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철목사

하나님께서(행2:22-36)

새벽지기1 2018. 3. 30. 07:25


하나님께서(행2:22-36)

지난 1월 1일 0시에 예정되어 있던 신년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12월 31일 밤 11시 20분 경 예배당에 도착했을 때입니다. 마침 마당에서 만난 한 여집사님이 낭패로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신년예배가 끝난 뒤에 친교실에서 함께 떡국을 나누기로 했지만, 오비브(Eaux-vives) 교회측에서 친교실은 물론이고 지하실까지 온통 다른 모임에 빌려주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끔 살다보면 일이 중복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에 단순히 예약상의 실수로만 알고 친교실로 들어가 본 저는, 그만 깜짝 놀라 고 말았습니다. 그곳에서는 민망스럽게도 밴드까지 동원하여 술판과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던지 이미 사람들은 예외 없이 취해 있었습니다. 지하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적어도 그 시간 그 곳은 더 이상 교회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에누리 없는 술집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난장판이었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재정적인 이유로 돈을 받고 장소를 빌려준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특성을 생각할 때 그것은 참으로 지나친 광경이었습니다.

광란의 교육관을 떠나 예배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 눈을 감았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마치 예레미야 1장에서 예레미야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제게 물으셨습니다.-‘재철아,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제가 대답 드렸습니다.-‘형식만 있고 본질이 결여된 교회를 보았습니다. 십자가 종탑만 있고 더 이상 교회가 아닌 예배당 건물을 보았습니다. 행정만 있고 섬김이 없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화석화된 기독교 문화만 남고 복음의 생명이 실종되어버린 사회를 보았습니다. 신학만 있고 신앙이 상실된 시대를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계속 물으셨습니다.-‘또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제가 다시 대답을 드렸습니다.-‘주님께서 부족하고 미약한 우리에게, 술집으로 전락해 가는 이 대륙의 교회를 맡기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드디어 1999년 1월 1일 0시 신년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예배가 제게 얼마나 큰 감격과 감동을 안겨주었는지는 표현하기조차 어렵습니다. 그 날 그 시간 이 오비브 교회 예배당을 머리 속에 그려보시면, 그때 제가 느꼈던 감동과 감격을 능히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별빛만 빛나는 캄캄한 밤입니다. 교회의 한쪽에서는 망년회 술판이 아래위로 요란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새해 첫날 첫 시간을 하나님께 바치는 예배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술판에는 입추의 여지없이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마치 시장바닥처럼 흥청거리고 있습니다. 예배당에는 작은 무리가 모여 고요한 가운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한해의 첫 시간에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예배당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는 자들은 이방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국기에 스스로 십자가를 그려두고 교회의 절기를 자신들의 국경일로 삼고 있는 스위스 국민-장본인들이었습니다. 그 술판의 한쪽 끝에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또 다른 스위스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스위스 사람들이 ‘에뜨랑제(ETRANGERS)', 즉 이방인이라 부르는 한국인들이었습니다. 스위스 사람들이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기를 거부한 시간에, 그 거부당한 교회가 교회일 수 있도록 교회의 정체성을 지킨 자들이 바로 한국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 날 그 시간 우리가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지 아니 하였던들,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이 곳이 하나님의 교회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술꾼들의 굴혈'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역만리 타국에 살고 있는 우리가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므로, 그 날 그 시간 이 교회는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상실 치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상징적인 사건입니까? 스위스 사람들이 교회이기를 포기한 교회의 명맥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어가게 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바로 우리를 믿으시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간 우리를 이곳에 두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대륙의 교회를 새롭게 세우시는데 필요한 도구로 우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2천년 전 당시의 온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복음을 증거 했던 위대한 전도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관점에서 볼 때, 당시 그의 발길이 실제로 닿았던 곳은 자그마한 지중해 연안이 고작이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부터 가장 멀리 진출했던 곳은 자기 인생의 종착역으로 삼았던 로마였습니다. 그 거리란 우리가 한국에서 이곳까지 날아온 거리 와 비교할 경우 지극히 짧은 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가 누비고 다녔던 지중해 연안을 다 합쳐도 지구 전체의 면적을 놓고 본다면, 몇 백 분의 일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그는 결코 세계를 누비고 다닌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때까지 유럽 사람들이 발견 치 못했던 아메리카 대륙은 물론이요, 중국이나 한국 그리고 일본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구의 지극히 작고 제한된 한 지역을 돌아다녔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한 복음은 온 세계를 뒤덮고 있습니다.

이 곳 제네바는 쟝 깔벵이 종교개혁을 실천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지금부터 463년 전인 1536년 가을부터 깔벵은 제네바에서 그의 개혁 의지를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엄격함에 두려움을 느낀 제네바 시민에 의해 깔벵은, 불과 2년 후 인 1538년에 제네바로부터 추방당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541년 제네바 시민의 부름을 받고 다시 제네바로 돌아 온 깔벵은, 1564년 5월 27일에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무려 23년 동안이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세우는 일에 그의 일생을 바쳤습니다.

지금 스위스는 고도 정밀 공업국, 빼어난 관광국,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서 국민 1인당 소득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선진국입니다. 그리고 제네바는 온갖 국제기구들이 자리잡고 있는 명실공히 국제도시입니다. 그러나 깔벵이 종교개혁을 실천하던 때만 해도 스위스는 독립적인 국가형태를 지니기 이전이었습니다.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스위스가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완전 독립 을 법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깔벵 사후 84년이 지나서였습니다. 그리고 깔벵이 이 곳에서 개혁을 단행할 때 제네바의 시민은 어린이를 다 합쳐도 겨우 기천 명에 불과했습니다. 깔벵의 소식을 듣고서 구교로부터 박해를 받던 개신교도들이 제네바에 몰려와 시민 의 수가 급증했을 때에도 그 수는 만여 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의 숫자라면 우리나라에 있는 초대형 교회 중 1개 교회 교인 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깔벵이 이 곳에서 일할 때 스위스는 유럽에 전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소국이었고, 제네바 또한 변변찮은 도시였습니다. 온 세계를 놓고 볼 때 깔벵은 바늘구멍 정도에 불과한 작은 한 점에서 살고 일하다 죽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혁정신은 온 세계로 퍼져나가, 그로부터 비롯된 장로교회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나 깔벵이나 모두, 그들이 살아 있을 당시 그들은 결코 세계적인 인물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온 세계를 그들의 일터로 삼았던 적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생애를 불태웠던 곳이란, 이 세계의 미미한 한 지역 혹은 한 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어찌 그들이 전한 복음과 정신이 온 천지로 퍼져나가 세계의 역사와 교회를 새롭게 할 수 있었습니까? 그 해답은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구 삼아 친히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바울이나 깔벵은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지만, 그들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한 지역 혹은 한 점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일했을 뿐이었지만, 그러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그들은 온 세계를 위해 일한 셈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참으로 귀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예배드리고 있는 이 오비브 교회는 스위스 전체를 놓고 볼 때 정말 한 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함께 예배드리고 있는 100여 명이란 숫자는 참으로 미미한 숫자에 불과합니다. 우리 가운데 이름 석자만 대면 온 스위스 국민들이 다 알아보는 세계적 유명인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자가 이곳에서 바른 교회가 되기만 하면, 하나님의 바른 도구가 되기만 하면, 술집으로 전락하고 있는 스위스의 교회가 바로 세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위스뿐만 아니라 관광지로 전락한 유럽의 교회 전체가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바른 교회가 된다는 것은, 곧 세계의 교회를 바로 세우는 주님의 세계적 도구가 됨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은 보잘 것 없지만,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선택하시사 오비브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게 하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까닭입니다.

한국의 강원도 황지에는, 마치 스위스의 라브리(L'abri)처럼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예수원'이란 공동체 겸 수도원이 있습니 다. 그 공동체의 설립자는 영국 성공회에 소속된 성직자로서 ‘대천덕'이란 한국 이름을 가진 미국인 R. A. Torrey 신부님입니다. 올해로 82세가 된 신부님이 당신의 인생을 정리한 '개척자의 길'이란 제목의 자서전을 최근에 펴냈는데, 신부님은 그 책 속에서 신앙을 모험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중심으로 살아오던 세계를 탈피하여 하나님 중심의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욕망의 노예 된 삶으로부터 진리를 따라 나선다는 의미에서, 확실히 신앙은 모험입니다. 단지 세상의 모험과 차이가 있다면, 세상의 모험은 그 결과가 불확실하기에 흔히 투기와 동일시되어 인생의 탕진을 의미하는 반면에, 하나님을 위하여 행하는 모험은 그 결과를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기에 그보다 더 창조적인 삶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21절에 이어, 오순절날 성령세례를 받은 베드로의 계속되는 설교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본문 22절-24절을 통하여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 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 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또 36절을 통하여서도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지금 베드로는 나사렛의 목수였던 예수님을 들어 쓰셨던 분도 하나님이시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리스도로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거듭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독생자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와 비천한 목수로 생계를 이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큰 모험입니까? 어디 그뿐입니까? 인간이 받아야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기 위하여 십자가 제물로 당신의 생명을 내어놓는다는 것은 또 얼마나 엄청난 모험입니까? 그러나 그 분이 우리 의 주님이 되신 것은 그 엄청난 모험을 주저치 않으셨던 결과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모험을 감행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 죽음의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결과를 책임지시고 만인의 그리스도로 세워주실 것을 확신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결과를 믿지 못하여 십자가의 모험을 감행치 않았더라면, 그분이 아무리 하나님의 독생자라 할지라도 만인을 위한 구원자-그리스도가 되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므로 하나님을 위한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때, 그분은 이스라엘을 너머선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 온 세계를 위한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자신의 설교를 통하여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베드로는 또 시편(16:8-11)에 나타나 있는 다윗의 시를 인용한 후에 본문 29절-32절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교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 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다윗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천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었지만, 이미 그 때 그는 이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하실 것이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을 보고 알고 또 믿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이 아직 성인도 되기 전에 어떻게 혈혈단신 거인 골리앗과 맞서 싸우는 모험을 감행할 수 있었는지 그 연유를 알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삶을 던질 때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 결과를 책임져 주심을 분명히 알고 믿었던 까닭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위한 모험을 주저하지 않을 때, 다윗 역시 3천년 전 조그마한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었을 뿐이지만 그러나 세계의 다윗이 되었습니다. 오늘 날 전 세계적으로 다윗, 즉 David란 이름을 가진 자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는 오래 전 이스라엘에 살았을 따름이지만, 그러나 아직까지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본문 속에서 설교를 행하고 있는 베드로 역시 모험의 사람이었습니다. 갈릴리의 어부가 배와 그물을 버리고 목수를 따라나선다는 것은 모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셨다고 외치는 것은 모험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바로 못 박히셨으매, 나는 거꾸로 못 박혀야겠다며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는 것은 모험이었습니다. 그 역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한 모든 모험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베드로 역시 세계의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베드로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드물 정도입니다.

가문, 학력, 경력 등 모든 면을 감안할 때 유대교 내에서 출세가 보장되어 있던 바울이, 그 유대교를 버리고 주님을 위하여 사도의 길을 나선 것은 모험이었습니다. 브르조아인 동시에 로마 캐톨릭 교회에서 중책을 맡고 있던 제라르 꼬벵의 아들로 태어난 쟝 깔벵이, 조국인 프랑스에서의 안락한 삶을 등지고 객지인 제네바에서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기수가 된다는 것은 모험이었습니다. 미국 국적을 지닌 토레이 신부가 한국으로 건너와, 지금으로부터 35년 전 오지 중의 오지인 태백산 황지를 선교지로 삼고 예수원을 설립한다는 것은 모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자진하여 그 모험의 대열에 나섰고, 그들은 모두 세계의 바울, 세계의 깔벵, 세계의 토레이가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참으로 중요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신앙은 토레이 신부님의 지적처럼 모험이요, 하나님을 믿으므로 하나님을 위하여 모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세계를 변화시켜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상에 열거한 자들은 모두 그들의 시대에 지극히 작은 한 지점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모험을 감행했을 뿐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들을 도구 삼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지금도 역사와 교회를 새롭게 정화시켜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감히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곳에서 하나님을 믿으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모험을 두려워하지 아니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스위스의 교회를, 온 유럽의 교회를 새롭게 세우실 것임이 분명하다고 말입니다. 술집으로 전락해 가는 스위스 교회의 한 모퉁이에 우리를 두시고, 우리로 하여금 스위스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게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입니다.

제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드리는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작년 6월 서울 주님의교회에서 10년 목회를 마친 뒤 이곳 스위스로 오기 전에 출간한 '회복의 목회'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만, 저는 10년 동안 우직하게 주님의교회를 지켰습니다. 10년 동안 주님의교회보다 더 중요한 일이란 제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적어도 그 기간 동안 제 삶은 오직 주님의교회를 위해 존재했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주님의교회가 제 뇌리에서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저의 일거수 일투족은 모두 주님의교회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해외 형제교회를 위해 출국하거나 피정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님의교회 강단을 비워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저는, 저의 목회지가 주님의교회에 국한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비록 제가 주님의교회라는 제한된 공간 속에서 목회 한다고 할지라도 제 자신이 주님의 바른 도구가 되기만 하면, 그 영향은 한국교회 전체에 미치게 될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저는 미약하고 유한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까닭이었습니다.

2천년에 걸친 교회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110여 년이란 일천한 역사밖에 갖지 못한 한국교회는 아직 유아기 단계입니다. 그래서 역사 깊은 다른 나라의 교회와는 달리,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교회의 사유화'입니다. 교회가 목회자 혹은 특정인의 전유물로 사유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한 교회에서 만 70세가 되기까지 담임목사의 자리를 지키다가, 그 이후에는 원로목사로서 죽을 때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현 한국교회 제도 하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로서 정체성을 지키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하나님보다는 인간이 교회의 주인 되기가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분란의 대부분이 실 은 여기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더 오랜 개신교회 역사를 지니고 있는 나라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목사와 장로의 임기를 제정해 두고 있습니다. 장로의 경우 임기가 끝나면 다시 교인들의 신임투표를 거쳐야 하고, 그것도 몇 번 이상 연임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백의종군하게 하는 것입니다. 목사의 경우는, 임기가 만료됨과 동시에 그 교회를 떠나게 합니다. 미국에서는 교단에 따라 퇴임한 목사는 자신이 시무하던 교회로부터 150마일에서 250마일 이내에서는 살 수 없다는 규정을 제정해두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교회가 사유화될 수밖에 없음을 그들은 이미 경험했던 것입니다.

저는 선교 2세기에 접어든 한국교회 역시, 분란과 분열을 종식하고 교회의 정체성을 바르게 지키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제도 적인 장치를 서두를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교회에서 목사와 장로의 임기를 각각 10년과 13년으로 제정하고, 만 10년이 되던 주일 제가 먼저 자진하여 사임하였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원로목사 원로장로로 군림할 수 있는 한국교회의 풍토 속에서 목사와 장로의 임기를 앞장서 제정한다는 것, 10년 동안 혼신의 힘과 정열을 쏟아 부은 임지를 아무 조건 없이 스스로 물러난다는 것은 큰 모험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본래 5녀 2남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제 위로 다섯 분의 누님과 한 분의 형님 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릴 때 형님이 먼저 세상을 떠남으로, 저는 다섯 분의 누님을 둔 막내이자 외아들이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체질적으로 모험과는 먼 환경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모험을 주저치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이란 모험이고, 하나님을 위하여 행하는 인간의 모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역사를 이루시며, 또 그 결과를 반드시 선하게 책임져주심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작년 6월 21일 주님의교회를 사임한 이후, 지난 6개월 동안 한국교계에 가장 크게 대두되었던 이슈가 '목회자와 임직자 임기제정'이었고, 그 이슈 의 한 가운데에는 주님의교회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저는 10년 동안 주님의교회를 목회하고 스스로 사임하는 모험을 단행했을 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저의 모험을 도구 삼아 사유화되어 가는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공간적으로 저의 목회지는 주님의교회로 국한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 한국교회 전체가 저의 목회지였던 셈입니다. 저는 감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10-20년 이내에 목사와 임직자의 임기제 실시는 한국교회에서 일반화 될 것이고, 이를 거부하는 교회는 21세기에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지금과 같은 한국교회의 체제는, 교황이 종신 집권하는 구교와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한국교인들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교와 차별화 되지 않는 개신교회란 더 이상 존립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제는 올해로 만 50세가 되었습니다. 제가 이 나이에 가족들과 떨어져 이곳에서 홀로 3년을 살아야 하는 삶을 선택한 것 또한 모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또 다시 즐거이 이 모험의 여정에 나선 것 역시 똑같은 믿음으로 인함이었습니다. 앞으로 3년 동안 제 목회지가 비록 제네바 한인교회에 국한되어 있을지라도 이곳에서 하나님의 바른 도구가 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공동체를 통하여 스위스의 교회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이 유럽대륙 위에, 인류의 삶 속에 당신의 역사를 반드시 펼치실 것이란 믿음 말입니다.

단 한 사람에 의하여도 세계의 역사는 언제든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약속이요, 역사의 교훈입니다. 한 인간은 미약하기 짝이 없지만, 그 인간을 통해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모험을 나서는 인간을 통해서만 세상을 새롭게 하십니다. 본문 33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너희보고 듣는 이것'이란 성령님을 일컫고 있습니다. 왜 성령님께서 강림하셨습니까? 왜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부어 주셨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진리의 길을 따라나서는 모험을 주저치 않게 하게 하심입니다. 우리의 모험을 통하여 세상을 새롭게 하시기 위합니다. 2천년 전 오순절날 성령의 새 술에 사로잡혀 진리의 모험을 감행했던 제자들에 의해 인류의 역사가 새로워졌음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닙니다. 신앙은 모험입니다. 성령충만도 모험입니다. 모험 없는 신앙이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둠의 세상에서 빛이 되는 모험을 주저치 마십시오. 거짓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직을 선택하는 모험을 두려워 마십시오. 죽 음의 질곡에서 생명을 좇아가는 모험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욕망의 노예된 자기를 부인하며 진리를 따라나서는 모험을 시작하십시오. 한결같이 높임과 섬김을 열망하는 사람가운데서 낮아짐과 섬김의 모험을 결행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분별해 가는 모험을 감행하십시오. 우리가 비록 이 오비브 교회의 한 모퉁이를 빌어 예배드린다 할지라도, 우리를 통하여 이 오비브 교회는 영원 속에서 반드시 새로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지극히 미약할지언정 우리로 인해 스위스의 교회는 반드시 갱신될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무명의 존재라 할지라도 우리를 도구 삼아 하나님께서는 유럽의 역사를,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혹 이 사실을 믿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제네바 대학 공원인 '바스띠옹'(Bastion)으로 가 보십시오. 그 공원 한 쪽 벽에 조각되어 있는 깔벵의 석상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그 석상 건너편 벤취에 앉아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이렇게 말하는 베드로의 음성을, 아니 깔벵의 목소리를 듣게될 것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참고)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진리를 따라 나서는 모험을 두려워하지 말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모험을 생활화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나 자신을 교회로 바로 세워 가는 모험을 날마다 즐거이 감행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위하여 행하는 모험의 삶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나는 인간일 따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되심을 확실히 믿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고향을 등지는 모험을 감행한 아브라함에 의해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미디안 광야를 떠나 는 모험을 두려워하지 아니 한 모세에 의해 출애굽의 역사는 시작되었으며, 사도 바울의 모험에 의해 유럽의 역사가 새로워졌으며, 깔벵의 모험에 의해 세계의 교회가 갱신되었음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오늘 내가 이곳에 있으므로 인하여, 내일 이 대륙의 역사가 새로워질 수 있음을 확신케 하옵소서. 이 넓은 천지에 서 오늘 나를 이곳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바로 거기에 있음을 알게 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