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철목사

어찜이뇨? (행2:1-13)

새벽지기1 2018. 2. 28. 13:07


어찜이뇨? (행2:1-13)

벼룩에 대한 다음과 같은 실험 이야기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벼룩이란 벌레의 특징은 자기 몸체에 비해 엄청나게 높이 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벼룩 한 마리를 잡아 유리 병 속에 넣습니다. 그리고 유리 병 중간 부분을 투명한 유리로 가로막아 버립니다. 그 결과 벼룩은 뛰어오를 때마다 등이 부딪치게 됩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분명히 무언가가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를 수도 없이 계속하던 벼룩은 마침내 유리 높이 직전에서 뛰기를 멈추어 버립니다. 조금만 더 뛰면 등이 부딪치게 됨을 안 벼룩이 아예 더 이상 뛰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주어진 환경에 순응한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 일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유리 병 중간부분의 유리를 치워버립니다. 벼룩의 입장에서 보면 이제껏 자기 세계를 가로막고 있던 장애물이 제거된 셈입니다. 그렇다면 그때부터 벼룩은 마음놓고 있는 실력 껏 높이 뛰어야만 합니다. 그런데도 벼룩은 예전 유리 가 막혀 있던 위치 직전에서 여전히 멈추고 맙니다. 벼룩은 투명한 유리가 변함 없이 그곳을 가로막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까닭입니다. 이것은 벼룩이 자신의 세계를 유리 칸막이 이하로 스스로 국한시켜버린 결과이기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관련된 또 다른 실험 결과도 있습니다. 큰 수조를 만들고 물을 채웁니다. 그리고 그 수조의 한 가운데를 유리로, 이번에는 세로로 막은 뒤 한 쪽 편에 물고기들을 넣습니다. 물고기들은 번번이 중간에 막힌 유리에 머리가 부딪칩니다. 분명히 그 너머에도 물이 있는 것이 보이고, 중간에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계속 부딪치기만 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물고기 역시 중간 너머 가기를 포기해버립니다. 유리 칸막이가 있는 직전에서 방향을 바꾸어버리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가면 또 다시 머리가 어스러질 듯이 부딪칠 것을 잘 아는 까닭입니다. 그때 그 세로 칸막이 유리를 치워버립니다. 그래도 물고기들은 수족관 반 너머를 가려하 지 않습니다. 사람이 막대기로 몰아도 예전 칸막이가 있던 곳 직전에서 돌아서 버리고 맙니다. 물고기들 역시 보이지 않는 장애물이 거기에 여전히 그리고 반드시 있을 것이라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 또한 물고기들이 자기 세계를 스스로 수족관 반 이 내로 제한해버린 부정적 결과입니다.

이처럼 과학자들의 실험을 거치지 않더라도, 이와 같은 예를 우리 주위에서 직접 확인할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부위 별로 잘 포장된 닭고기들이 유통되고 있읍니다만, 불과 2-30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시장에서는 닭을 산채로 팔았습니다. 살아있는 닭을 잡고 조리를 할 수 있게끔 털을 뽑고 하는 그 힘든 과정들은 모두 우리 어머니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살아 있는 닭들을 어떻게 집으로 옮겨 갈 수 있었습니까? 장사들은 닭을 팔 때 살아있는 닭을 뒤집어 두 다리를 새끼줄로 묶어 주었습니다. 그러면 닭을 산 사람은 그 새끼줄의 한 쪽 끝을 잡고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닭의 입장에서 보면 새끼줄에 거꾸로 매달 려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집으로 옮겨간 닭을 당일로 잡으면 모르되 하루 밤을 넘기는 경우가 있게 됩니다. 만약 닭을 풀어주면 어디로 가버릴지 알 수가 없으므로, 두 발을 새끼줄에 묶어둔 대로 닭을 부엌 한 구석이나 광속에 놓아둡니다. 그리고 다음날 닭을 잡기 전에 닭의 발을 묶고 있던 새끼줄을 풀어 줍니다. 이때 새끼줄을 치우지 않고, 도리어 그 새끼줄로 닭다리 주위에 둥 그렇게 원을 그려 놓습니다. 그러면 그 새끼줄 원이 보이는 한, 닭은 움직이려 하지를 않습니다. 손으로 모는 시늉을 해도 닭은 새끼줄 너머로 나아갈 생각을 않습니다. 밤새도록 새끼줄에 묶여 있었던 닭은 눈에 보이는 새끼줄 원으로 인해, 여전히 자신이 새끼줄에 묶여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닭 역시 자기 세계를 그 좁디좁은 새끼줄 원 속으로 제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세 경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벼룩, 물고기 그리고 닭은 역시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겨우 자기세계를 스스로 유리 병 반 이하, 수족관 2분의 1 이내, 조그마한 새끼줄 원 속으로 국한시켜버리다니 그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과연 미물은 정말 미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우리 자신들은 어떻습니까? 벼룩, 물고기, 닭을 미물로 보는 우리는 과연 그 미물들과 무슨 차이를 갖고 있습니까? 인간 역시 자신이 처해 있는 세계의 바깥 세계를 수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를 인식하거나 인정하려 하지 않습 니다. 한 평생 자기라는 우물 속에 갇혀 살다가 그 우물 속에서 죽고 맙니다. 그럴진대 인간 역시 미물들과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이란 유리 병 중간 이상을 뛰어넘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족관 반 너머를 넘어서는 것을 뜻합니다. 새끼줄 바깥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왠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나의 우물 속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 세계 만물과 만인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세계를 뛰어넘지 않고서는 결코 그 크신 하나님의 그림자도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행하여야 할 자기부인이란 자기 세계로부터의 탈피와 같은 말입니다. 자기세계를 부인하지 아니하고는 주님의 세계에로의 진입은 불가능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오순절이란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을 의미합니다. 유월절과 오순절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다음 시간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날은 유월절 절기가 시작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사흘 후에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 3절에 의하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속의 오순절은 주님께서 승천하신 뒤 일주일째 되는 날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날도 예수님의 제자들과 모친을 포함한 120명의 신자들은 늘 모이던 마가의 다락방에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2절-4절이 다음과 같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바로 그 날 그곳에 주님께서 약속하셨던 주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을 가리켜 성령강림일이라 부르고 성령운동을 오순절 운동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 날 성령님께서 어떻게 강림하셨는지에 대해서도 다음 시간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 날 성령님께서 신자들에게 임하시매 그들이 성령충만함으로 성령님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다른 방언', heterais gn ssais란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그들의 언어와 다른 언어를 의미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나타난 첫 번째 현상은 '다른 방언'으로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중요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을 중요시 여기는 만큼, 이날 제자들이 말했던 '다른 방언'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언을 사람들의 언어와는 다른 천사들의 말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방언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도대체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본문의 오순절날 성령강림 때에 제자들이 말한 '다른 방언' 은 과연 말하는 자나 듣는 자나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말이었습니까?

본문 5절-7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제자들이 방언을 하기 시작했을 때에, 외국에서 태어나 외국말을 하며 외국인으로 외국에서 살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있었습니다. 그들이 제자들의 방언을 듣는 순간 그들 사이에 순식간에 소동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고 서로 확인하기에 바빴습니다. '갈릴리 사람'이란 배운 것이 없는 무식한 사람을 칭하는 대명사였습니다. 그들이 제자들의 무식함을 재차 확인하면서 그토록 소동치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구체적인 해답 을 본문 8절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제자들이 방언을 하는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제자들이 하는 말을 한결같이 자신들의 모국어로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갈릴리 사람'에 지나지 않는 무식한 어부들이 다른 나라말을 따로 배웠을 리가 없었습니다 . 그런데 그들이 모두 갑자기 유창하게 자신들의 모국어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 사이에 소동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찜이뇨'라고 서로 반문했습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는 뜻이었습니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곳에 모여 있던 외국어 사용자들은 한두 곳에서 온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본문 9절-12절이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리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 도다 하고 다 놀라며 의혹 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그들은 당시 유럽과 중동 및 아프리카의 여러 곳에서 모인 사람들로 그들은 각기 다른 모국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결같이 제자들이 하는 말을, 각각 그들의 모국어로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이 어찐 일이냐?'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 아무리 학문이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많은 외국어를 다 섭렵하기란 가능한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정규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갈릴리의 어부들이 불가사의하게도 그 일을 하 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상과 같이 오늘 본문은 도저히 오해할 수 없는 분명한 단어들로 확실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성령강림의 날, 제자들이 성령을 힘입어 각기 행하였던 '다른 방언'은 흔히 생각하듯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도 없는 천사의 말 같은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 날 제자들이 말한 '다른 방언'은, 그곳에 있는 외국인들이 자신들의 모국어로 명료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의 언어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증언하고 있는 역사적 진실입니다.

그렇다면 2천 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본문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되겠습니까? 다시 말해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한 참된 의의가 무엇이었습니까? 성령님께서 임하시므로 제자들은 비로소 자기라는 좁디좁은 우물, 갈릴리라는 편협한 자기 틀 , 이스라엘이란 바늘구멍 만한 자기 세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제자들 속에 내주 하시므로, 그들은 그제 야 그들 바깥에 있는 더 큰 세계를 만나고 그 세계를 향하여 열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므로, 그들은 유다 사람과도 사마리아 사람과도 땅 끝의 사람과도 온전히 말이 통하는 바른 그릇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비로소 유리 너머의 세계로, 새끼줄 바깥의 세계로 너머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마음 속에 그제서야 온 세계가 담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령 밖에서 그들은 자기 우물에 갇혀있는 미물과 전혀 구별되지 않았지만, 성령 안에서 그들은 벼룩이나 물고기 혹은 닭과 같은 미물과 확연하게 구별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제자들이 성령님의 조명 아래서 자기로부터 탈피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인생이 새로워졌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들에 의해 세계 역사의 흐름이 새로워졌습니다. 자기 우물을 벗어난 그들을 통해 주님께서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온 세계를 품고 있는 자를 통해서만, 온 세계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역사하심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1999년 새해 첫 번째 맞이하는 신년주일입니다. 새해는 달력을 교체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년은 신년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다가오는 것도 아닙니다. 좁디좁은 자기 우물-자기 세계를 탈피하지 못한 채 여전히 그 속에 갇혀 있다면, 달력을 수십 번 바꾸어 단다고 해도 그는 아직 묵은 해의 연장선상에 있을 뿐입니다. 자기 우물 속에는 새로운 것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우물로부터 벗어난다면, 그때가 설령 연중이라 할지라도 그때부터 새해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간도, 새로운 날도, 새로운 인생도, 새로운 역사도, 모두 자기를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를 역대상 4장 10절에 의거하여 '지경을 넓히소서'로 정했습니다. 우리 각자의 세계를 넓혀가자는 의미에서입니다. 한마디로 유리 칸막이너머로, 새끼줄너머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때에만 1999년이 정녕 새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우물 속에 스스로 갇혀 자기들과 다른 이방인을 모두 짐승처럼 여기든 제자들이 자기를 탈피하여 메대인과도, 바대인과도, 메소보다미아인과도, 애굽인과도, 리비아인과도, 로마인과도, 아라비아인과도, 그 어떤 상대와도 대화가 통하는 바른 사람이 되었던 것처럼 나를 탈피하자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새로운 인생,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유대를 향하여, 사마리아를 향하여, 땅 끝을 향하여 우리의 지경을 계속 넓혀가자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리스도의 진정한 증인으로서의 우리의 삶이 시작됩니다. 육체의 성장이란 오늘의 상태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합니다. 육체의 정체는 오늘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합니다. 육체의 쇠퇴란 오히려 오늘의 상태 이전으로 후퇴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인 성장도 이와 꼭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나로부터의 탈피-우리의 지경을 중단 없이 넓혀가야만 합니다. 오늘이 부인되는 시점으로부터 내일이 시작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1999년을 서울에서 맞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유럽의 한가운데인 스위스 제네바에서 새로운 해를 맞게 하셨습니다. 이곳에는 온갖 세계 기구들이 다 모여 있습니다. 많은 인종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눈을 들어 보십시오. 영국이 보입니다. 독일이 보입니다. 이태리가 보입니다. 아프리카가 보입니다. 중동이 보입니다. 우리와 다른 숱한 역사와 문화와 전통이 보입니다. 사도 바울도, 베드로도, 어거스틴도, 토마스 아켐피스도, 마틴 루터도, 죤 칼빈도, 죤 웨슬리도, 쉐익스피어도, 앙드레 지드도, 토스토에프스키도, 톨스토이도 모두 유럽 대륙을 먼저 거쳐갔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한 가운데서 호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지경을 넓힐 수 있는 모든 여건을 미리 허락하신 뒤에 1999년을 맞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1999년이 반드시 새해가 될 수 있도록 해주시기 위한 주님의 배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좋은 여건 속에서 지경을 넓히기는커녕 변함 없이 자기 우물 속에만 갇혀 있으려 한다면, 스스로 제한한 자기세계를 너머 서지 않으려는 미련한 닭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지경을 넓혀 가는 사람만 땅 끝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탈피하려 하지 않을 때 땅 끝은 고사하고 집안에서조차도 불가능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우리의 지경을 넓혀 가는 자들이 됩시다. 인식의 지경을 넓힙시다. 이해의 지경을 넓힙시다. 실천의 지경을 넓힙시다. 말씀의 지경을 넓힙시다. 기도의 지경을 넓힙시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지경을 넓힙시다. 유다 사람에게로, 사마리아 사람에게로, 땅 끝의 사람에게로, 사람에 대한 우리의 세계를 넓혀 가십시다. 1999년은 기필코 새해가 되고야 말 것입니다. 온 세계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새 역사를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2천 년 전 별 볼일 없는 갈릴리 사람들-그러나 자신의 우물을 탈피한 제자들을 통하여 그렇게 하셨듯 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 사실만은 잊지를 마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벼룩이나 닭 같은 미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온 세계를 품을 사람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른 사람답게 우리의 지경을 넓혀갈 수 있도록 도우시기 위해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소위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가 고작 벼룩이나 닭처럼, 한평생 자기 속에 갇혀 살아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우리는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합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내 머리카락을 세지 못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 자식의 생명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유한하고 미약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 자신이란 우물을 마치 온 세계인양 착각하면서 그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 같은 나의 삶이 벼룩이나 물고기 혹은 닭과 같은 미물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음을 이 시간 주님 앞에 고백 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또 다시 한해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별히 유럽의 한 가운데에서 또 한 해를 맞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곳에서 나의 지경을 넓혀가게 하옵소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성령님의 조명 아래에서 내 인식의 경지를, 이해의 경지를, 실천의 경지를, 말씀의 경지를, 기도의 경지를, 무엇보다도 사람에 대한 경지를 넓혀가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창조하신 온 세계를 품는 넉넉한 마음의 바른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유다 사람이나 사마리아 사람이나 땅 끝의 사람이나 구별 없이 품는 주님의 증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올해부터 진정한 새해의 환희를 맛보게 하시고, 우리 가정 이 인류 역사를 새롭게 한 마가 다락방이 되게 하옵소서.
-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