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첫 아프리카인의 구원

새벽지기1 2018. 1. 4. 07:11


“우리가 빌립이되고, 이 시대 에티오피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역사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 일은 누군가로부터 복음을 듣는 것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이미 알고 있는 관계를 통해 복음을 듣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전혀 알지 못했던 뜻밖의 만남을 통해서도 복음이 전해집니다. 이미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면 친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어서 효과적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것이 역효과를 내기도합니다. 뜻밖의 만남은 낯설지만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복음이 전해집니다. 잘 아는 관계인지, 모르는 관계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얼마나 강력하게 역사하시느냐가 중요합니다.

 

빌립과 에티오피아 관리의 만남

 

오늘 본문에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빌립과 에티오피아 재정관리인이 만납니다. 이 만남을 통해 아프리카인이 처음으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중동에서 아프리카로 복음이 전해지는 첫 번째 사건입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에 이르기까지 확산되어 가는 또 하나의 터닝 포인트입니다. 매우 중요한 만남입니다. 이 만남은 우연한 만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성령님의 강력한 인도하심을 따라 이루어진 만남입니다. 여러분, 어떤 만남이든지 복음이 전해지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반드시 있습니다.
빌립이 유대를 떠나서 사마리아 지역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에서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귀신이 떠나가고, 사람들의 질병이 낫기도 했습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일들이 나타났습니다. 풍성한 전도열매가 맺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의 천사가 빌립에게

‘너는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거라’하고 말했습니다”(26절).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초자연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한 영혼이 구원받는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금 하나님이 빌립에게 주시는 말씀은 이해하기 힘든 내용입니다. 사마리아에서 많은 역사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 일을 두고 사람들을 만나기 힘든 광야로 가라는 지시입니다. 빌립이 하나님께 “거기에 가서 누구를 만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라고 질문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묻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여러분, 성령님의 충만한 인도하심을 받으면 해석되지 않는 발걸음을 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때로는 이해되지 않고, 해석되지 않는 길을 가야합니다. 만약 성령님이 그곳에 가면 누군가를 만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면 순종하기 쉬웠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가라고 말씀하시고, 구체적인 내용은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모두 말씀해주시면 순종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하면 다음에 일어날 일을 말씀해 주십니다.


빌립이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유대 사마리아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들이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사마리아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들이 자신의 능력과 실력이라고 생각했다면 빌립은 순종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때 하나님이 귀하게 쓰셨던 사역자라고 할지라도 어느 한순간 불순종해서 쓰임 받지 못하는 일들이 왜 일어날까요. 마음속에 교만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이 자신이 잘나서, 자신의 능력으로 이뤘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따르지 않게 됩니다. 성령님이 새롭게 인도하시는 걸음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를 떠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곳을 떠라 광야의 길로 가라는 지시는 이해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역사들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어느 한순간부터 성령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면 마음속에 교만이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 해야 합니다.


여러분, 구원은 구체적이고, 섬세한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빌립을 아주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말성경에는 “남쪽으로 가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다른 번역에는 “일어나 정오쯤 가서”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이렇게 번역해도 됩니다. “일어나 태양이 정남쪽에서 비추는 정오에 가라” 하나님은 시간과 장소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빌립에게 아주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셨습니다. 왜 그 시간이고, 왜 그 장소일까요. 바로 그 시간에 그 장소에 가야 하나님이 만나게 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시간 더 빨리 가도 안 되고 한 시간 늦게 가도 안 됩니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장소에 가야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빌립을 왜 보내셨습니까. 광야를 걷고 있는 한 사람을 하나님이 찾으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 기록을 남기신 것입니다. 빌립이 순종해서 광야에서 만난 사람은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재정을 맡은 관리였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에티오피아는 오늘날의 에티오피아가 아닙니다. 오늘날 에티오피아는 당시 ‘아비시니아’라는 나라로 불렸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에티오피아는 당시 애굽의 바로 남쪽에 있는 나라였습니다. 애굽과 오늘날의 에티오피아의 사이에 있는 지역입니다. 오늘날 지도로 보면 수단에 가깝습니다. 구약에는 ‘구스’라고 불렸고 함족이 살고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중동에서 아프리카로 내려가는 초입에 있었던 나라입니다.
‘간다게’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호칭입니다. 애굽의 바로, 로마의 시저도 호칭입니다. 에티오피아의 왕은 당시 태양의 아들로 숭배되었기에 세상의 일을 하면 안 되는 상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세속적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국가 일은 여왕, 어머니가 담당했습니다. 그 직함이 바로 간다게입니다.
빌립이 만난 에티오피아의 관리는 오늘날 재무부장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국가의 재무를 책임지는 일을 맡았다는 것은 성실하고 믿을 수 있는 실력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국가의 신임을 받고, 그 많은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엘리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는 굉장히 훌륭한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고대기록들을 보면 아프리카의 나라들이 상당히 높은 수준의 문화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시대 재무장관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성실성을 보여줍니다.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 예배드리러 갔다가”(27절)”
이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까지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지금의 수단지역에서 예루살렘까지 마차를 타고 여행을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멀고 위험할 수도 있는 거리를 국가의 중요한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이 갔습니다. 이 여행을 위해서 왕으로부터 특별휴가도 받아야 했을 것이고, 자신의 일도 내려놓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예배드리러 갈 정도로 이 여행을 중요하게 여긴 이 사람이 누구일까요.
당시 유대인들의 율법은 주변나라에도 소문이 났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율법을 보십시오. 윤리관이 탁월합니다. 높은 수준의 법의식을 보여줍니다. 이 시대 문화와 맞지 않는 부분들이 많지만 그 정신과 원리는 사람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아니지만 유대인들이 믿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기 원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율법이라는 장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때로는 완전히 개종하고, 유대인이 되겠다고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기로 서약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에티오피아 관리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으로 신분을 바꿀 수는 없지만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들은 중요한 절기가 되면 이방인이지만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뜰이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뜰 밖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거기까지라도 좋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유대율법을 따르고, 순종하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만큼 율법이 탁월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절기를 지키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루살렘을 다녀오는 마차 안에서 구약을 읽을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당시 성경은 전부 사본이었습니다. 제본된 책이 아니라 두루마기로 되어있었습니다. 둘둘 말려 있어서 한번 읽으려면 펼쳐야 했습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의 시험은 그것을 모두 외우는 것입니다. 뒷면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말하는 것이 시험이었습니다. 언제 말았다가 폈다가 하겠습니까. 그래서 통째로 외우는 훈련을 했습니다. 그 사본 자체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값이 비쌌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스스로 공부하기 위해서 성경을 구입했습니다. 또한 달리는 마차 안에서 성경 사본을 펼쳐서 읽었습니다. 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에티오피아인이 성경을 읽었다는 것은 언어적 능력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율법을 알기 위해서 언어를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지적으로 성실한 사람입니까. 대단한 열심이고, 진지한 열정을 가진 사회적 엘리트였습니다.

성경을 여는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이 빌립에게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의 남쪽으로 가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이 사람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빌립이 아무도 없을 것 같은 광야에 나갔을 때 멀리서 마차가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마차 안에 두루마기를 펴서 무언가를 읽고 있는 에디오피아 관리를 보았습니다. 성령님이 그 마차 가까이 나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티오피아 관리가 빌립을 초청했습니다. 빌립이 그에게 가까이 가서 물었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에티오피아 사람은 문자적인 내용은 이해했지만 의미는 깨닫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소.”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깨닫지 못하고, 이해되지 않아도 그렇게 성실하게 읽는다는 것이 대단합니다. 하나님이 이 영혼의 갈급함을 보시고 사람을 붙여주신 것입니다. 에티오피아 관리의 대답은 절망의 표현이었습니다. 그가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언어적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성경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눈은 학위를 마쳐야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육에 속해 있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깨닫지 못하면 열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을 통해서 거듭나지 않으면 성경을 100독 해도 열리지 않습니다. 성경을 여는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종교적 열심이 눈을 열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성령님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들리지가 않습니다. 성경 속에 빨려 들어가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쫓은 것이 아니다”(롬 10:2).
종교인으로 살아가지만 올바른 지식을 쫓지 못하는 열심, 바로 깨닫지 못한 열심에 불과한 것이 에티오피아 관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순수한 열정과 종교적 열정은 있지만 복음을 바로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빌립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가 읽고 있던 성경 구절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는 도살장으로 향하는 양처럼 끌려갔고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어린 양처럼 그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굴욕을 당하며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해 이 땅에서 그의 생명을 빼앗겼으니 누가 이 세대의 악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32~33절). 
빌립이 그에게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불법적으로 재판을 받아 불의하게 죽음을 당했지만 인내하고, 대속제물이 되어주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는 죽음이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열리지 않았던 에티오피아 관리의 눈이 열렸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는 눈이 언제 열립니까.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깨달을 때 열립니다. 육에 속한 사람을 영에 속한 사람으로 바꿔주는 것입니다. 대속제물이 되신 그분을 증거할 때 성령님이 임하셔서 영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마틴 루터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면  껍데기만 남는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책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것에 대한 예언,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예언, 그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이뤄주신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증언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그분에 대한 증언이 바로 성경입니다. 빌립으로부터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들은 그는 눈이 열렸습니다. 
“보라 물이 저기 있으니 내가 세례 받는 것이 왜 주저할 일인가?”
그는 스스로 세례 받기를 원했습니다. 눈이 열렸고, 복음과 말씀의 원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의 감동과 역사가 충만한 세례식이었습니다. 교회법을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불법이라고 소리치고 싶을지 모릅니다. 증인도 없고, 세례는 교회 등록한지 몇 개월 이상 되어야 하는데 즉시 받은 것이 문제가 있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가장 은혜롭고, 감동적인 세례였습니다. 여러분, 선교지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 믿고 변화되었으면 세례를 주고 나와야 합니다.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이 예수 믿으면 바로 세례를 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법을 뛰어 넘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를 통해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여러분, 빌립과 에티오피아 관리를 사회적으로 비교하면 빌립이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빌립은 사회적 위치도 없었습니다. 그저 평범함 성도였습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의 관리는 한나라의 재무부장관이요, 엘리트였습니다. 지적으로, 문화적으로 탁월한 수준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에티오피아인이 누구를 통해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평범한 빌립을 통해 예수님 믿었습니다.
여러분, 복음은 사회적 위치를 통해서 전해지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한 증거자를 통해서 전해집니다. 복음증거는 사회적, 문화적, 언어적 차이도 넘어서는 것입니다. 지식이 부족해도 지식이 가득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이 많아도 성령 충만하고, 예수님을 아는 사람을 통해서 복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교회입니다. 빌립이 에티오피아 관리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는 것 같은 역사가 많이 일어나는 교회입니다. 이런 역사를 온누리교회가 계속 써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빌립이 되고, 이 시대의 또 다른 에티오피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역사가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빌립이 되고, 이 시대 에티오피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역사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