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술에 취하였다(행2:1-21)
오래 전 선배 한 분이 처음으로 교회에 나오던 날이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중년에 이르기까지, 그 이전엔 단 한번도 교회 안으로 발을 내밀어 본 적이 없던 선배였습니다. 이를테면 어릴 적, 성탄절에 사탕 얻어먹기 위해 교회에 가본 일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려와는 달리 예배가 끝났을 때의 그는, 지루해 하거나 괜히 시간만 낭비했었다고 후회하는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난 평소에 찬송가라면 딱딱하고 고리타분하기만 한 줄 알았어. 그런데 오늘 보니까 찬송가 역시 대단히 친밀감이 가더라구.' 아, 오늘 이 선배가 은혜를 받았구나! 생각하며 감동을 받으려는 제게 선배가 다시 말했습니다.-'알고 보니 찬송가도 모두 블루스 아니면 지그버그(지루박-옮긴이 주) 곡들이더라구. 아주 좋았어!' 그렇게 말한 그 선배는 당시 서울 장안에서 소문난 춤꾼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번의 교정을 보아야 합니다. 한 글자라도 오자가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초교, 재교, 삼교를 거쳐 이제 더 이상 오자가 없음으로 인쇄를 해도 좋다고 최종판결을 내리는 단계를 'OK'라 부르고, 그 행위자체를 'OK를 놓는다'라고 표현합니다. 출판사의 편집실이란 이처럼 'OK'를 놓기 위하여 존재하는 곳입니다. 유능한 편집부원일수록 'OK'를 잘 놓는 사람입니다. 'OK'를 놓은 원고에는 정말 실수가 없어야 하는 까닭입니다. 예전에 제가 사업을 할 때, 출판부 편집실에 노총각이 있었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선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도통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지를 못했습니다. 그 날도 점심 시간을 이용하여 선을 보고 오던 날이었습니다. 사무실을 들어오는 그의 표정이 더 없이 밝아 보였습니다. 다른 직원이 궁금한 듯 물었습니다.-'오늘은 어떻게 됐어?' 이 물음에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나 오늘 OK 놨어!'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관심사에 비추어 세상을 바라보고 평가하고 또 표현합니다. 춤꾼은 춤의 관점에서 찬송가를 평가합니다. 전문 편집인은 여자와 선보는 것을 마치 원고 교정보듯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이 무엇을 평가하고 표현하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됩니다.
오순절날 제자들에게 성령님께서 임하셨을 때에, 제자들은 성령님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각 다른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천사의 말 같은 것이 아니라, 외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모국어로 알아들을 수 있는 분명한 사람의 언어였음은 이미 지난 2주 동안 상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그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무식한 갈릴리 어부들이 외국에 살고 있는 자신들의 모국어인 외국어로 말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제자들을 조롱하며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제자들을 가리켜 술 취했다고 비웃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대단히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이 제자들을 술 취했다고 비웃었다는 것은, 그들 자신이 바로 술꾼이었음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술꾼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세상만사를 모두 술꾼의 관점에서 이해하며 평가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술과 무관한 사람들이었다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하고 있는 제자들을 가리켜 술 취했다는 식의 표현일랑 아예 생각조차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이후의 일에 대하여 본문 14절-16절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3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그때의 시각이 제 3시, 즉 지금의 시간으로 아침 9시였습니다. 베드로는 그 이른 시각에 제자들이 결코 술 취한 것이 아님을 변론하기 위하여,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구약성경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했습니다. 만약 베드로의 주된 관심이 의학적인 지식이었다면, 그는 제자들이 술 취하지 아니하였음을 의학적으로 증명하려 했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문학에 몰입한 사람이었다면, 그 이른 시각 제자들의 멀쩡함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려 애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비웃음에 지체없이 즉 각 하나님의 말씀으로 응답했습니다. 그의 모든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간, 우리 자신은 과연 어떤 사람인지 한번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대체 무엇입니까? 우리의 심령은 무엇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만사를 평가하고 표현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세상의 관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재단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분별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말씀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말씀일 때에만, 우리가 말씀의 사람이 될 때에만 , 우리의 심령이 말씀으로 가득 찰 때에만, 우리는 허상과 실상을, 빛과 어둠을, 옳고 그름을, 행할 것과 금할 것을, 천한 것과 귀한 것을, 길고 짧음을, 영원과 유한함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본문 13절을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일단의 사람들이 제자들을 조롱하되, 단순히 '술이 취하였다'고 비웃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가리켜 '새 술이 취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제자들을 조롱하기 위해 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제자들더러 그저 술 취했다고 말하지 않고, 수식어를 붙여 새 술에 취했다고 말했을까요? 평상적으로 술 취했다는 표현이 훨씬 더 비웃는 말일텐데 말입니다.
이것은, 보통 술에 취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을 생각해보면 그 이유를 곧 알 수 있습니다. 술의 도가 지나쳐 사람이 술에 취하게 되면 첫째, 의식이 흐려집니다. 정상적인 사고와 판단이 불가능해진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둘째, 말에 조리가 없어져 버립니다. 평소에 비해 훨씬 많은 말을 하는데, 앞말과 뒷말이 엇갈리면서 횡설수설하게 됩니다. 술 취한 사람의 말을 들을 수도, 믿을 수도 없는 까닭이 이것입니다. 셋째, 자세가 흐트러져 버립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걸음걸이가 비틀거리게 됩니다. 넷째, 허세와 만용을 부립니다. 온 천하가 자기 것이요, 자신이 천하 제일인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져버립니다. 다섯 째, 예의를 상실해 버립니다. 술 취했다는 말은 무례하다는 말과 동의어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전무해 집니다. 다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으로만 행동하게 됩니다.
이상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술 취한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공통 현상입니다. 아무리 술을 많이 마신 사람이라 할지 라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술고래라 부를지언정 술 취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술 취했다는 표현은 동서고금을 무론하고, 위에서 열거한 것과 같은 현상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제자들을 조롱하는 자들이 감히 제자들을 가리켜 술 취했다고 말하지는 못하고, 새 술에 취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제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변방, 그것도 빈민촌인 갈릴리 출신들이기에 대도시 예루살렘에서 늘 주눅들고 어눌해 보이던 제자들이, 평소와는 달리 쉬지 않고 말을 자신 있게 하는 것을 보아서는 꼭 술 취한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제자들의 모습이 그처럼 갑자기 달라질 수는 없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 술 취한 자들과는 분명히 다른 차이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많은 말을 하였으나 단 한번도 횡설수설한 적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말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리와 감동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제자들의 자세에는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의식은 다 타버린 촛불처럼 꺼져 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더욱 보석처럼 빛나기만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끝까지 사람에 대한 예의를 잊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들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더욱 생각하고 배려하려는 마음이 역력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새 술에 취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술 취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러나 보통 술에 취해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새 술'이란 그리스어 원문에 glukos라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달콤하다는 뜻을 지닌 형용사 glukus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포도수확이 끝남과 동시에 포도즙 틀에서 짠 새 포도즙을 담궈 둡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다음 해에 개봉하면 그것은 향기로운 포도주로 변해 있습니다. 그 새 술의 향기로움과 달콤함은 묵은 술과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새 술을, 달콤하다는 의미를 지닌 glukos라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단어는 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히브리어 tirosh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었습니다. 갓 퍼낸 새 술을 히브리어로 tirosh라 불렀는데, 그것은 '마음을 사로잡는다' 혹은 '마음을 빼앗는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만큼 달콤하고 향기롭다는 의미였습니다. 본문 속의 사람들은 바로 이 단어를 사용하여 제자들을 조롱했던 것입니다. 평소와는 다른 제자들의 행동을 볼 때, 뭔가 제자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 제자들이 사로잡혀 있는 것이 있긴 있는데, 그 실체를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술꾼들인 그들은 그들이 잘 아는 용어인 '새 술'이란 말로 제자들을 비웃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조롱이거나 비난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성령이란, 전혀 새로운 술에 사로잡히고 또 취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새 술'에 사로잡힘으로 인해, 그들은 말이 통하지 않던 자들에게 각기 '다른 방언'을 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새 술에 취하므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비로소 대화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천하만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에게 취하지 아니하고서는,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도, 사람들에 대한 지경을 넓혀 갈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스위스 제네바-이 먼 곳까지 상담을 하러 온 분이 있었습니다. 10년 넘게 금실 좋던 아내와 헤어지기로 결심하고선, 이혼을 결행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저를 찾아 온 것이었습니다. 두 명의 자녀와 더불어 단란한 가정을 꾸려왔던 그분이 14년 동안이나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던 아내와 결별키로 한 이유는, 다름 아닌 고부간의 갈등 때문이었습니다. 시어머니와 딴 살림을 하는 동안에는 행복하기만 했습니다. 결혼한 지 10년이 지나서 이제는 어머니를 모셔야겠다고 말했을 때, 아내는 아무 이의 없이 남편의 제의를 수용했습니다. 그러나 고부가 한 집안에 살기 시작하면서 예상치 아니했던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 으려니 생각했으나 실은 그 반대였습니다. 마침내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며느리를 보지 않겠다 선언하고,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시어머니를 더 이상 모시지 못하겠노라 주저앉기에 이르렀습니다. 남편은 그와 같은 아내의 태도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평소에, 무릇 며느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시부모를 모시고 살아야할 의무가 있다고 여겨왔던 까닭이었습니다. 남편은 수 차례에 걸쳐 무조건 시어머니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했지만, 그때마다 아내는 시어머니와 따로 살 것을 남편에게 눈물로 간청했습니다. 급기야는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했지만, 아내는 시어머니에 대해서만은 도대체 양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먼저 이혼을 통보한 쪽은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의 확고한 이혼 의사를 확인한 아내는 세 달 동안의 별거를 하소연했습니다. 일단 자신이 나가서 살 것인즉, 세 달 후에도 남편의 이혼의사가 변함이 없다면 그때 헤어지자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그 동안 살던 정분을 생각해서 아내의 마지막 하소연을 받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찾아 온 것은, 그 최후의 세 달 기한이 끝나기 불과 일주일 전이었습니다. 아내의 의무를 다하려 하지 않는 아내와 이혼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정당성을 스스로 인정받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으로부터 장시간에 걸쳐 이혼의 변을 다 들은 후에, 저는 그분에게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를 물었습니다.
첫째, 아내를 과연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본래 남편과 아내는 남남이었던 사람들이 사랑의 토대 위에서 부부로 더불어 살아가는 사이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결여될 경우 바른 부부관계는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아내 된 자가 아무런 상관도 없던 남편의 부모를 친부모처럼 모셔야할 이유가 있다면, 오직 남편의 사랑 때문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대양보다 더 넓은 남편의 사랑으로 인해 남편의 부모를 자기부모처럼 사랑치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에게 시부모 공경을 요구하기 전에, 아내가 자발적으로 시부모를 공경할 수밖에 없도록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지를 먼저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아내를 위하여 얼마나 울이 되어주고 있는 지를 물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모든 명령은 언제나 상호적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누구 한 사람에게만 일방적인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을 명령하시는 만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하나님으로서의 책임을 다 하실 것을 누누이 밝히고 계십니다. 여자에게는 남편을 머리처럼 받들고 복종할 것을 요구하시지만,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남자들에게는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할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식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라 명령하실 때, 자식으로부터 공경을 받을 부모란 자식을 바르게 사랑하는 바른 부모를 의미한다는 대전제가 이미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식 이전에 부모를 먼저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좋은 부모 슬하에서 좋은 자식이 양육됨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부모공경을 요구하신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모든 부모들에게,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엡6:4). 좋은 부모가 먼저 되라는 말입니다. 저는 이제껏 정말 좋은 시어머니 밑에서 불효하는 며느리가 나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며느리를 친딸처럼 사랑하는 어머니가 되기보다는, 며느리를 자신의 부속물 정도로 여기는 상전으로서의 시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더 자주 들었습니다. 이때 아내의 울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은 남편 밖에 없습니다. 남편이 울이 되어주지 않을 때, 모두가 타인인 시댁에서 며느리는 몇 해를 버티지 못한 채 무너져 내리고 마는 것입니다.
셋째, 아내가 시부모에 대한 의무가 있다고 믿는 만큼 남편인 자신은 처가댁 부모에게 얼마나 잘 하고 있는 지를 물었습니다 .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은 며느리나 아들에게만 해당되는 하나님의 계율이 아닙니다. 딸과 사위에게도 똑 같이 적용됩니다. 며느리가 시부모에 대한 의무를 지니고 있다면, 사위 역시 처가댁 부모에 대해 똑 같은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만약 자신은 처가댁 부모에 대한 의무를 무시하면서 아내에게만 일방적으로 시부모 공경을 강요하는 남편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전형적인 한국인일 수는 있겠으나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일 수는 없습니다.
넷째, 그리스도인으로서 얼마나 주님의 법칙을 존중하며 살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머리로 삼고 그분의 말씀-그분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생활 속에서는 주님의 말씀보다 공자의 교훈을 더 중시하고 있습니다. 한국적 상황에서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자신의 부속물로 여기는 것이라든지, 혹은 남편이 아내에게 무조건적인 '여필종부'만을 요구하는 것은 모두 공자에서 비롯된 유교적 사고 방식입니다. 그것은 높고 힘있는 자를 낮고 힘없는 자가 섬기는 도리입니다. 동시에 이미 기득권을 획득한 자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체제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법칙은 정반대입니다. 높고 힘있는 자가 낮고 힘없는 자를 섬기는 도리요, 타인을 위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해 가는 참 삶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13절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만약 공자를 머리로 모신 사람이라면 시어머니로서 며느리의 상전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머리로 모신 시어머니라면, 며느리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인자한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공자를 주님보다 더 신뢰하는 자라면 여필종부에 역행하는 아내를 포기해야겠지만, 주님을 믿는 자라면 그런 아내를 더욱 측은히 여기며 바른 아내가 될 수 있도록 사랑으로 섬겨야만 합니다. 공자의 제자라면 아내에게 시부모에 대한 의무만 요구하겠지만, 주님의 제자라면 처가 댁 부모에 대해서도 자식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얼마나 성령님의 조명 아래서 기도하는지를 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과의 관계를 위하여 기도하되, 자신 이 원하는 대로 상대방이 변화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조명 속에서 기도하는 자는 상대에 맞추어 자신이 변화될 수 있기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와 같은 사람만 상대를 이해하며 사랑할 수 있고,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지경을 계속 넓혀 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단 한 사람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혼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정당성을 스스로 입증 받기 위하여 이 먼 곳까지 찾아 왔다가 오히려 저에게서 이상과 같은 예기 치 아니한 질문을 받았던 그분은, 그러나 귀국 후에 제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어 왔습니다. 감사의 편지였습니다. 저는 그 감사의 편지야말로, 그분이 사랑으로 아내에게 종노릇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바로 선 증거라 믿고 있습니다. 만약 제게 찾아 온 분이 남편이 아니라 그분의 아내나 어머니였다 할지라도,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혹은 아들과 며느리에 게, 과연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를 물었을 것입니다.
성령님의 새 술에 취하지 않고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서는,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도, 부모 자식간이어야 할 시어머니와 며느리도 실은 남남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령님의 권능을 힘입지 않고서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 도, 서로 상대를 향한 진정한 지경의 확장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습니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18-19)
오순절날 성령강림 이후 시간이 지나자, 성도들 사이에는 오순절과는 다른 방언이 행하여지게 되었습니다. 오순절의 방언이 분명히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의 언어였던데 반해, 그 이후의 방언은 사람이 그 의미를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가리켜 천사의 말이라면서 성령의 은사라 불렀습니다. 그 같은 방언은 성령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세월이 경과하면서 교인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방언을 뽐내고 과시하는 기현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방언을 성령의 은사 즉 성령님의 선물이 아닌, 오직 소유의 대상으로 우상화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방언을 잘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알아들을 수도 없는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는, 사람을 이해하고 깨닫는 마음으로 단 다섯 마디일지언정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권면하였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충만의 참된 증거는 방언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 사람에 대한 지경의 확장에 있음을 분명하게 일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 1절을 통하여, 비록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꽈리에 불과할 뿐이라고 단언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저 역시 누구보다도 방언을 더 잘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밤이 새도록 방언으로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여러분들께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의 참된 증거는 이해할 수 없는 방언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지경의 확장에 있습니다.
정든 친정을 등뒤로 한 채 오직 나 한 사람을 믿고 인생 길을 따라 나선 아내를 진정으로 이해하면서 어떤 경우에든 그리스도 안에서 아내의 울이 되어 주는 남편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수고하고 애쓰는 남편의 어려움을 헤아리며 믿음 안에서 날로 남편을 위한 더 큰 내조자가 되어 가는 성숙한 아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며느리에게 어머니가 되어 친딸처럼 사랑하는 시어머니가 있다면, 시어머니에게 친딸이 되어 친정 어머니처럼 공경하는 며느리가 있다면, 그들은 진정으로 성령충만한 사람들입니다.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여 주기 위 하여 수화를 배우고 그들과 수화로 대화의 장을 넓혀 가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아름다운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면서 그 사람과 더불어 주님의 심정으로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성령님의 사람입니다. 잘 된 자들을 시기하거나 배아파함이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즐거움에 진정으로 동참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누구를 만나든 그리스도 안에서 그 사람의 수준에 맞추어 그 사람과 격의 없는 대화와 속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누구보다도 성령의 새 술에 취해 사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땅 끝에 이르기까지 사람에 대한 우리의 지경을 넓혀주시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사람이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 아니면 지옥에서 살기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천국과 지옥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수도 없이 경험하여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제 아무리 아방궁 속에서 산다할지라도 더불어 사는 사람과의 관계가 뒤틀려 있다면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바로 그 아방궁이 지옥입니다. 비록 초가삼간에 살지언정 사람 사이에 참된 사랑이 있다면 바로 그곳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잠언서 17장 1절은,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진수성찬이 가득한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 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땅에서부터, 아니 오늘부터 진정 천국 속에서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 성령의 새 술에 취하는 자들이 됩시다. 한 순간이 아니라 날마다 취하는 자들이 되십니다. 세상의 술은 마시는 만큼 실은 인생을 방기(放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술을 마시면서 바르거나 참된 것을 생각하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술을 마신다는 것은 의미 없이 인생을 그 만큼 버려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새 술은 마시면 마실수록 인생은 윤택해지고 그 의미를 더해가게 됩니다. 성령의 새 술만이 이 땅에서 우리의 천국의 지경을 넓혀주는 힘이요 능력인 까닭입니다.
이 땅에서의 천국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지상에서의 천국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땅 끝을 향한 고속도로는 거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다같이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더 이상 세상의 술에 취해 귀한 인생을 방기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것을 한없이 소유하면서도, 사람과의 관계가 뒤틀려
지옥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미련한 자가 되기를 원치도 않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성령의 새 술에 취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성령님께 취하며, 사로잡힌 자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사 날로 성령충만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 속에
천국을 일구어 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천국은 땅 끝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시작된 천국이,
성령충만한 나의 삶을 통하여 땅 끝을 향해 날로 확장되어 가는 것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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