 무섭습니다. 무관심은 사람의 가치를 빈약하게 만듭니다. 무관심은 삶의 목적이 현실적이며, 물질적입니다. 여기에서 삶의 가치를 발견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무관심을 극복하지 않는 한 삶은 의미를 찾기 어렵습니다. 오직 찰나적인 쾌락과 즐거움에 빠져 살아갈 뿐입니다. 몸을 팔아 즐기는 세대는 가장 슬픈 역사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마침내 처절한 무너짐을 경험할 것입니다.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무관심에서 벗어나 삶의 질을 높이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 사는 일입니다. 우리의 영혼에는 하나님 외에는 만족할 수 없는 공간이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하지만 채우면 채울 수 록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결국 무엇으로도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무관심에 이르게 되고, 때로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 집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이 깊어 질 수 록 삶의 만족도 깊어집니다. 표피적인 신앙에 머물 때 신앙은 평안의 원천이 아니라 의심의 매개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사26:3]'고 외친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힘써야 할 것은 하나님을 더욱더 깊이 알아가는 일입니다. 그로인해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이 마침내 하나님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우리의 세계관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형성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선진들이 한결같이 전해준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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