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동식목사

절박감에서 희망으로

새벽지기1 2018. 10. 8. 07:25


기윤실의 정책을 위한 간담회 중 한 이사님의 발언이 가슴 깊이 남았습니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가는 가운데, 목사들이 모르는 평신도들의 절박감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건의였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절박감에 빠져 너무 느슨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집으로 오는 가운데 ‘절박감’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의 절박감, 한국 교회의 절박감 그리고 각자의 삶이 주는 절박감은 무엇일까?

절박감의 사전적 의미는 ‘바라볼 것이 없게 되어 모든 희망을 끊어 버리게 된 느낌’입니다.

바라볼 것이 없게 되어 모든 희망을 끊어 버리게 하는 현상은 무엇일까?

정말 우리에게는 이러한 희망이 없어진 것일까?

넒은 의미에서부터 절박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국 사회의 절박감은 무엇일까?

우선 땀의 대가에 대해 정당한 보수를 누리지 못할 때 오는 상실감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소망이 없을 때 오는 자포자기입니다.

얼마 전 MBC의 ‘W’라는 프로그램에서 인도의 빨래터를 방영했습니다.

4대째 이어오고 있는 빨래터의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고정되어 있어서 빨래를 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을 보면서

삶의 절박감이라는 것이 이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외교부 장관의 딸 특혜와 같은 것을 보면 더욱 화가 치미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부모 잘못 만나면 소망이 없는 것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우리를 절박감의 구덩이로 몰아넣는 일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삶에 대해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 때 절박감에 이르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공정한 사회는 이러한 절박감에서 벗어나게 하는 탈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공정한 사회는 환경에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소망을 가져다줍니다.

공정함은 정직함을 바탕으로 합니다. 정직함이 없이 공정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부패한 나라는 정상적인 삶의 성공을 꿈꾸지 않습니다.

정상적인 길은 바보나 가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모두가 다 빨리 가는 방법을 추구하는데 나 홀로 정직하다고 무엇이 바뀌겠는가?

나만 바보가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절박감입니다.

그러나 절박감을 가져오게 하는 것은 이러한 외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절박감에 이르는 것은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공허함이 찾아올 때 있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경쟁에서 이겨야 사랑을 받습니다.

이기지 못한 자는 사랑이 아니라 버림을 받습니다.

어릴 적부터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배우고 경쟁의 정글에서 싸우게 합니다.

경쟁에서 떨어지면 절박감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이면에는 놀랍게도 가정의 붕괴가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이혼율이 50%에 이르는 우리의 현실에서

달콤한 집, 행복한 가정, 사랑이 넘치는 가족이라는 의미는 매우 불완전하게 되었습니다.

가정에서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가정이 붕괴되고,

가정도 경쟁을 통해 유지되는 기막힌 현실이 우리를 절박감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절망감’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죽음에 이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떠하겠습니까?

교회는 절박감을 치유해 줄 수 있을까요?

건강한 교회를 세우고 정직하고 투명한 교회를 만들자고 하는 모임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10년 만에 100배 성장하는 교회 만들기 같은 세미나에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교회가 어떻게 절박감을 치유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 교회 곳곳에서 피맺힌 소리들이 들리는 것을 봅니다.

정직함은 사라지고 세상과 별다를 것 없는 경쟁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경쟁에서 지면 도태됩니다. 참으로 서글픈 현실입니다.

하지만 더욱 절박감에 이르는 것은, 많은 이들이 이것이 교회를 허무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다해 교회만 성장하면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살 때 세상은 소망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교회는 성장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회복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10년 안에 100배 성장하는 것은 우리의 소망이 아닙니다.

10년 안에 구원 받는 백성이 얼마나 나와야 하느냐가 우리의 비전이 돼야 합니다.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교회가 현실과 싸워야 합니다.

교회는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부자 되고 성공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자발적 가난을 즐길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져야 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간증 소리는 이제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자발적 가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들려져야 합니다.

손봉호 교수는 말하기를, 예전에 기윤실에서 작은 차 타기 운동을 전개했을 때

많은 사람들의 양심을 힘들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 교회가 들어야 할 말은 성경의 소리입니다.

검소한 삶과 절제가 있는 삶, 이웃을 윤택하게 해주는 것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이들의 이야기가 많이 퍼져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이 바로 선포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교회 역시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하지 않은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허무는 교회입니다.

복음이 온전하게 선포됐다면 교회는 정직의 지표가 돼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가난한 사람을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있는 자들의 잔치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잔치가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모르겠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교회는 무엇보다도 낮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껏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사는 길입니다.

교회가 성도와 세상으로부터 소망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곳으로 전락한다면 그것은 단지 교회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세상도 더 이상 소망이 없이 절박감으로 치달을 것입니다.

교회가 죽음에 이르는 곳이 아니라 생명에 이르는 곳이 돼야 합니다.

이를 위해 바른 복음이 선포되고 건강한 교회가 회복돼야 합니다.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선배들이 전해 준 순수한 복음을 교회가 계승하고 전달해야 합니다.

이것이 작지만 소망에 이르는 길이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절박함이 극에 다다르면 절망에 이르고 마침내 죽음에 다다르게 됩니다.

절망이 보여주는 전조는 바로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은 자신에게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인식을 갖게 합니다. 이처럼 슬픈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절망은 자신에 대해 확신하지 못할 때 옵니다.

즉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명확한 정체성이 사라지면 반드시 그 빈자리에 우울증이 찾아들고 절박감에 이르게 됩니다.

가끔씩 연예인들의 자살 소식을 듣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속사정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절망이 그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할 일은 더 이상 없다는 자괴감은 자신의 정체성을 흔들고 급기야 깊은 절망감에 들어갑니다.

이러한 과정은 불행한 결말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을 찾지 않으면 절망의 노예로 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자신의 가치에 대해 바르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임을 항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나는 세상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이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절망에 이를 수 없습니다.

절망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절망을 이기는 자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 절박감과 절망들이 난무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모든 쇠사슬을 끊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대는 바라 볼 것이 없어 모든 희망을 버린 상태에 이르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기도하고 투쟁해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를 꼬집을 수 없는 총체적인 현실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이 난국을 풀어야 할 기도와 헌신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답은 분명합니다. 성경의 정신이 우리를 지배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를 이끌어야 합니다.

말씀이 삶이 될 때 비로소 웃음이 피어날 것입니다.

그날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의 십자가를 즐거워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