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에서부터 기쁨과 행복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바람이 불길을 더 크게 만든다”는 말이 역사 속 교회의 모습을 잘 나타내줍니다. 불을 꺼뜨릴 것 같은 바람이 오히려 불을 타오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핍박의 바람이 교회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도리어 교회를 확장시키고, 복음이 더 넓고, 강력하게 증거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정치적으로 능하거나 힘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복음전파의 역사에는 언제나 반전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질 정도로 핍박이 심했습니다. 이러한 핍박 속에서 교회가 무너질 것 같았지만, 도리어 그 핍박을 통해 복음이 더 넓게, 더 빨리, 더 강력하게 확산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승리요, 복음의 생명력입니다. 사람들이 핍박을 피해 흩어진 것을 비겁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데반처럼 용감하게 순교하는 부르심도 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또 다른 곳으로 가야할 때도 있습니다. 부르심의 형태가 다 다릅니다. 핍박을 피해서 흩어진 사람들은 분명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흩어졌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역사하셨습니다.
핍박할수록 복음의 불길이 타올랐다
오늘 본문에 ‘사도들을 제외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은 흩어지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았습니다. 왜 사도들만 남았을까요. 첫째, 당시 핍박이 스데반과 같은 헬라 문화권으로부터 온 사람들에게 집중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이방문화권에서 온 그리스도인들을 더 가혹하게 핍박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비교적 안전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설득력 있는 해석입니다만 그 이후 로마제국의 강력한 핍박으로 사도들이 모두 순교했습니다. 이 시점에 시작된 핍박의 대상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시작된 핍박은 모두가 해당되었습니다.
둘째, 사도들이 정면 돌파하겠다는 각오로 예루살렘에 남았다는 해석입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떠나는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순교할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님이 그들을 보호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째든 사도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습니다.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흩어진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무너뜨리려는 사람들의 시도가 도리어 복음을 퍼뜨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흩어졌다’는 단어는 농부가 씨앗을 뿌릴 때 사용되는 단어와 동일합니다. 그들이 흩어지는 모습이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는 모습과 같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흩어짐은 복음의 확산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핍박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복음증거에 반대하며 교회를 멸절시키겠다고 사납게 날뛰는 사람들의 시도가 도리어 복음이 더 빨리, 더 넓게, 확산되는 효과를 낳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대반전의 역사입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대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승천하셨고, 성령님을 보내심으로 제자들을 통해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고 계십니다. 대반전의 역사입니다. 십자가는 대반전의 승리를 이루는 하나님의 통로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대반전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중국지도자들이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교회 지도자들을 감금하고, 때로는 핍박하고, 때로는 순교하도록 만들었지만 교회는 더 확산되었습니다. 1907년 평양에 대부흥이 일어나서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믿음의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가 되었을 때 공산당이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양대부흥을 경험한 후예들과 믿음의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한반도 전체가 부흥의 열기로 타오른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바람은 복음의 불길을 더 타오르게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핍박을 허용하신 것은 단순한 저주가 아닙니다. 그 과정을 통해 더 능력 있게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예루살렘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데 성령 충만했던 예루살렘 성도들도 자발적으로 땅 끝을 향해 흩어지기는 어려웠나 봅니다. 강압적이고, 외부적인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흩어졌습니다. 하나님은 핍박을 통해 땅 끝을 향하여 흩어지도록 만드셨습니다. 자발적 흩어짐이 이뤄지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이 과정을 통해서 계획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우리 한민족이 전 세계 750만 명이 흩어져 있습니다. 디아스포라 한인들이 왜 이렇게 전 세계로 흩어졌을까요. 경제적 이유, 사회적 이유, 교육적 이유 등 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1907년 이후 대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이 흩어짐으로 인해서 예수 안 믿던 사람들이 믿게 될 뿐만 아니라 그곳에 세워진 교회들이 선교의 전초기지가 되었습니다. 한인 디아스포라들이 세운 교회들과 성도들을 통해 엄청난 일들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민을 떠나고, 디아스포라가 되었을 때 이유는 각기 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새로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대반전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여러분, 내가 처한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이 오면 하나님이 대반전을 이루시려는 전반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최악의 상태였지만 하나님은 최악의 상태에서 최선을 이끌어내시는 분입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만들어내시고, 좌절 속에서 새로운 축복을 만들어내십니다.
사탄의 세력에 사로잡힌 사람들
대반전의 역사를 이루기까지는 엄청난 영적싸움이 있습니다. 여러분, 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두고 죽이려고 했을까요. 그들이 어떤 악한 영향을 미쳤습니까. 제거되어야 할 불순분자들입니까. 왜 제자들을 죽이려고 할까요. 왜 역사적으로 교회를 핍박했습니까. 교회가 악의 축입니까. 교회가 악한 일을 했습니까. 예배드리고, 이웃을 향해 사랑을 나누고, 교회가 존재하는 곳마다 악이 창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를 핍박했을까요.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어떤 세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울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유대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그런 지성인의 모습을 보십시오.
“사울은 스데반이 죽게 된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1절).
아무 죄가 없고, 사회에 악을 끼치지도 않았는데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의 지성은 그 일을 당연하고, 합리적으로 여겼습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러나 사울은 교회를 파괴하면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끌어내 그들을 감옥에 보냈습니다”(3절).
이 파괴적인 모습도 보십시오. 제정신이라면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제정신이 아닙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테러, 교회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내서 몰살시키는 사람들을 보면 제정신이 아닙니다. 뭔가 악한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사울도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탄이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탄을 이깁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나 사탄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악한 세력들의 움직임이 없다면 복음과 교회를 핍박할 이유가 없습니다.
표적들이 필요했던 이유
“빌립은 사마리아에 있는 한 도시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빌립의 말을 듣고 그가 일으키는 표적들을 본 사람들은 모두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찢어질 듯한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고 많은 중풍 환자들과 지체장애인들이 나았습니다. 그리하여 사마리아 도시 안에 큰 기쁨이 생겼습니다”(5~8절).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의사입니다. 과학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그는 무엇이 육체적인 질병이고, 무엇이 귀신에 사로잡힌 현상인지를 잘 구별했습니다. 지금 사마리아에서는 사람들에게 붙어있던 귀신들이 떠나가고, 육체의 질병이 낫는 표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표적들이 왜 필요합니까. 보이지 않는 영적 세력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줘야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능력과 십자가의 능력이 그 영적 세력을 능가한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줘야만 사람들이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을 말로만 전하면 사람들이 지식으로만 생각하고, 보이지 않는 영적 실체를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보이지 않는 영적전쟁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나님과 사탄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탄이 대등하게 싸운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탄을 능히 이기지만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하나님 편에 서지 않고, 사탄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고 있기 때문에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에서 귀신들이 떠나가고, 육체의 질병이 낫는 표적과 기적이 나타나자 사람들이 빌립이 전하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게 하려고 표적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복음이 증거 되고,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이런 표적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영적싸움을 어렵게 하는 것은 이 세상에 미혹하게 하는 가짜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그 흉악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면서 활동하겠습니까. 사탄은 아름다운 지성의 모습으로, 문화의 모습으로, 탈을 쓰고, 포장해서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사마리아에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마술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영향을 미친 사람입니다. 마술사 한 사람이 이토록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는 사회를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 , 세상은 잘 속습니다. 시몬과 같은 사람이 사마리아에서 성공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시대 사마리아 사람들은 마술과 점성술과 마법의 희생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회보다 귀신들이 더 많이 활동하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시몬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하는 ‘리차드 도퀴슨’이 그 주인공입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수를 역임하고,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을 쓴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진화론의 창시자 다윈을 하나님처럼 숭배하는 사람입니다. 다윈은 진화생물학자입니다. 리차드 도퀴슨은 자신을 가리켜 전투적 무신론자라고 했습니다. 전투적 무신론자는 자기만 무신론이 아니라 무신론을 변증하고 증거해서 유신론자를 모두 무신론자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얼마나 교묘한지 모릅니다. 이 사람은 언어의 마술로 사람들을 현혹시킵니다. 다윈의 진화론이 왜 성경보다 위대한지를 복잡한 단어들을 사용해서 현혹시킵니다. 시몬이 물리적인 마술로 사마리아를 사로잡았다면 그는 언어의 마술로 젊은이들을 사로잡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못 알아듣는 말을 하면 자기보다 유식한 사람인줄 압니다.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못 알아듣는 말을 하면 그 사람이 무식한 것입니다. 복음은 못 알아듣는 말이 아닙니다. 영적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뿐입니다. 복음 전파가 영적전쟁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단순하고, 순전한 복음, 헬라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인다고 말했던 복음이 영적전쟁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사마리아, 제2의 예루살렘이 되다
“빌립의 말을 듣고 그가 일으키는 표적들을 본 사람들은 모두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6절).
표적을 통해서 빌립이 전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빌립을 통해서 복음이 사마리아에 전해진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는 수백 년 동안 역사적 앙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은 가서도 안 되는 지역이며, 땅도 밟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면서 한 여인을 만나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역사적 편견을 깬 사건입니다. 복음의 역사는 문화적, 역사적, 심리적 장벽을 뛰어넘습니다. 복음의 역사 앞에 장벽이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은 영적전쟁에서도 승리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놓은 장벽도 무너뜨립니다. 교회 안에는 어떤 장벽도 없어야합니다. 또한 교회에는 복음의 능력이 살아 있어야합니다. 교회 안에는 그 어떤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 보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곳에 도착해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받기를 기도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아직 성령이 내리시지 않았고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손을 얹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14~17절).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변화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구절은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그들이 분명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는데 성령이 아직 내리시지 않았다는 표현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할 수 없고, 세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누군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것은 성령님이 역사하신 것이지만 성령 충만함은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지만 능력과 확신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 믿고 세례 받은 것은 분명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 충만한 세례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론입니다.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지고, 성령님이 임한 것은 사마리아가 또 다른 예루살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도 이제 제2의 예루살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공동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에 큰 기쁨이 임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삶은 편협하고, 재미없는 삶이 아닙니다. 큰 기쁨이 있는 삶입니다. 환경의 변화와 상관없습니다. 내면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부산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행복이나 기쁨 자체를 추구하면 주어지지 않습니다. 기쁨과 행복은 부산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면 기쁨과 행복이 따라옵니다.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이 증거됨으로써 큰 기쁨이 전해지고, 또 다른 사마리아에도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일에 온누리교회가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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