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말씀의 기적 (사도행전 13:42~52)

새벽지기1 2018. 1. 19. 10:08

 

말씀에 대한 반응과 믿음이 깊어질수록 하나님 말씀의 권위가 강해지고,
무관심에서 갈망으로, 갈망에서 찬양으로, 찬양에서 말씀의 통로로 변화됩니다. 

 

사도행전의 역사에는 두 가지 기적이 교차 반복되며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기적입니다.

물리적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 걷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거짓 가운데 있을 때 갑자기 죽은 것도 기적입니다. 베드로가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오게 된 것 또한 기적입니다. 더러운 귀신들이 떠나가고, 고침을 받은 것도 사도행전에 나타난 물리적 기적입니다.
두 번째 기적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성령 충만한 성도들을 통해서 전해짐으로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존 라일 목사는 이것을 도덕적 기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내면이 변화되어서 새로운 삶을 사는 기적입니다. 나눔도 도덕적 기적입니다. 한 영혼의 성품에 나타나는 기적도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복음을 전하자 수많은 돌이 날라 왔습니다. 자신을 돌로 치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스데반 집사는 천사의 얼굴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용서하며 죽었습니다. 이것도 도덕적 기적입니다. 사도행전 이후에도 수천 년 동안 도덕적 기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방탕한 사람이 온전한 삶을 살고,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 온순한 삶을 살고, 세속적인 삶을 살던 사람이 하늘의 뜻과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쫓아가던 사람이 믿음을 따라 사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지금도 물리적 기적과 도덕적 기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진정한 삶의 변화 ‘도덕적 기적’

 

CS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라는 책에서 도덕이 세 가지 사항과 관련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공평하고 정의롭게 살아감으로써 서로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도덕과 관련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다른 사람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잘 정돈하고 조화 있게 살아가는 것이 도덕과 관련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창조된 우주와 역사 그리고 인류가 나아가는 목적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역사와 우주와 인류가 나아가는 방향이 도덕과 연결되지 않으면 문제라는 것입니다
C.S루이스는 이 책에서 이것을 편대를 이뤄서 항해하는 선단에 비유했습니다. 수많은 배들이 함께 항해할 때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서로 부딪히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각자의 배가 건강해야 합니다. 엔진상태가 양호해야 합니다. 배가 잘 관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올바른 목적지로 향하고 있는지 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도덕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세 번째 차원의 도덕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주와 역사와 인류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어떤 목적을 위해서 창조되었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깨달을 때 도덕적 기적이 일어납니다.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도덕적 기적은 자신과 주변사람과의 조화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와 우주의 창조 목적 가운데서 자신의 존재 목적을 깨닫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때 진정한 삶의 변화가 일어나고, 기적이 나타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러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이라고 다른 지명을 쓴 것은 바나바와 사울이 파송된 수리아 안디옥과 다른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수리아 안디옥교회와 비시디아 안디옥이 나옵니다. 수리아 안디옥교회가 우리가 아는 안디옥교회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해발 천 미터 정도 되는 산간지역입니다. 요새와 같은 도시입니다. 아우구스티스 황제의 신전이 있는 곳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중요한 도시들은 군인들이 세웠습니다. 이방문화와 우상숭배로 가득했던 도시에 바나바와 사울이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물리적인 기적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병자가 나았다든지, 귀신이 떠나갔다든지 등의 물리적인 기적은 없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당시 회당에서의 모임 문화는 율법 중심이었기 때문에 어떤 의식과 절차가 있었습니다.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는 회당을 중심으로 신앙이 유지 되었습니다. 이 시대 예배와 비슷하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구약성경 몇 구절을 읽고, 회당장이 설교할 수도 있고, 그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서 특별한 방문객이나 말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 즉석에서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 회당은 바나바와 사울이 복음을 전하기에 아주 좋은 무대였습니다. 회당의 질서만 존중하면 발언 할 수 있는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약속대로, 말씀대로, 예언대로


사도행전 13장에 들어서면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이전까지 기록을 보면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바나바가 더 주도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시디아 안디옥 사역에서부터 이름순서가 바뀝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라고 바꿔서 기록되었습니다. 바울이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해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에서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쓴 것은 헬라식 이름이 바울이기 때문입니다. 사역의 주도권이 바나바에서 바울로 넘어왔지만 두 사람에게는 전혀 갈등이 없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바울이 설교했습니다. 바울이 회당에서 발언할 때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구약의 역사를 관통하면서 출애굽으로 시작해서 광야의 시대, 사울 왕, 다윗 왕, 세례 요한, 예수 그리스도까지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구약성경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대상에 맞춰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아레오바고 광장에 모인 이방인들은 구약성경 내용을 잘 모릅니다. 바울이 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복음을 전합니까. 구약성경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헬라인은 헬라인과 같이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같이 율법 있는 자에게는 율법 있는 자같이 내가 되었다.”
바울이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함께 모인 회당에서 구약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강조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약속대로 약속 하신 대로”라는 단어입니다. 몇 구절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자손 가운데 구세주를 이스라엘에게 보내 주셨는데 그 사람이 바로 예수입니다”(행 13:23).
“예수에 관해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대로 행한 뒤 예수를 나무에서 끌어내려 무덤에 묻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를 살리셨습니다”(행 13:29~30).
“우리도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좋은 소식을 전하고자 합니다”(행 13:32).
반복되는 단어가 ‘약속대로’, ‘말씀대로’, ‘예언대로’입니다. 모두 같은 말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역사 속 약속에 따라 오셨고, 약속대로 삶을 통해서 이루셨고, 다시 오실 약속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자라나면서 진리에 눈을 떠서 스스로 메시야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 결심대로 메시야가 되신 종교적 위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약속을 따라 오셨습니다. 구약성경에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200여 개가 넘습니다. 간접적으로 언급한 것까지 따지면 더 많습니다.

 

역사를 보는 눈을 뜨게 하는 ‘성경’

 

구약의 역사를 통해 나타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온 우주의 역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먼저 택하셨고, 그 민족을 통해서 메시야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 민족이 이방민족을 구원하는 통로가 되게 하려고 제사장 나라로 부르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역사를 보는 눈을 뜨게 했습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역사 속에서 일하고 계시고, 심판하실 것이라는 역사관과 세계관을 보는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역사를 보는 눈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를 통해 주어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의 역사는 우리에게 인류의 기원이 무엇이며, 인류가 어디로 가고 있고, 어디쯤 와 있으며, 어떻게 끝날 것인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성경은 눈을 뜨게 해 주는 책입니다. 성경을 보면 역사를 보는 눈이 떠집니다. 성경은 미래에 대한 예언을 하고, 그 예언이 이루어졌고, 또 다른 예언이 주어지고,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구약의 모든 예언들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예언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책이 바로 성경이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역사를 보는 눈이 뜰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인류의 창조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주신 역사를 읽을 때 분별력이 생깁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 사람들이여, 내 말을 들으십시오’”(16절).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바울의 설교를 들고 변화되었습니다. 도덕적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네 단계로 변화되었습니다.

첫째, 말씀에 대한 무관심 단계입니다. 구약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감동이 없는 단계입니다. 말씀이 어떻게 살아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말씀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갈망이 생기는 단계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회당에서 나오는데 사람들이 그들에게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좀 더 해 달라며 부탁했습니다. 집회가 다 끝난 후 많은 유대 사람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경건한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왔습니다. 그들은 그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으라고 권했습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그 도시의 사람들이 거의 다 주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42~44절).
갈망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역사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는 눈을 뜨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더 알고 싶고, 더 듣고 싶은 것입니다.
세 번째는 갈망을 넘어 찬양하는 단계입니다.
“이 말을 들은 이방 사람들은 기뻐하며 주의 말씀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선택된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됐습니다”(48절).
말씀에 대한 갈망을 통해 역사를 깨달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요 1:1).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말씀을 통해 임재하십니다. 그래서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우리에게 하신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이방 사람들의 빛으로 삼았으니 이는 네가 땅 끝까지 구원을 이루게 하려는 것이다’”(47절).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먼저 택한 이유는 이방 사람들 가운데 빛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방인으로써 회당에 참석한 사람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자신들은 유대인과 다르기 때문에 이차적인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취급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유대교로 개종을 했지만 유대인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권한을 주었을리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사도 바울의 말씀을 통해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먼저 택한 것은 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땅 끝까지 구원에 이르게 하려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말씀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는 주의 말씀이 두루 퍼지는 단계입니다.
“그리하여 주의 말씀이 그 지방 전체에 두루 퍼졌습니다”(49절).
말씀이 두루 퍼졌다는 것은 말씀을 갈망하고, 찬양하는 이들을 통해서 말씀이 확산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관심에서 말씀을 더 듣고 싶은 갈망 단계로, 이어 말씀을 찬양하는 반응이 나타나고, 이제는 말씀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단계에 와 있습니까. 참된 믿음의 사람은 말씀의 통로가 됩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의 역사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가 최우선

 

이방인들에게 역사가 나타났을 때 일부 유대인들에게 시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말하는 것을 반대하며 모욕했습니다. 말씀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마음속에 시기심이 가득 찼기 때문에 말씀이 들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이 왜 시기했을까요. 바울과 바나바가 유대인들에게 먼저 말씀을 전했지만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을 향했습니다. 선민의식이 있었던 유대인들은 반갑지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떤 말씀이 전해지고,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 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지도자들을 선동해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게 했고 결국 그 지방에서 그들을 강제로 내쫓았습니다”(50절).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권위는 자기 생각입니다. 자기 습관입니다. 자기 삶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삶의 방식이 권위였습니다. 교회도 그렇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얼마나 변화되었는가보다 자신의 권위가 얼마나 작용하느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가 살아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자신의 권위가 살아있을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물리적 기적이 나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도덕적인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기적입니다. 말씀에 대한 반응과 믿음이 깊어질수록 하나님 말씀의 권위가 강해지고, 무관심에서 갈망으로, 갈망에서 찬양으로, 찬양에서 말씀의 통로로 변화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