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철목사

성령 충만함을...(행2:1-21)

새벽지기1 2018. 3. 7. 07:10


2. 성령 충만함을(행2:1-2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의 노예 살이에서 해방시키시기 전날 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풀어주지 않으려는 이집트를 징벌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집트 전역에서 사람의 장자와 짐승의 첫 새끼의 생명을 앗아가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에 거주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만은 그 징벌로부터 무사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양을 잡아 양의 피를 문 좌우 설주와 인방, 즉 문틀에 발라두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이유를 친히 다음과 같이 밝혀 주셨습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13)

하나님께서 온 이집트 전역에 죽음의 징벌을 내리실 때에, 양의 피가 문틀에 발라진 집은 ‘뛰어넘으시므로', 그 집안에 있는 모든 생명들은 온전히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말씀은 말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집트의 모든 장자와 짐승의 첫 새끼들이 삽시간에 목숨을 잃을 때, 양의 피를 문틀에 발라두었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다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의 노예살이로부터 해방을 얻었습니다. 그 무서운 재앙을 본 이집트의 파라오에게는 이스라엘 노예들을 붙잡고 있을 용기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 이스라 엘 백성들은 그 날을 최대의 명절로 삼고, 그 날의 이름을 '페사흐(pesach)'라 불렀습니다. '페사흐'란 ‘넘어갔다’는 의미입니다 . 즉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징벌이 넘어갔다는 뜻이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를 '유월절(逾越節)'이라 번역했습니다. '넘을 유(逾)'에 '넘을 월(越)'-역시 '넘어갔다'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 단어를 'passover'라 번역했습니다. 이 역시 '넘어갔다' 는 의미입니다.

챨튼 헤스튼 주연의 영화 '십계'가 이 장면을 아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벌이 안개 혹은 연기와 같은 모양으로 이집트에 임합니다. 그 죽음의 연기가 땅바닥에 깔려 온 이집트의 길을 따라 퍼져가면서 집집마다 문틈으로 스며듭니다. 그와 동시에 그 집안에서는 이내 곡성이 울려 퍼집니다. 그 집의 장자와 가축의 첫 새끼가 갑자기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연기가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 이르면, 연기는 집 문의 틀을 따라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면서 그 집을 뛰어넘어 갑니다. 하나님께서 그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발라진 양의 피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양이 사람을 대신하여 피를 뿌리고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passover 되었고, 그 결과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 이 최대의 명절로 삼는 유월절은 곧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고 찬양하는 절기였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 7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유월절의 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키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날이 바로 유월절 절기가 시작되는 날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유월절의 의미를 고스란히 함축하고 있었던 까닭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를 보시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패스오버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처럼 피를 흘리면서 처참하게 돌아가셔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왜 주님께서 못보다도 더 예리한 가시관을 쓰시고 온 머리가 피투성이가 되어야만 하셨습니까? 우리가 머리로 지었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를 '페사흐' 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왜 주님의 양손에 못이 박히어 붉은 선혈을 흘려야만 하셨습니까? 우리가 이 양 손으로 지었던 온갖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를 '유월'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왜 주님의 두 발이 못 박혀 피 흘리지 않으면 안되었습니까? 우리의 두발이 지었던 그 숱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재앙이 우리를 '패스오버' 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왜 주님의 옆구리가 창에 찔려 마지막 남은 피와 물방울을 모두 쏟아야만 하셨습니까? 우리가 우리 의 육체로 지었던 그 더러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를 뛰어 넘어가게 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위한 유월절의 어린양이었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다른 성현들처럼 고상하고 품위 있게 돌아가실 수는 없었습니까? 왜 그토록 사지가 찢어져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가셔야만 했습니까? 이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분명하게 답할 수 있습니다.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사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나를 철저하게, 완전하게, 본질적으로 그리고 영원토록 패스오버 시켜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요한 복음 3장 16절-18절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주님을 믿지 않는 자와는 달리 주님을 믿는 자에게 심판이 없음은, 하나님의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패스오버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 남은 것은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셈, 즉 하나님으로부터 패스오버의 은혜를 그저 받은 자로서의 바른 삶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곧 상급인 것입니다.

유월절에 십자가의 제물이 되어 돌아가신 주님께서는, 사흘째 되는 날 새벽 녘 죽음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40일 동안 함께 거하신 뒤 이 땅을 떠나 승천하셨습니다. 그로부터 일 주일 후에 주님께서 약속하셨던, 주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강림하셨습니다. 그 역사적인 날은 바로 오순절이었습니다.

오순절 역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절기였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날을 맥추절(麥秋節)이라 불렀습니다. 그 해에 처음 수확한 밀과 보리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즐겨 사용하던 이름은 '칠칠절(七七節)'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유월절로부터 7주간이 지난 다음날, 즉 50일째 되는 날이란 의미에서였습니다. 이것이 신약시대에 와서 그리스어로 penteekostee, 즉 오순절이 되었습니다. 그 뜻 역시 50번째 날이란 의미입니다. 오늘날 성령운동을 가리켜 영어로 pentecostal movement라 부르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날의 명칭이 어떻게 불리던지 상관없이 이 날은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날이었다는 것입니다. 오순절이란 바로 열매의 날인 것입니다. 바로 그 열매의 날에 주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강림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이후 성령 충만한 삶을 하나님께 열매로 드렸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유월절 어린 양이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이 패스오버 되었음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일방적인 구원의 은총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패스오버의 은혜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구원받은 자답게 살아가는 것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성령 충만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열매로 드림으로 하나 님의 은총에 보답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마땅히 열매로 드려야할 성령 충만한 삶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 본문 1절-4절이 이에 대하여 명쾌하게 정의해 주고 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강림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나타난 첫 번째 성령 충만함의 열매는 성령님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다른 방언'이란 사람들이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조차 없는 소위 천사의 말 같은 것이 아니라, 외국인이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의 언어였음은 이미 지난주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 성령 충만함의 첫 열매는 평소에 대화가 통하지 않던 자와의 대화의 소통, 다시 말해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지경의 확장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열매였던지, 성령 충만함을 알지 못해 제자들을 향해 술 취한 자라 조롱하는 무리들을 향해 베드로는 본문 17절-21절을 통해 다음과 같이 변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 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이상은 성령강림을 약속하신 구약성경 요엘서의 말씀을 베드로가 인용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인용하므로, 제자들은 지금 술 취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예언한 바 성령 충만한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제자들의 성령 충만함을 변증하기 위해 인용한 요엘서의 말씀 중 그 어느 구절도 아직까지는 제자들의 삶 속에서 나타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자녀들 가운데 아직 예언을 하는 자는 없었습니다. 아직까지 환상을 본 젊은이도 혹은 늙은이도 없었습니다. 아직까지 예언을 행하는 노예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된 적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은 제자들의 성령 충만함을 변호하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구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굳이 이 말씀을 인용했던 것은, 본문이 말하는 바와 같은 현상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령님의 임재를 확실하게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다른 방언을 말하게 된 것, 즉 알지 못하던 사람에 대한 지경이 넓어진 것보다 더 확실하고 더 큰 성령 충만의 증거와 열매가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절-3절은 성령님께서 임하실 때에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고, 또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 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와 불의 혀였다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람 같은 소리, 그리고 불의 혀 같은 것이 들리고 보였다고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임하실 때, 그 때 그곳에 있던 제자들의 주관적인 체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4절은,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 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였다'고 단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을 말하기 시작한 것, 다시 말해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해 지경이 넓어지게 된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도 객관적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각자에게 성령님이 임하실 때에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느냐, 불의 혀 같은 것이 보였느냐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주관적인 느낌이요 경험이기에, 각자의 신앙 체질에 따라 동일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 람에게는 용광로의 불처럼 뜨겁게 임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새벽의 고요함보다 더 고요하게 임할 수도 있습니다. 이 처럼 성령님께서 임하실 때 우리 각자의 주관적인 느낌이나 체험은 다 다를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정말 우리가 성령님의 사람이 되었다면 우리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첫 열매는 예외 없이 사람에 대한 지경의 확장으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을 통하여 주님께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성령님께서 임하시는 주된 목적이 땅 끝에 이르기까지 사람에 대한 우리 지경의 확장-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지난해 11월 다섯째 주, 사도행전 1장 4절-8절을 묵상할 때 잠시 유보해 두었던 주제에 이제 접근 할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5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본문 속 주님의 말씀 중에 '성령 세례'란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해 사도행전 2장에서 다루기로 했었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성령 세례를 받기 원하는 사람들이 의의로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은 용어 자체가 틀리듯이 그 의미 또한 동일하지 않습니다.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의 차이는 마치 결혼과 사랑의 차이와 같습니다. 결혼이란 한 여인과 한번 행하는 것입니다. 결혼하여 이미 자기 아내가 된 사람과 기분이 좋다고 또 다시 결혼식을 거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혼이란 유 일회적인 예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와는 다릅니다. 사랑은 한번에 걸친 요식 행위가 아닙니다. 결혼했다고 해서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사랑이 깊어 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결혼했기에 매일 사랑해야 하고, 날마다 사랑을 훈련해야만 합니다.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도 이와 똑같습니다.

성령 세례는 일평생 한번 받는 것입니다. 물세례를 한번 받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기회 있을 때마다 성령세례를 되풀이해서 받으려는 것은, 같은 사람과 틈이 날 때마다 결혼식을 거행하려는 것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날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추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이 없는 삶이란, 사랑 없는 결혼생활이 인간의 삶 을 황폐하게 하듯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고갈시킬 뿐입니다. 매일의 사랑이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가능케 하듯, 성령 충만함이 성령 세례 받은 자의 삶을 완성시켜 가는 것입니다.

결혼 예식 때에 신랑 신부가 한복을 입을 수도 있고, 양복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결혼식의 장소가 예식장일 수도 있고 예배당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마다 동일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누구든지, 이 세상 모든 사람의 결혼예복은 한 가지 모양이어 야 하고 또 결혼식장 역시 반드시 한곳이어야만 된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온전한 정신의 소유자일 수가 없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성령세례 받는 모양 또한 다 같을 수가 없습니다. 천지가 쪼개어지는 것과 같은 소용돌이 속에서 받을 수도 있고, 솜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정적 속에서 받을 수도 있기에 본인이 그 순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결 혼과 성령 세례의 형식은 사람에 따라 다 다를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양자의 본질은 동일한즉, 결혼이나 성령 세례나 모두 자기 인생에 분명한 획을 긋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결혼이란 혼자 살던 홀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배우자와 함께 사는 더불어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각자의 인생에 분명한 획을 긋는 날입니다. 더불어서의 삶을 위한 이 분명한 획이 결여되어 있을 경우 부부란 실은 한 지붕 아래 사는 남남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 세례 역시 성령님과 동거하는 분명한 획이 그어지는 사건이요, 그 증거는 성령님께서 임하신 목적처럼 사람에 대한 지경의 확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가 매일 사랑해야 하는 까닭은, 혼자 살던 자신을 죽이고 더불어 사는 공동의 삶을 날로 심화시켜가기 위함입니다. 성령세례 받은 자가 날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아야 하는 것은, 성령님의 권능을 힘입어 사람에 대한 지경을 확장시켜가기 위함입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예루살렘을 거쳐 유대로, 사마리아로, 땅 끝으로, 사람에 대한 우리의 지경을 중단 없이 넓혀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 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요, 의무요,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의무에 충실해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패스오버의 은총을 그저 베푸시사 새로운 생명을 주셨기에, 바로 그 의무에 대한 열매를 맺어 가는 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 얻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길인 까닭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은 이렇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백 번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2천 년 전 저 중동의 이스라엘에 오셨던 예수님을 직접 뵈었습니까?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누가 직접 보았습니까? 그분이 죽음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것을 누가 직접 목격했습니까? 우리 중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니, 우리는 고사하고 2천년 전 이 한반도에서 살던 우리 조상들 가운데에서도 당시 이스라엘이란 나라 이름 을 들어본 사람 역시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 주로 믿고 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단 한번도 직접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까?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시간, 2천년 전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믿고 그분을 경배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확실한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과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절대로 같은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결혼이란 인생의 획을 긋지 아니하면 부부로 더불어 살아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성령님께서 비록 나와 함께 하고 계실지라도 그분의 인도하심대로 살기 위해 내 삶에 뚜렷한 획을 긋지 아니하면 진정으로 성령님의 사람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각자의 삶을 되돌아보십시다. 언제인가 여러분의 삶에 분명한 획이 그어졌던 적이 있습니까? 다시 말해 언제부턴 가 성령님의 조명 아래에서,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수용하며 사랑하기 시작한 뚜렷한 매듭이 있습니까? 만약 있다면, 비록 급하고 바람 같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불의 혀같은 것을 본 적이 없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이미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 제 남은 것이 있다면 사람에 대한 지경을 날마다 더욱 확장시켜 가기 위해 매일 성령 충만한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마치 오순 절 날 강림하신 성령님으로 인해 외국인들에게 각기 다른 방언을 했던 것을 인생의 획으로 삼아, 그 이후부터 제자들이 땅 끝에 이르기까지 사람에 대한 지경을 넓혀갔던 것처럼 말입니다. 혹 불행하게도 자신의 인생 속에서 분명해야할 그 획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이 시간부터 성령세례를 받는 자가 될 수 있도록 겸손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인생에, 사람에 대한 지경을 넓혀 가는 분명한 획이 그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진정한 새해를 맞게 됩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새 역사가 우리의 삶을 통해 펼쳐지게 됩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언제 새날이 오느냐?' '동창이 밝아오면 새날이 됩니다'-제자의 답변이었습니다. 스승은 ‘아니’ 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제자가 또 답했습니다.-'노고지리가 우지지면 새날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스승은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더 이상 어찌 답할 바를 알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스승이 말했습니다.-'너희들이 창문을 열었을 때, 창밖에 있는 자들이 너희들과 똑 같은 형제로 보인다면 바로 그 날이 새날이니라.'

새해 새날은 밖에서부터 주어지지 않습니다. 참된 새해와 새날은 오직 우리의 내부로부터 우러나옵니다. 그 속에 오순절이 이루어진 우리의 심령으로부터 말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우리에게 패스오버의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찢어지셨던 주님이시여!
우리 모두, 오늘이 오순절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나의 인생에 획이 그어지기를 원합니다.

오늘부터 땅 끝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에 대한 지경이 확장되기를 원합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참된 갈림길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이 성령 세례의 날이 되게 하시고,

오늘부터 성령 충만함이 시작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와 같은 나의 삶이, 하나님의 패스오버의 역사를 이 땅에 이루어 가는,

새 시간들과 새날들의 교직(交織)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