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동식목사

한국 교회의 자기 점검

새벽지기1 2018. 10. 19. 08:02


한국 교회의 자기 점검

 

기윤실에서 2008년,2009년도에 이어 2010년에 세 번째 한국교회 신뢰도를 조사하여 발표하였습니다. 이번의 결과는 이전보다 더욱 참담하였습니다. 여전히 한국교회의 신뢰지수는 형편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결과에 대하여 봉은사 땅 밟기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즉 주변 환경이 신뢰도에 영향을 주었다는 생각입니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응답자 중에서 한국 교회의 사회복지에 대한 이해가 높았다는 사실입니다. 타 종교에 비하여 월등히 사회복지에 대한 기여도가 높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뢰도는 로마 카톨릭과 불교에 이어 세 번째에 해당되었습니다. 이전에 한국 교회를 비판하였던 많은 분들이 한국 교회가 사회봉사가 미미하기에 신뢰지수가 낮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사회봉사와 참여에 있어서 가장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신뢰도는 매우 저조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러한 결과가 도출된 원인은 무엇일까요? 이제 이 문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신뢰도는 여러 가지 방면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한국사회의 평가이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한국 사회의 주류입니다. 어느 곳에나 교회가 없는 곳은 없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그리스도인을 만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만나는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서로의 평가는 저주 받을 정도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러한 현실을 만들어 내었을까? 사회봉사도 아니라면 무엇이 한국교회를 추락하게 만든 것일까? 냉정하면서도 사랑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자신을 점검하여 가야 할 방향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한국 교회가 스스로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첫째 딛1:16절 말씀을 점검해야 합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한국 교회가 선한 일을 많이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믿음과 행위가 괴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주일과 월요일의 삶이 너무나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세계관의 분열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관심은 오직 주일에만 집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월요일의 삶이 어떻게 되는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과정이 어떻게 되는 성공과 부를 누리고 교회에 이바지하면 그의 모든 삶이 다 면죄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그리스도인을 양성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를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불법을 조장하여 얻은 성공은 저주임을 선언해야 합니다.

 

둘째 막10:45절의 말씀을 점검해야 합니다. “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의 문제는 사회봉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를 섬기는 것은 당연한 책무입니다. 자랑 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은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또한 무익한 종으로서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회봉사로 인하여 교회의 신뢰도를 말하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회봉사를 하는 자세입니다. 무익한 종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되지 않고 군림하는 자세에서 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봉사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섬기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삶은 섬기는 것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지름길이고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 혹시 한국 교회는 넘어짐의 앞잡이가 되지는 않았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셋째 갈1:7절 말씀을 점검해야 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한국 교회 주변에서 배회하고 있는 호객들을 봅니다. 그것은 긍정과 목적을 통한 교회 성장입니다. 한국 교회처럼 교회 성장에 목말라하는 곳이 없습니다. 이러한 욕구는 개척교회보다 100명이상 되는 교회들이 더 난리입니다. 그래서 급성장하는 교회가 있다고 하면 그곳이 국내든 해외든 관계없이 몰려듭니다. 이러한 구조에는 목사의 재능을 성장으로 보는 미개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또한 성장을 해야 자신의 정체성과 자리를 보존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는 목사들의 어리석음도 한 몫 합니다.

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은 다름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해준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온전하게 전하는 것이 바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교회가 이 일을 진심으로 감당하고 있는 점검해야 합니다. 복음이 증거 될 때 영적인 껄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옷을 찢어야 합니다. 어떤 상담학을 가르치는 목사는 자신의 교회에서 더 이상 죄를 설교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고생한 성도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합니다.

서문 강목사는 병원에서 진단 받는 환자가 의사에게 병 이야기는 말고 다른 이야기 합시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죄에 대한 설교를 듣지 못한다면 교회에 올 이유가 없습니다. 행복의 이야기는 "아침마당"에서 자주 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아침마당"을 만들고 있지는 않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넷째 막11:17절 말씀을 점검해야합니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의 앞 절은 회당에서 물건을 파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회를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지 말고 기도하는 곳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간구를 올리는 교회가 가져야 할 기본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시장터가 되었습니다. 시장은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몸부림치는 곳입니다. 남의 이득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하든 이익을 얻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서로를 섬기고 자신이 손해 보는 것을 감수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하는데 시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CEO 예수라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종으로 왔다고 말하는데 사람들이 CEO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자 교회도 최고 경영자의 자리를 기뻐합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영기법을 통하여 교회를 세웁니다. 이웃 교회가 죽어도 우리교회만 크면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죽은 시체를 처리하여 주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 상도덕만도 못하는 짓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시장과 강도의 굴혈이 되어가고 있지 않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다섯째 미6:8절 말씀을 점검해야 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는 것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편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공의를 행함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인애와 자비를 사랑하는 나라입니다. 겸손한 나라입니다. 결코 칼과 망치로 되어 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선한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선한 일에 열심 하는 하나님의 친 백성입니다. 이 선을 공의와 인애와 자비와 사랑과 겸손입니다.

한국 교회는 그 어느 나라보다 교회 건축이 많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건축의 현장에 공의가 있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또한 위에 있는 권력에 순종해야 하지만 불의한 권력을 향하여 선지자적 공의를 전하였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이러한 공의함이 없다면 교회의 신뢰는 나날이 전락 될 것입니다.

 

여섯째 약 2:5절을 점검해야 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예수님은 낮은 자리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낮은 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존중히 여겨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난한 자들의 피난처였습니다. 그리고 가진 자들의 나눔의 장이었습니다. 여기에는 교만과 추함과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케 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오심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 4:18]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한다면 가난한 자를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이러한 존중함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자를 존중히 여긴다는 것은 단지 도와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가난함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전혀 제약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중직자가 되는데 가난이 장애물이 된다는 소리를 종종 듣습니다. 그의 인격과 신앙으로 보아서는 전혀 부족함이 없는데 단지 가난하다는 것이 교회의 일꾼이 되는 일에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된다면 이미 교회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상실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존중히 여기는 것은 그의 인격과 신앙 자체를 존중히 여기고 섬길 수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또한 가난한 자를 존중히 여기는 것은 타국인에 대한 존중함이 포함된 말입니다. 우리 시대는 이미 다문화 사회가 이루어졌습니다. 함께 사는 법을 즐겨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온 새터민, 재중 동포, 외국인 노동자, 결혼이민자등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무시하고, 평가하고, 가볍게 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가난한 사람을 존중히 여기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일곱 번째 딤후1:8절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한국 교회가 진지하게 점검해야 하는 것은 고난에 대한 자세입니다. 고난 받음이 부끄러움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교회가 진리를 위하여 고난 받기를 꺼려하고 있다면 복음의 진정성을 의심해야 합니다. 교회는 고난에 대한 분명한 역사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현실적 선지자 의식을 가지고 서는 것입니다. 교회는 현실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현실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광장입니다. 이 광장에서 우리의 본분을 잘 감당할 때 교회의 영광을 빛을 발합니다.

교회가 복음을 온전하게 실천하면 세상은 교회를 핍박합니다. 교회가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할 때 세상은 교회를 두려워합니다. 교회가 하늘의 음성을 온전히 전달하면 세상은 자신을 살펴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을 향한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 받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교회인지, 아니면 크고 넓은 길로 안전하게 가기를 추구하고 있는 교회인지 점검해야 합니다.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라면 모진 고난을 감당하면서 선지자적 사명을 통하여 맞이하게 될 잔소리에는 숨어 버리는 것을 종종 봅니다. 그래서 공의를 위하여 힘쓰는 이들을 격려하고 섬기는 것을 잘 하지 못합니다. 당장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복음과 함께 진정성 있는 고난을 감당한다면 세상은 교회의 소리를 가볍게 여기지 못 할 것입니다. 우리의 현주소가 어떠한지 점검해야 합니다.

 

여덟 번째 살전 4:3절 말씀을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교회가 커질수록 심각하게 대두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세속성입니다. 건물을 커지고 사람들을 많이 모이지만 동시에 느는 것이 세속성입니다. 세속성은 교회를 흠집나게 합니다. 교회의 크기에 따라 지도자의 권위가 세워집니다. 대형교회 지도자들 앞에서 한 없이 낮아지는 젊은 세대들을 자주 봅니다.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분별력이 사라지고 크기에 압도당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 너도 나도 크고 높아지고자 합니다. 이러한 심리는 교회를 전시장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얼마 전 교회 성장 세미나에 참석하였습니다. 교회 가까운데서 한다고 한번 가보자는 간청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느낀 것은 정말 사람이 많구나 였습니다. 그리고 교회 성장에는 교파의 구별이 의미가 없음을 보았습니다. 모든 교파의 사람들이 다 모인 것은 웅장하였습니다. 교회성장이 주는 위엄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온갖 세속화가 교회 안에 진입하였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를 성장시키고자 합니다. 그리고 성장하면 대박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의 목회자들은 교계의 능력자가 됩니다. 교회는 거룩함이 그 생명이어야 하는데 더 이상 거룩함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거룩함은 정직이 그 기본입니다. 복음에 대하여 정직하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삶에 있어서 정직할 때 거룩함을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세속화의 열매로 다 소실됩니다.

또한 교회의 세속화는 성적인 타락을 부추깁니다. 교회는 인간의 타락함에 대하여 너무나 관대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부패함을 가볍게 대하다가 큰 타락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언제든지 우리를 삼킬 수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너무나 무감각합니다. 교회는 이 사실 앞에 무거워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가볍습니다. 말과 행동 그리고 옷과 놀이에 있어서 우리는 좀 더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룩함이 상실되어 집니다.

하나님의 뜻은 교회의 성장이 아닙니다. 교회의 거룩함입니다. 교회의 거룩함을 위하여 몸부림치고 있는지 잘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거룩함을 지키기 위한 애씀이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아홉 번째 갈6:2 절 말씀을 점검해야 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교회의 아름다움은 참으로 많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입니다. 이 교회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좋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좋고 행복한 교회가 슬픔의 장소가 된다면 그처럼 허무하고 가슴 아픈 것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 교회를 세우는 것은 우리의 일생의 소명입니다. 이 소명은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본질적 소명입니다. 나머지는 이 소명을 위하여 주신 가지적 소명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면 이 소명이 뒤죽박죽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재능이 본질적 소명이고 교회를 세우는 것은 여유가 있을 때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기에 위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습니다. 몸의 지체로서의 우리의 역화를 잘 하는 것은 바로 교회를 온전하게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교회는 세우는 것이 본질적 소명임을 분명해야 합니다. 소명이 분명해지면 우리의 삶은 더욱 정직하고 치열하게 그러면서도 거룩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생명은 공동체성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성이 사라지면 더 이상 교회의 생명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서로 짐을 지는 법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서롷 짐을 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짐을 서로지지 못하고 싸우고, 정치하고, 비인격적인 언사가 나온다면 그리스도의 법을 허무는 교회가 됩니다.

 

서로 짐을 지는 아름다움이 풍성할 때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큰 교회가 아니라 거룩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하여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목회자와 교회 전체의 철학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어느 정도가 공동체성을 이루기 위하여 알 맞느냐는 문제는 복잡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를 제시한다면 설교자인 목사가 성도를 모두 아는 정도입니다. 함께 교회에 있고, 길에서 만나도 알지 못한다면 이미 거룩한 공동체성을 이루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사로 짐을 지는 것은 단지 교회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순위로 본다면 믿음의 가정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지경을 넓혀서 지역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지역에 세워진 것은 지역을 섬기기 위함입니다. 지역을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 교회의 공동체성을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회적 약자들을 섬김으로 교회의 균형을 지키고 있는지 점검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열 번째 갈6:17절 말씀읋 점검해야 합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교회다운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마치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다운 흔적을 가지고 있어야 하듯 교회도 교회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이 흔적이 교회를 드러냅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에 있는 예수의 흔적을 감사하였습니다. 이 흔적이 없다면 바울은 세상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겠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결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세상의 명예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한국 교회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흔적이 분명하게 나타나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크기와 권력을 자랑하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교회가 될 때 세상의 명예와 기준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겸손하고 건강한 교회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가지고 있는 예수의 흔적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흔적을 보고 교회를 신뢰할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교회의 크기를 흔적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큰 교회가 축복의 흔적이라 할 수 있을까요? 지금 큰 교회 가운데 은행에 빛을 지고 있지 않는 곳이 얼마나 될 까요? 빛으로 시작하여 빛갚는데 힘을 쓰고 있는 현실은 축복의 흔적이라 말 할 수 있을까요? 이제 축복의 흔적이 변화되어야 할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교회가 자랑하는 축복의 흔적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정신이 교회를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크고 적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교회를 존경하고 드높이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한 교회를 이끄는 교회의 지도자를 존경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언론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세상은 언제나 큰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교회를 소개하고 이들의 영향력을 알리는 일에 아낌없는 응원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러한 일에 열심을 다하고 있는지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입니다. 불모의 땅에 복음이 들어왔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통하여 복음을 들었고 회심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현실에 만족하면 살았던 사람들에게 미래의 소망을 품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욕심을 버리고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살게 하였고 무엇보다도 자발적 가난의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자랑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장차 올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생각하지 않으면 현실적 이기주의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현실의 축복이 모든 것인 양 착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공의 선물이 없으면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로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샤머니즘 신앙입니다. 성경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하다고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소망이 진정한 믿음이며 행복이 됩니다. 영원에 대한 소망이 사라질 때 교회는 빈약하게 됩니다. 고난도 두려워하고, 낮아짐도 힘들어하고, 섬김도 힘들어 합니다. 교회는 현실적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지만 동시에 종말론적 신앙을 견고하게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균형 잡힌 모습입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복음이외에 모습으로 냉대를 받는다면 우리는 부끄러워하고 다시금 우리의 자리를 살피고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교회가 더욱 영광스러워 질 수 있도록 정직하게 점검해야 합니다. 교회의 모습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