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긴장을 창조적으로 끌어안기 (사도행전6:1~7)

새벽지기1 2017. 12. 25. 09:16

 

“교회는 세상과 다르게 모든 것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문제를 창조적으로 끌어안고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는 아무 문제가 없는 천국이 아니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경험한 성도들이라면 이 시대 교회들이 겪고 있는 갈등과 문제가 없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령 충만은 계속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속 성령님의 임재가운데 거하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성령 충만을 경험한 성도들이라고 할지라도 죄에 빠지고, 사탄의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범이었지만 그들 또한 죄인이었습니다. 사탄은 그들의 공동체를 공격했습니다. 흔히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면서 규모가 작은 교회를 만들면 갈등이 저절로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는데 너무나 순진한 생각입니다. 초대교회는 규모가 작은 교회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규모가 작은 것 자체가 성령 충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 규모가 작으나 크나 갈등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는 밖으로부터는 핍박이, 안으로부터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우선순위를 점검하고, 재정립해야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님을 속임으로 인해서 징벌을 받았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서 다른 성도들이 두려움을 경험하게 되었고, 주님 앞에 신실하게 되는 영적 유익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은 이것보다 더 복잡합니다. 하나님이 아나니와 삽비라를 중히 다루심으로 인해서 교회가 더 거룩하게 된 것에 대한 사탄의 반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의 공격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관계에 상처를 주고, 서로 간에 불평을 만들어내는 공격이었습니다.
“이 무렵 제자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습니다. 그때 그들 가운데 그리스파 유대 사람들이 히브리파 유대 사람들에 대해 불평이 생겼습니다. 매일 음식을 분배받는 일에서 그리스파 유대 사람 과부들이 빠졌기 때문입니다”(1절).
제자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다양한 사람들이 공동체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될 때 생기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행정적인 문제입니다. 숫자가 많아짐으로 인해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본문에 음식을 분배 받는 일에 사람들이 빠졌다고 했습니다. 빠졌다는 것은 의도하지 않은 행정적인 실수입니다. 어쩌다 보니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지 이름이 빠지고, 돌봄을 받아야 되는 대상이 빠졌다는 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것이 공동체에 불평과 갈등으로 번질 수 있습니다.
둘째, 다양한 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이 한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생기는 문화적인 긴장입니다. 그리스파 유대인들이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불평을 가졌습니다. 그리스파와 히브리파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교회 안에 실제로 어떤 파가 존재했던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디아스포라로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에 계속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고, 헬라 문화권에 흩어져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을 방문했지만 너무나 오랫동안 이방 땅에 살았기 때문에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잃어버리고, 헬라어와 헬라문화가 익숙해진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초대교회 예루살렘 공동체에는 그 두 그룹이 공존했습니다. 그들이 원래부터 그곳에서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거주한 것일 수도 있고, 그 전에 온 사람들 일수도 있습니다. 어째든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게 되면서 그들 안에 문화적인 긴장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누락된 사람들이 그리스파 유대사람들 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있는 과부들이 구제대상에서 누락된 것입니다. 지금 초대교회에는 두 가지 문제가 함께 일어난 것입니다. 행정적인 문제이기도 하고, 문화적인 갈등이기도 합니다.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 ‘기도와 말씀’

 

아무 문제가 없듯이 넘어가는 것도 문제이고, 문제가 더 크게 비약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사도들은 이 갈등을 그냥 넘어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변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갈등을 창조적으로 해결하며 끌어안았습니다. 더 이상 사탄이 이 문제로 공동체를 무너뜨리지 못하도록 해결해 나갔습니다. 긴장과 갈등은 불가피합니다. 문제는 그 문제를 어떻게 창조적으로 해결하고, 더 아름답고, 더 긍정적인 공동체로 만드느냐 입니다.
본문에 사도들이 긴장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변화시켜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지가 잘 나타나있습니다.
“그리하여 열두 사도들은 제자들을 모두 불러 놓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분배하는 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 가르치는 사역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 가운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알려진 사람 일곱 명을 뽑으십시오. 그러면 이 임무는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겠습니다’”(2~4절).
첫째, 사도들은 우선순위를 점검하고 재정립했습니다. 구제하는 일, 음식을 분배받는 대상자가 누락되면서 갈등과 긴장이 생겼습니다. 사도들이 구제하는 일에 더 신경을 써서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고 결정하는 것이 해결책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정반대로 보이는 결정을 했습니다. 사도들은 “우리가 음식을 분배하는 일로 말씀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은 옳지 않다. 더욱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긴장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 우리 삶속에서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일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구제하는 일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겠다고 결정해야 할 것 같은데 사도들은 말씀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을 더 힘써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은 그들이 구제와 봉사를 소홀히 여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도 아닙니다. 게으름 피우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영적 공동체의 생명이 기도와 말씀으로부터 나오는데 그 일을 게을리 함으로써 생기는 더 큰 문제를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순위를 재정립한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 누락된 것 때문에 불평이 생긴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도들은 겉으로 볼 때는 행정적인 일이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더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들이라고 진단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세상적인 조직이 아닙니다. 영적 공동체입니다. 우리들의 나라, 우리들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모인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영적 우선순위가 바로서지 않으면 많은 문제들이 생깁니다. 그것이 행정의 문제일수 있고, 때로는 어떤 봉사의 문제일수도 있지만 그 문제가 생기게 된 핵심적인 이유는 말씀과 기도가 바로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말씀이 희미해질 때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아니라 사람들의 조직이 되어버립니다. 교회의 많은 긴장과 갈등이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지 않고, 자신들의 나라를 만들려고 할 때 생깁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목회자들이 기도와 말씀에 바로 서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자신들의 나라를 만들어가기 쉽습니다. 왜 그럴까요. 기도와 말씀가운데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 영적 우선순위를 바로 세울 수 있고, 어떤 봉사와 구제와 선교와 사역도 올바른 방향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둘째, 사도들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을 세움으로서 일을 분담시켰습니다. 사도들은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제안하였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들의 권위는 강압적인 권위가 아니라 함께 대화하고, 제안하는 수평적 권위였습니다. 5절에 보면 이 모든 사람들이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고 나옵니다. 사도들의 제안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 가운데 일곱 명을 세워 이 문제를 전담하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집사직의 효시가 되는 것입니다. 집사직은 영어로 ‘Deacon’이라고 하며 교제와 나눔, 섬김의 직분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갈등에 대한 해결책은 역시 사람입니다. 긴장이 일어나는 상황이 발생하면 새로운 사람을 세우라는 하나님의 사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어떤 제도보다 사람이 대안입니다. 제도를 먼저 만드는 것보다 사람을 잘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세우자고 제안했습니다. 앞으로 성령이 충만해질 사람이 아니라 충만하다고 알려진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공동체로부터 평가된 사람들을 세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성령 충만은 자기 스스로가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자칭 성령 충만은 없습니다. 성도들과 공동체로부터 평가 받는 것입니다. 예전에 은사확인 평가서가 있었습니다. 은사발견세미나도 많이 하고 그랬습니다. 윌로우크릭교회에서도 세미나를 통해서 은사를 스스로 발견하는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그 세미나를 오랫동안 하다가 하지 않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각자가 스스로를 평가해서 답을 하다 보니 그 결과가 엉뚱하게 나오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리더십의 은사가 있다고 나왔는데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르침에 은사가 있다고 나왔는데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솔직하게 답한 것이 아니라 되고 싶은 것을 표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혀 다른 답이 나온 것입니다. 설문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중지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좋은 은사평가는 실제로 봉사를 해 보는 것입니다. 몇 개월 동안 그 영역에서 봉사를 해보는 것입니다. 평가는 성도들과 공동체가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저 주님을 따를 뿐이고, 성령님께 순종할 뿐입니다. 주변사람들이 “당신 성령 충만하다”고 하면 감당하기 어려운 평가라고 말합니다.


사도들은 성령 충만하다고 알려진 사람 중에 일곱 명을 뽑아서 그 일을 맡기자고 했습니다. 여기 보면 두 가지 표현이 나옵니다. 3절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5절에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님이라는 단어가 중복되고, 지혜와 믿음이라는 단어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지혜가 무엇일까요. 현실에 대한 판단력입니다. 때로는 이성적인 판단을 사용해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지혜입 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때로는 비현실적입니다. 신비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성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지혜 충만이고, 믿음 충만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성령 충만하다고 하면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판단만 앞선다면 그것은 진정한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하다고 하면서 현실은 도외시하고, 뜬구름 잡듯이, 구름 위를 떠다니듯 믿음을 강조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지혜와 믿음이 동시에 충만한 것입니다. 그 균형이 필요합니다.

 

교회, 서로를 끌어안는 아름다운 공동체


셋째, 그렇게 일곱 명이 세워졌습니다. 사도들이 문화적 차이로 인해 다른 편에 있는 이들을 끌어안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증거가 5절에 나옵니다. 새롭게 세워진 일곱 명의 이름이 모두 헬라식입니다. 그들은 그리스파 유대인들입니다. 지금 갈등이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히브라파 유대사람들이 모든 권한을 가지고 이끌고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파 사람들이 대상에서 누락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갈등의 원인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사람들을 어디에서 세웠습니까. 그리스파 사람들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이들을 끌어안는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들의 이름 중에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니골라’라는 사람을 주목하십시오. 그 사람은 이방인입니다. 그는 안디옥 출신으로 개종한 유대인입니다. 안디옥은 당시 이방이었습니다. 초대교회가 문화적 편견을 내려놓고, 이방인도 지도자로 세워서 다문화공동체를 이루려고 했습니다. 서로 다름을 받아들여서 긴장을 창조적으로 끌어안았습니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그리스파 유대사람들이 구제명단에서 빠진 것은 단순한 누락이나 어떤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히브리파 사람들의 기준으로만 대상자를 뽑아서 누락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문화적 차이로 기준이 달랐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자신들의 기준만을 계속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파 유대인들의 기준도 포함될 수 있도록 그들로부터 지도자를 세워서 그 일을 담당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널리 퍼져 나갔으며 이로써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도 많이 늘었고 더욱이 수많은 제사장들도 이 믿음에 순종하게 됐습니다”(7절).
말씀은 계속 퍼져나갔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심지어 옛 언약의 상징인 제사장들도 새 언약의 축복가운데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긴장과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아무 문제가 없는 곳으로 가려면 공동묘지로 가라”고 했습니다. 공동묘지는 조용하기 때문에 아무 문제없습니다. 교회 안에도 갈등과 긴장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피하고, 외면하고,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긴장을 창조적으로 변화시켜서 더 아름다운 공동체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 사도들이 했던 것처럼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어야합니다.
교회는 어떤 문화적 차이, 이념적 차이, 정치적 차이도 뛰어 넘을 수 있는 창조적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은 정치, 지연, 학연으로 서로 갈등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세상과 다른 공동체가 바로 교회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온누리교회가 지금까지 잘 해왔지만 더욱 긴장을 창조적으로 끌어안고 해결해 감으로써 주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로 변화되어 가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