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우리를 깨뜨리고, 변화시켜, 복음이 증거 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임할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온 세상에 복음이 전해지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벽이 무엇일까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무관심과 냉대, 완고한 고집과 불신, 다른 언어와 문화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보다 크고 높은 장벽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편견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이 복음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편견은 선입관과 고정관념과 다릅니다. 선입관은 경험하기 전에 느끼는 주관적인 판단입니다. 고정관념은 한 시대 문화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믿음입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편견입니다. 잘못된 선입관과 잘못된 고정관념이 고착화 된 것이 편견입니다. 편견은 언제나 그릇됩니다. 언제나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으로 사람이나 사건을 대합니다. 편견은 이유 없이 속단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편견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 체험을 하고,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성도들에게는 편견이 없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 있는 편견을 얼마나 많이 무너뜨리는가가 성숙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편견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편견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3년 동안 예수님과 동행했던 사람입니다.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가 설교할 때 수천 명씩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병든 자를 낫게 할 뿐만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이 그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도 편견이 있었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심각한 편견
사도행전 10장에 로마 백부장 고넬료라는 사람이 복음으로 변화 되고, 세례를 받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 과정에서 베드로의 마음속에 있는 편견이 나타납니다. 베드로는 당시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있는 편견으로 이 사건을 대했습니다. 고넬료는 로마의 고급장교였습니다. 백부장이라고 하면 적어도 5~600명의 사람들을 통솔하는 고급장교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중요시하는 기도와 구제, 금식도 성실히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너희 집에 초청하여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해서 고넬료가 베드로를 데리러 갑니다. 고넬료가 욥바에 거의 도착할 즈음 하나님이 베드로에게도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가 배가 고파서 음식을 마련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음성이 들렸습니다. “베드로야 이것을 잡아먹어라.” 베드로가 그 보자기 안에 있는 생물들을 보니 구약 레위기 율법에서 먹지 못하도록 한 것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불결하고 더러운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유대인으로써 음식 먹는 법을 지켜왔습니다. 그 상황에서 베드로가 그렇게 대답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대면하고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율법을 주신 분이 율법을 넘어서는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율법을 주신 분보다 율법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하나님보다 중요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의 편견을 깨뜨리기 위해서 음성을 두 번씩이나 들려주시고, 환상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성령 안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율법에 근거해서 살아왔지만 이제는 성령 안에서 율법이 폐지되었고, 성령의 법을 따라 살아가야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편견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통해서 깨뜨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약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다면 베드로는 절대로 로마 백부장 고넬료를 따라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조차 죄악시 여겼습니다.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면 율법을 어길 뿐만 아니라 엄청난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이방인들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사람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심각한 유대인 랍비는 이방인 산모가 애를 낳다가 위급상황이 벌여져도 절대로 도와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 한 명의 이방인이 태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심각한 병입니까.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환상이 없었다면 베드로도 고넬료의 집에 같이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대화를 통해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과 계시를 통해서 베드로가 고넬료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는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따라 간 곳은 가이사랴 해변에 있는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아우구스투스 시저를 높이기 위해서 ‘가이사랴’라는 명칭을 붙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넬료가 어떻게 베드로를 찾아오게 되었는지,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무엇을 깨달았고, 체험했는지를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어보면 그의 마음속에 있던 편견이 어떻게 부서졌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종종 “내가 깨달았다”, “내가 깜짝 놀랐다”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깜짝 놀랐다는 표현은 전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깨어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움과 깨달음이 임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반드시 깨어짐이 나타납니다. 복음을 신실하게 전하는 사람일수록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아무것도 변화되지 않고, 아무것도 체험하지 않았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쓰임 받는 사람이라면 베드로처럼 “깨달았다”, “깨어졌다”, “깜짝 놀랐다” 등의 고백이 반드시 나타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반드시 변화됩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보십시오. 그가 무엇이 변화되었고, 무엇이 깨어졌습니까.
첫째,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인종적인 편견이 깨어지고,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받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이었던 베드로에게는 큰 깨달음과 변화였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야 내가 깨달았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겉모양으로 차별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들이라면 어떤 민족이든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34~35절).
여러분, 이런 깨달음이 우리에게도 있습니까. 하나님이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있습니까. 이 깨달음이 있다면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차별을 합니다. 어느 지역의 사투리를 조금만 써도 금방 차별합니다. 모습이 다르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편견을 가지고 대합니다. 탈북민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심한지 모릅니다.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은 또 얼마나 심합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앞서 말씀 드린 대로 복음이 증거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편견입니다. “저 사람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편견입니다. “우리만 믿으면 됐지, 우리 가족만 구원받으면 됐지, 그곳에 교회가 있을 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편견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겉모양만으로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선교지에 가보면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선교에 힘쓸수록 우리 안에 있는 편견이 사라집니다. 예수님을 더 닮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해서 헌신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 없이도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고자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를 사역에 참여시킴으로써 변화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가 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편견이 있는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을 방문한 것이 알려졌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이 베드로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보겠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할례 받은 신자들이 그를 비난하며 ‘당신이 어떻게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소?’라고 물었습니다(행 11:2~3).
예상했던 문제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편견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들에게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허락하신 것이로군요’라고 말했습니다(행 11:18).
그들이 성령 안에서 있었기 때문에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편견을 쉽게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선택을 편애로 생각했던 베드로의 편견이 깨어지고, 그 선택은 우리를 증인으로 부르신 소명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3일째 되는 날 예수를 살리셔서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선택하신 증인들, 곧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 함께 먹고 마셨던 바로 우리에게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파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심판자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가 바로 자기임을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40~42절).
베드로가 무엇을 고백했습니까. 편애와 특권이 아니라 소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은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믿게 된 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탁월함이 아닙니다. 내가 잘나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진짜 믿는 사람은 내가 예수님을 믿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부르셨다는 것을 깨달아야합니다.
나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왜라고 질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열매 맺기 위해서, 증인이 되라고 우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일부만 사랑하고 나머지는 미워하시는 편애가 아닙니다. 우리를 먼저 선택해서 열방을 향해 증언하라는 것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
하나님의 선택은 선교적입니다. 미리 소유된 백성이 된 것은 제사장이 되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제사장의 소명이 있습니다. 미리 선택 받은 자가 증인된 소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편견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만 사랑하신다는 지독한 편견이 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선교에 참여함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편견이 깨어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소명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역사 하시는 성령님
하나님은 미리 택하신 자들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왜 굳이 베드로를 고넬료에게 보냈을까요. 직접 고넬료에게 나타나셔서 됐습니다. 고넬료는 이미 경건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지혜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고넬료에게 직접 나타났어도 전도자로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굳이 욥바에 있는 사람을 가이사랴에 가서 만나라고 했을까요. 왜 환상을 여러 번 보여주셨을까요. 왜 이렇게 복잡하게 하셨을까요. 편견 때문입니다. 또한 고넬료만 구원받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먼저 믿는 자들을 통해서 함께 변화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셋째, 베드로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편견이 깨어지고, 모든 사람이 동일한 성령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고 있을 때 말씀을 듣고 있던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려왔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은 성령의 은사를 이방 사람들에게까지 부어 주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들렸던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았으니 물로 세례 주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44~47절).
베드로와 유대인들은 성령 체험을 자신들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오순절에 경험했던 성령님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 성령체험은 우리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이라면 성령님이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도 성령님이 동일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제도와 문화, 언어와 모양이 달라도 함께 예배하면 성령님이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성령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임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님은 미리 선택한 사람들을 통해서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땅을 밟아야 합니다. 그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기도할 때 그들에게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먼저 믿고 선택 받은 것은 나의 영광, 자랑, 능력이 아닙니다. 선택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소명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편견이 무너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임할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깨뜨리고, 변화시켜, 복음이 증거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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