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동식목사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믿음

새벽지기1 2018. 10. 30. 07:18


살다보면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너무나 자주 변합니다.

조금만 기쁜 일이 있으면 모든 것을 다 줄 것 같은 마음으로 대합니다.

반면에 조금 어려우면 세상의 모든 짐을 다 짊어진 것처럼 살아갑니다.

어제는 눈이라도 빼 줄 것 같더니 오늘은 없던 것으로 하자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마다 씁쓸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사자성어 가운데 ‘조변석개’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침저녁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일관성이 전혀 없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정부가 조변석개한다면 그 나라는 불 보듯 뻔할 것입니다.

어떻게 믿고 살아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조변석개하는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잘 되면 자기 탓하고 못 되면 남 탓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서 희망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앞에서 한 말 다르고 뒤에서 한 말 다르다면 믿을 만한 사람이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은 이런 사람을 좋아합니다. 앞에서 좋은 말만 해주기를 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일 그 사람이 어떻게 되는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환심만 사면 그만입니다.

반면에 쓴 소리를 하면 싫어합니다. 그래서 쓴 소리하는 사람들이 점점 적어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교회도 죄에 대해 지적하지 않습니다. 지적하면 싫어합니다. 내 삶인데 왜 간섭하느냐고 말합니다.

교회는 사랑만 전하라고 말합니다. 참 편리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함께 멸망으로 치닫는 일입니다.

교회가 생명을 낳는 끈끈한 영적 공동체가 되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소리도 들어야 합니다. 특별히 죄에 대해 지적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에 이르지 못합니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남으려면 죄 죽임이 있고 거룩으로 다시 살아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교회에 몸은 있지만 유사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 시대는 유사 그리스도인을 양성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것이 좋다는 생각에 머물게 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자기 부인이 없습니다.

오직 성공을 위한 질주와 만족을 위한 축배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부하고 즐겁게 살다가 마침내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방식을 믿음으로 받고 끝까지 그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아니고서는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새 길이 없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언제나 좁은 문을 통과하고 가야 합니다.

이 길을 가고자 할 때 우리가 마침내 구원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심지가 견고한 자가 평강에 평강으로 이른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평강을 구하는 자는 ‘안개와 같은 인생 가운데’ 보이는 것이 모든 것인 양 살아 갈 것입니다.

그는 잠깐 동안 쾌락을 누리고, 즐거움을 향유하고 살 것입니다.

하지만 눈이 감기는 그 순간 그 앞에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그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것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자는 이 땅에서 수고와 땀을 흘릴 것입니다.

부하기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나눔이 삶이 되어서 살아갑니다.

그러다 마침내 두 팔 벌리고 맞이하시는 하나님을 볼 것이며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과는 다른 삶이 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유사 그리스도인으로 적당하게 살기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잠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만족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심지가 견고한 믿음이 되기를 원합니다.

조변석개하는 믿음이 아니라 변함이 없는 믿음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시대의 짧고 얕은 믿음을 과감하게 던지고, 길고 깊은 거룩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거룩한 믿음입니다. 죄에 대해 무감각해짐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의 죄를 모른척하고 넘어가지 않습니다.

자녀가 아니라면 눈을 감습니다. 하지만 자녀이기에 간섭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기를 포기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이상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가까이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은 복입니다. 때로는 심한 꾸중이 있지만 꾸중을 들을 수 있음이 행복입니다.

이것이 싫으면 사생아 같이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 됨을 감사하고 그 안에서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꾸중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가 죄의 자리에서 조금이나마 멀어집니다.

이 마음이 변함이 없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